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궁
1. 개요
景慕宮.
한성부 동부 숭교방 창경궁 맞은 편,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01[1]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에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이었다. 경모궁이 있던 자리는 사적 제237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역사
원래 이 자리에는 함춘원(含春苑)이란 정원이 있었다. 성종은 1484년(성종 15년)에 태종(조선)이 상왕이 되어 머물렀던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짓고, 창경궁의 안산인 마두봉(馬頭峰)을 보호하라는 풍수지리에 따라 이 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밖에 별정군을 배치하였고, 담을 성곽처럼 만들었으며 대문을 크게 지었다. 뿐만 아니라 함춘원의 동쪽에 있는 낙산까지 있던 민가를 전부 철거한 뒤 기묘한 화초를 심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쫓겨난 후 집권한 중종은 백성들을 다시 돌아와 살게 했다. 인조 때에는 부지 절반을 궁궐 내 가축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복시(司僕寺)에 나눠주었다. 이후 140여 년간 말을 풀어 기르는 목장으로 사용했다.
3. 영ㆍ정조 시대
1762년(영조 38년)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사망하였다. 이후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사당인 수은묘(垂恩廟)가 마련되었다. 2년 뒤 1764년(영조 40년)에 수은묘를 함춘원에 옮겨 지었고,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즉위 후 10일 만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 묘를 ‘영우원’, 사당을 ‘경모궁’으로 올려 이 때부터 경모궁으로 불렸다. 이후 건물을 고쳐지었으며 직접 편액을 써 달았다. 경모궁 서쪽에 일첨문을, 창경궁 동북쪽에 월근문을 내어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경모궁에 자주 들러 참배했으며 창경궁에는 친아버지의 사당을 바라볼 수 있는 통명전 뒤 언덕에 자경전을 지어 생모 혜경궁 홍씨를 모셨다.[2]
1785년(정조 9년) 8월에 경모궁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고 1791년(정조 15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자신의 어진을 현륭원과 경모궁 망묘루에 걸어두었다.
4. 이후
정조의 후손들인 후대 왕들도 이 곳을 중요하게 생각 해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이 이 곳에서 배례를 거행하기도 했다. 1839년(헌종 5년) 12월에 봉안각(奉安閣)이 소실되었으나 곧 중건되었고 이후 이곳에 순조, 익종, 헌종, 철종의 어진이 모셔졌다.
1899년(광무 3년) 사도세자가 족보 상 현손자가 되는 고종에 의해 장종대왕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었다. '''임금의 신분이 되었으니 신위도 종묘로 옮겨져''' 그 곳에서 제사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경모궁의 의미가 없어지자 경모궁의 망묘루를 영빈 이씨[3] 의 사당인 선희궁 내로 옮겨 짓고 이름을 ‘평락정’으로 고쳤으며 망묘루에 봉안했던 다섯 임금의 어진 또한 같이 옮겼다.
이렇게 경모궁이 비게 되자 1900년(광무 4년) 지금의 충무로 쪽에 있던 어진 봉안소 영희전을 이 곳으로 옮기고 영희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의 영정을 옮겼다. 이 때 만들어진 《영희전영건도감의궤》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후 1905년(광무 9년) 제중원의 의료진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가고, 남은 건물과 적십자병원 등이 대한의원으로 통합 신설되어 경모궁 마두봉 자리에 세워졌다. 이후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그 부속병원으로 편입되었다. 경모궁 건물들도 한동안 공존했으나 1925년에서 1930년 무렵에 거의 대부분이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은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병원과 연구소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