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본궁

 


1. 개요
2. 역사


1. 개요


永興本宮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에 있는 조선시대궁전, 사당.

2. 역사


일단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추존 환조)의 옛 집으로 알려져 있는데[1] 영흥의 태조 잠저, 즉 태조가 태어났고 환조가 살았던 집은 준원전이라고 따로 있었으며, 준원전 외에도 태조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다 한 동네(흑석리)에 있다 보니 '''그냥 뭉뚱그려서''' 영흥본궁으로 통일한 것이라고 한다.
<영흥본궁등록>에는 영조 1년(1725년) 4월 영흥본궁 전사청을 중건하면서 옛 청사를 철거할 때 대들보에서 해당 건물을 태조 5년(1396년) 창건했으며 인조 10년(1632년) 중건했다는 묵서명이 나왔다고 한다. 광해군 이전부터 현지 주민들이 ‘신청(神廳)’이라고 부르면서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상궁 김개시가 해마다 와서 무당을 불러다 굿을 했다고 한다(당연히 인조반정 이후 무당 제사는 폐지). 유교를 국시로 했던 조선 왕조의 창업주를 모신 사당에서 굿판이라고 하니 유생들이 뒷목 잡을 일이기는 한데 이는 본궁이 가지고 있었던 특수성과도 연관이 있다.
본궁은 왕을 제사하는 공간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국가에서 규정한 제사 공간이었던 종묘와는 격이 달랐다. 본궁은 왕의 개인 재산으로 치부되어 예조가 아닌 내수사에서 왕실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받아 본궁을 관리했고, 본궁이 어떤 것이고 어떤 형식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에 대한 무슨 법적, 제도적 기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제사 형식에서도 유교의례에서 벗어난 형식이 많았던 것. 정조 때에 본궁의 제사 의례를 정비한 기록에 보면 함흥과 영흥의 본궁에서는 별대제나 별소제, 삭망제, 야흑제 같은 기존의 중국식 예제나 세종 시대에 국속에 맞게 정비된 예제에도 없는 특이한 제사가 많았는데, 원래부터 북도 현지에 전해져 오던 토착 제사가 본궁 제사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 영흥의 '신청'에는 태조와 신의왕후의 위판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내수사와 함흥본궁 별차들이 의논해 결정한 것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 명절마다 지내는 정기 제사 외에도 다양한 토착제사를 지냈으며, 현종 6년(1665년) 중건한 뒤에 처음으로 ‘본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숙종 21년(1695년)에는 신덕왕후까지 본궁에 추부(追附), 즉 추가 제사하게 되는데, 갑술환국 이듬해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폐위된 왕비의 복권'이라는 상징성을 노린 정치적 이벤트였다는 해석이 있다.[2]
정조 16년(1792년)과 19년(1795년)에 함흥본궁과 영흥본궁의 의식을 정비하고, 아울러 환조 이자춘을 영흥본궁에 추부하게 되는데[3] 공교롭게도 정조 19년은 환조 이자춘의 8주갑이자 사도세자의 회갑, 그리고 혜경궁의 주갑이 서로 겹치는 해였다. 정조가 영흥본궁에 이성계의 아버지 환조를 모신 것도 태조의 아버지 환조를 태조의 사당에 함께 모신다는 의례를 통해 사도세자의 명예회복도 함께 노린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4]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하였고 해방이후에도 남아있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불타서 남아있지 않다.

[1]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궁전. 왕을 으레 용에 비유하는데 왕이 되지 않은 용을 '물속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용'이라는 의미의 '잠룡(潛龍)'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2] 실제로 신덕왕후의 본궁 추부를 주도한 민진후가 인현왕후의 친오빠였다. 법적으로 제도적으로도 근거가 없어보이는 본궁 존속 여부에 대해서도 민진후는 본궁이 기존 법제에 비해 변칙적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엄연히 조상을 생각하는 효심에서 나온 것이며 제사 관련 예법은 본궁 운영에서의 문제이지 존재의미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로 반박했고, 본궁은 유지될 수 있었다.[3] 현지 유생의 꿈에 환조가 나타나서 호소했다는 카더라가 있다.[4] 정조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경모궁에서 행하는 의례는 본궁 의례를 참조하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