해군참모총장
1. 개요
海軍參謀總長. Chief of Naval Operations (CNO). 해군본부의 수장으로 해군 전체의 최선임 장교이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합동참모의장-육군참모총장 다음으로 의전서열 3위이다. 나라에 따라서 해군총사령관, 해군사령관이라 하는 경우도 있고 해군이 없는 나라에선 해안경비대사령관이 해군참모총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1]
2. 대한민국 해군
2.1. 역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3. 미합중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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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참모총장(Chief of Naval Operations, 약칭 CNO)이 미 해군의 최선임장교이다. 사실 미국의 육군과 해군의 명칭차이로 인해서 직역하자면 해군참모총장이 아닌 해군작전총장이나 해군작전부장 정도 되지만 우리와 명칭도 통일해야 하기에 해군참모총장으로 일반적으로 부른다. 일본, 중국에서는 해군작전부장으로 직역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2] 대통령과 문민 국방장관/해군장관의 참모로서 군령권이 없고 군정권도 없다.[3] , 군령권이 없는 것은 육/공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도 마찬가지이다. 해병대사령관과 함께 문민인 해군장관을 보좌한다. 알레이 버크가 취임했을 때까지는 육참총장과 달리 실제로 작전권을 가진 직책이었지만, 그 버크가 주도했던 제독들의 반란 이후로 해군을 손보려고 하던 아이크 행정부가 1958년에 작전권을 박탈하여 사실상 참모총장이 되었다. 하지만 작전권이 박탈된 이후에도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는 중.
3.1. 역대 해군참모총장
CNO 보직이 창설된 초창기에는 이 보직을 거친 뒤에도 기타 보직을 거치며 더 오래 복무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해병대사령관 보직에 비해 해사 출신자들의 입김이 매우 강하다. 1915년 CNO 보직 창설 이후의 인물들은 모두 4성, 5성급이다. 여느 미군 4성 보직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4년의 임기가 보장된다.
- 1대 : 윌리엄 벤슨(William S. Benson) - 1915~1919. 1877년 해사 졸업.[4] 원래 소장으로 취임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기에 4성까지 달았다. 해군 항공대의 창설이 추진될 때 "해군에서 비행기 쓸 일은 없을 것 같다"는 발언을 했지만 이 한마디로 영원히 고통받는 처지(...)[5]
- 2대 : 로버트 쿤츠(Robert E. Coontz) - 1919~1923. 1885년 해사 졸업. 해군 항공의 기초를 닦는 데 일조한 인물.
- 3대 : 에드워드 에벌(Edward W. Eberle) - 1923~1927. 1885년 해사 졸업. 그의 재임시기 항공모함 렉싱턴과 새러토가가 진수되었다.
- 4대 : 찰스 휴즈(Charles F. Hughes) - 1927~1930. 1884년 해사 졸업.
- 5대 : 윌리엄 프랫(William V. Pratt) - 1930~1933. 1889년 해사 졸업.
- 6대 : 윌리엄 스탠들리(William H. Standley) - 1933~1937. 1895년 해사 졸업. 퇴역 이후 소련 대사를 지냈다.
- 7대 : 윌리엄 리히(William D. Leahy) 원수 - 1937~1939. 1897년 해사 졸업. 임기를 마치고 대장으로 퇴역하여 푸에르토리코 총독을 지냈다가 진주만 공습 이후 현역에 복귀하여 합동참모의장(이라는 명칭은 오마 브래들리부터 확정된다.)을 지내며 원수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체제 미군을 총지휘하고 이끌었다.
- 8대 : 해럴드 스타크(Harold R. Stark) - 1939~1942. 1899년 해사 졸업. 진주만 공습 때문에 어니스트 킹에게 바통을 넘기고 유럽 해군사령관으로 옮겼다. 그의 진주만 공습에 대한 대처와 당시의 행적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 9대 : 어니스트 킹(Ernest King) 원수 - 1942~1945. 1901년 해사 졸업. 해군 항공대 경력이 있는 최초의 참모총장.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과 육군항공사령관 헨리 아놀드, 합참의장 윌리엄 리히와 함께 미군을 이끌었다. 미합중국함대사령관이라는 전시체제의 임시 직위가 창설되어 그 직위를 겸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급이었던 니미츠 원수를 비롯한 여러 미군 장성들, 그리고 기타 연합군 수뇌부와 자주 의견충돌을 보이기도 했다.
- 10대 : 체스터 니미츠(Chester W. Nimitz) 원수 -1945~1947. 1901년 해사 졸업.[6] 태평양 전쟁 당시 태평양함대사령관으로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미 해군 역사상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한 원수이기도 하다. 또한, 니미츠는 젊을 적 경력을 잠수함에서 많이 쌓은지라 잠수함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하이먼 리코버가 잠수함에 원자로를 탑재하여 동력원으로 삼겠다는 발상을 내놓을 당시 니미츠는 그에게 큰 성원을 보내줬고, 이는 해군참모총장 재임기에 니미츠가 남긴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 11대 : 루이스 덴펠드(Louis E. Denfeld) - 1947~1949. 1912년 해사 졸업. 제독들의 반란에서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과 싸우다가 옷을 벗었다.
- 12대 : 포레스트 셔먼(Forrest P. Sherman) - 1949~1951. 1918년 해사 졸업. 해군 항공대 출신으로, 제독들의 반란으로 황폐화한 해군 장교단을 규합하고 6.25 전쟁을 치러내야 했다. 당시 기준 최연소 해군참모총장. 하지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 13대 : 윌리엄 페치텔러(William M. Fechteler) - 1951~1953. 1916년 해사 졸업. 재임기 슈퍼캐리어 건조를 재차 추진했고, 이는 이후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 14대 : 로버트 카니(Robert B. Carney) - 1953~1955. 1916년 해사 졸업. 태평양 전쟁 당시 윌리엄 홀시의 참모장 노릇을 하였던 수상함 장교.[7] 레이테 만 해전 등 주요 전투에서 홀시를 따라다녔으며,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 사건 당시 분기탱천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홀시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홀시는 전후 원수로 진급하긴 했지만 퇴역하려다가 억지로 5성을 단 것이라 실제 보직을 갖지는 않았고 오히려 부하들이 요직을 거친 편이라고.
- 15대 : 알레이 버크(Arleigh A. Burke) - 1955~1961. 1923년 해사 졸업. 역시 홀시 밑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수상함 장교. 제독들의 반란에서 해군 장교단의 항명을 주도했지만 그 대가로 극동해군으로 좌천되었던 인물. 하지만 그 덕에 한국전쟁기 유엔군 해상구성군의 리더 노릇을 했다. 1955년 당시 소장이었지만 92명의 선배들을 제치고 바로 4성을 달며 해군참모총장에 올랐고, 6년간 재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최장기간 재임 기록을 썼다. 하지만 아이크 행정부에서는 항명의 전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지 해군참모총장의 작전권을 박탈하였다.
- 16대 : 그레고리 앤더슨(George W. Anderson Jr.) - 1961~1963. 1930년 해사 졸업. 해군 항공대 조종사 출신으로, 재임기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었다.
- 17대 : 데이비드 맥도널드(David L. McDonald) - 1963~1967. 1928년 해사 졸업. 해군 항공대 조종사 출신으로, 재임기에 통킹만 사건이 터지고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하였다.
- 18대 : 토머스 무어러(Thomas H. Moorer) - 1967~1970. 1933년 해사 졸업. 해군 항공대 조종사 출신. 합동참모의장까지 지냈다. 태평양/대서양 양양함대에서 각각 사령관을 지내고 참모총장을 거쳐 합참의장까지 지내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 해군에서 최초로 4성 보직을 4개나 거친 인물로 기록되었다. 다만 임기 중에는 사건사고들의 연속이었는데, 재임기간 구정 공세로 베트남 전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와중에 리버티 사건이 일어났다.
- 19대 : 엘모 줌왈트(Elmo R. Zumwalt) - 1970~1974. 1942년 해사 졸업.[8] 주월해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중장에서 진급하자마자 참모총장에 오른 역대 최연소 해군참모총장으로, 미 해군의 크고 아름다운 수상함대를 일궈내고 경제적인 운영을 가능케 한 레전드급 명장으로 기록되었다.
- 20대 : 제임스 할로웨이 3세(James L. Holloway III) - 1974~1978. 1943년 해사 졸업. 해군 항공대 조종사 출신으로, 통킹만 사건 당시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이었다.[9] 프롭기-제트기의 세대교체기에 조종사로 활동하며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영화 탑건의 기술자문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 제임스 할로웨이 2세 역시 해군에서 4성을 달았는데, 아버지는 해군부 인사과에서 근무할 당시 제독 진급에 실패해서 군생활이 끝날 위기에 있던 하이먼 리코버의 퇴역을 막아낸 인물로 유명하다.[10] 아들인 할로웨이 3세 역시 리코버에게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주며 엔터프라이즈급 항공모함에 이은 원자력 항모, 즉 니미츠급 항공모함 건조를 본격화했다.
- 21대 : 토머스 헤이워드(Thomas B. Hayward) - 1978~1982. 1947년 해사 졸업. 해군 항공대 조종사 출신.
- 22대 : 제임스 왓킨스(James D. Watkins) - 1982~1986. 1949년 해사 졸업. 수상함/항공 출신 위주의 참모총장 인사에서 니미츠 이후 처음으로 잠수함 전문가로서 임명되었다. 하이먼 리코버가 대령을 달고 군복 벗는다 만다 하던 때에 임관했는데 왓킨스가 4성을 달때도 리코버는 현역이었다(...) 리코버가 키워낸 애제자 중 하나로, 미국 에너지부 장관도 지냈다. 안병구 제독의 회고록에 따르면 1980년대 초중반 대한민국 해군에서 잠수함 도입이 처음 추진될 때 한국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그에게 잠수함 도입 사업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이 시기 전부터 미군은 재래식 잠수함 관련 기술과 노하우를 잊어버리기 시작해서 큰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는듯.[11]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해군참모총장으로 근무하고 전역한 뒤에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행정부에서 에너지부 장관을 역임하고 해양과학 싱크탱크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테크노크라트로서 더 큰 이력을 남겼던 인물이다.
- 23대 : 칼라일 트로스트(Carlisle A.H. Trost) - 1986~1990. 1953년 해사 졸업. 왓킨스에 이어 연속으로 잠수함 출신 참모총장이 나왔다. 육/해/공 3군의 공로훈장을 모두 받은 기록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의 보국훈장 국선장과 일본의 아사히 2등 대수장을 받기도 했다.
- 24대 : 프랭크 켈소(Frank B. Kelso II) - 1990~1994. 1952년 해사 졸업. 잠수함 출신. 재임기간 걸프 전쟁을 지휘하였지만, 테일후크 스캔들이라는 희대의 흑역사가 터졌다. 참모총장이긴 하나 테일후크의 핵심인 항공장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해임 위기는 넘겼다.
- 25대 : 제러미 마이클 보더(Jeremy M. Boorda) - 1994~1996. 이등병 출신 4성제독. 보면 알겠지만 전임자 24명 중에는 학군/학사 출신조차 없이 죄다 해사 출신이다. 그런데 고등학교도 못 마치고 이등병으로 군생활 시작했던 양반이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해당 문서로.
- 26대 : 제이 존슨(Jay L. Johnson) - 1996~2000. 해사 1968년 졸업. 해군 항공대 F-14 조종사 출신.
- 27대 : 버논 클라크(Vernon E. Clark) - 2000~2004. OCS 1968년 임관. 학사사관 출신 수상함 장교라는 점에서 참모총장직에 대한 문호가 좀더 넓어진 사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재임기간 9.11 테러가 터지고 분노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 28대 : 마이크 멀린(Michael Mullen) - 2005~2007. 해사 1968년 졸업. 수상함 출신. 재임 중 합동참모의장으로 영전했다. 토머스 무어러, 윌리엄 팰런[12] 과 함께 4개의 4성보직을 수행한 세번째 해군 제독으로 기록되었다.
- 29대 : 개리 러프헤드(Gary Roughead) - 2007~2011. 해사 1973년 졸업. 수상함 출신. 재임 중 여군의 잠수함 배치를 추진하였고, 이는 후임 그리너트 제독이 참모총장에 오른 뒤 현실화하였다. 멀린과 함께 미국 합참에서 베트남 전쟁 경력을 가진 마지막 장성으로 기록되었다.[13]
- 30대 : 조너선 그리너트(Jonathan W. Greenert) - 2011~2015. 해사 1975년 졸업. 잠수함 출신.
- 31대 : 존 리처드슨(John M. Richardson) - 2015~2019. 해사 1982년 졸업. 잠수함 출신(기관).(핵추진프로그램국장 출신)
- 32대 : 마이클 길데이(Michael M. Gilday) - 2019~. 해사 1985년 졸업. 수상함 출신. 엘모 줌왈트 제독에 이어 두번째로 중장에서 진급하자마자 참모총장에 올랐다. 수상함 출신 장교지만 사이버 분야에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
정리하자면
- 1901년 - 1942년 : 항해사관(수상함)
- 1942년 - 1945년 : 항공사관
- 1945년 - 1949년 : 항해사관(수상함)
- 1949년 - 1951년 : 항공사관
- 1951년 - 1961년 : 항해사관(수상함)
- 1961년 - 1970년 : 항공사관
- 1970년 - 1974년 : 항해사관(수상함)
- 1974년 - 1982년 : 항공사관
- 1982년 - 1994년 : 항해사관(잠수함)
- 1994년 - 1996년 : 항해사관(수상함)
- 1996년 - 2000년 : 항공사관
- 2000년 - 2011년 : 항해사관(수상함)
- 2011년 - 2015년 : 항해사관(잠수함)
- 2011년 - 2015년 : 항해사관(잠수함)
- 2015년 - 2019년 : 기관사관(잠수함)
- 2019년 - : 항해사관(수상함)
4. 해상자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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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막료장(海上幕僚長). Chief of Staff, Maritime Self Defense Force.
4.1. 역대 해상막료장
4.1.1. 주요 출신 직별
직별을 살펴보면 수상함 출신들이 가장 많긴 하다. 일본군 해군이 잠수함을 무시하고 해군항공을 가미카제로 날려먹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상함 출신들이 초반에 많았기 때문이다. 역대 해상막료장 33명 가운데 운수성 관료 출신이 1명, 수상함 출신이 22명, 해군 항공대 출신이 7명, 잠수함 출신이 3명, 주계 출신이 1명이다.
5. 인민해방군 해군
중국인민해방군해군사령원(中国人民解放军海军司令员)이라고 한다. 사령관이란 말 대신 사령원을 쓴다.
직별을 살펴보면 육군 출신인 제독이 장아이핑, 샤오징광, 예페이, 류화칭이 있고 해군에 입대해 커리어를 쌓은 제독 가운데는 잠수함 출신이 장롄중, 장딩파, 선진룽이 있고 해군 항공대 출신인 스윈성, 수상함 출신인 우성리가 있다.
5.1. 역대 해군사령원
6. 중화민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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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해군의 최선임 장교이다.
6.1. 역대 해군사령
- 중화민국(중국 국민당 정부) 해군부장(中華民國(國民政府時期)海軍部長)
- 중화민국(중국 국민당 정부) 해군총사령(中華民國(國民政府時期)海軍總司令)
7. 싱가포르 해군
싱가포르 해군총장
라이 창 한(黎忠漢, 여충한)
8. 호주 해군
9. 영국 해군
해군본부 제1해군위원(First Sea Lord)[29] 이라고 부르며 약칭은 1SL이다. 1904년 이전에는 First Naval Lord라고 불렀으며 이 당시의 약칭은 1NL이었으나 1904년에 존 피셔 제독[30] 을 시작으로 현재의 호칭으로 바뀌었다. 이 당시 제1해군위원 자리는 보통 해군 대장(Admiral) ~ 원수(Admiral of Fleet)가 맡지만 1995년에 Sir David Benjamin Bathurst를 마지막으로 원수계급의 제1해군위원은 나오지 않고 있다. 2017년 2월 현재 제1해군위원은 필립 존스 제독[31] 이다.
10. 관련 문서
[1] 카리브해나 태평양 쪽의 작은 섬나라들이 그렇다.[2] 반대로 미국쪽에선 한국군 해군참모총장도 편의상 CNO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해군참모총장의 영문표기를 CNO로 표기한다.[3] 프랑스, 인도, 파키스탄 등의 여러 나라는 한국처럼 참모총장이라 하고, 영국은 First Sea Lord라는 명칭을 쓴다. 번역은 '''해군본부 제1해군위원.'''(일본에서는 이 계급을 '''제1해군경'''이라고 직역해 버린다.) [4] 이 시대에는 준사관 내지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졸업 후에 몇년간 복무하다가 소위 임관시험을 따로 치러야 했다. 때문에 졸업년도와 실제 임관년도가 일치하지 않는다.[5] 당시 그의 해군 항공 폐지 시도를 막으려 설득에 나섰던 인물이 해군성 차관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6] 임관년도와 해사 졸업년도가 일치하지 않는 마지막 해군참모총장.[7] 2차대전기 어니스트 킹 제독은 항공&수상함, 수상함&항공 조합으로 주요 부대의 사령관/참모장 조합을 가져가서 재미를 봤다. 홀시 역시 항공 출신이라 수상함 장교들을 참모장으로 배정받곤 했으며, 수상함 전문가였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역시 항공 출신 참모장을 배정받곤 했다.[8] 이 시기 전후의 기수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라서 당초 예정보다 1년 일찍 졸업했다.[9] 미 해군 항공모함의 지휘체계가 항모비행단장과 함장으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함장 자리에도 항공 출신이 임명되는게 일반적이다.[10] 매제인 로렌스 헤이워스 소장은 해사 교장을 지냈고, 아버지가 첫 부인과 사별한 뒤 순직한 동료의 아내와 재혼하여 가족이 된 수양딸은 머큐리 계획의 우주 비행사 월리 시라와 결혼한다. 여러모로 빵빵한 스펙의 가문이다. [11] 결국 조금 더 시간이 흘러서 독일의 209급 잠수함이 장보고급 잠수함으로 도입된다.[12] 이쪽은 합참에는 들어오지 않고 통합군사령관으로 주로 활동하였다.[13] 2014년 가을 퇴역하는 제임스 에이머스 해병대사령관이 70년 군번이긴 하나 베트남 참전 경력은 없다. [14] 1990년대에야 장보고급 잠수함이 최초로 실전에 배치되었고, 진급 상한선도 낮게 형성되다가 2015년 2월에야 잠수함사령부가 함대급으로 격상되었다.[15] 참고로 이 시기에 공군참모총장은 석기시대 매니아로 대표되는 폭격기 조종사들이 많이 가져갔다.[16] 사실 핵미사일이 소형화, 고성능화하자 초창기에 뽑았던 A-5마냥 엄청 커질 필요도 없었다. SLBM도 걸음마부터라도 꾸준히 기술력을 쌓고 있었고. [17] '나가사와 코우'라고 읽기도 한다[18] 위의 사람들이 주로 호위함대에서 경력을 쌓은 것에 비해 이 사람은 소해함 위주로 경력을 쌓았다.[19] 소해대군 출신.[20] 1910-2003. 육군에서 전군했다. 1년 정도 짧게 재직했다.[21] 다른 인물들은 상장이다. 중국은 1955년까지 임명된 10명의 대장(계급)을 제외하면 더 이상 대장을 보임하지 않았다. 1955년에 계급을 폐지했다가 1988년에 부활시키면서 대장을 보임하지 않았고 상장을 최선임 계급으로 정하였다. 상장은 그런 이유로 타국의 대장에 상당한다. 북한의 상장은 타국의 중장이다.[22] 샤오징광 본인은 육군 출신으로 인민해방군 해군의 건군기에 장기간 사령원으로 근무하며 해군 개발에 힘썼다. 30년이나 한 보직을 해먹은 건 거의 하이먼 리코버에 버금가는 업적.[23] 사령원으로 재직하던 시절엔 계급이 없었다. 1988년에 재계급. 1914년생인데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화교로 태어났다.[24] 1916-2011. 사령원으로 재직하던 시절엔 계급이 없었다. 1988년에 재계급. 정치장교 출신으로 해군에선 주로 과학기술 관련 연구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았다. 수상함이나 잠수함, 해군 항공대 출신이 아닌 사령원. 그도 그럴듯이 본래는 육군 출신이기 때문이다. 항공모함을 도입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랴오닝급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25] 잠수함 장교 출신이다.[26] 1940년생으로 해군 항공대 출신의 파일럿이었다. 남해함대항공병사령원, 해군항공병부사령원, 해군부사령원 등을 지냈다. 2003년에 361호잠수함(2003년에 중국 잠수함 361호가 영해에서 난파로 인해 조난되어 해군 70명이 사망한 사건) 사건으로 경질되었다.[27] [image] 그의 무덤. 재임기간이 짧은데 재임 중에 폐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잠수함에서 주로 근무했다. 전략미사일 도입에도 신경을 쓴 인물이었다.[28] 첸청부터는 전원이 2급상장이다. 2급은 생략한다.[29] 일본에서 직역한 '제1해군경'이라는 표현도 사용.[30] 드레드노트급 전함과 순양전함의 개발을 주도한 후 고속전함의 개념까지 제시한 사람이다.[31] 영국은 영국은 해군 4성장군을 제독이라한다. 3성은 부제독 이런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