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쩐 9대)

 


'''묘호'''
'''예종(藝宗)'''
'''시호'''
광요영철황제(光堯英哲皇帝)
'''연호'''
소경(紹慶, 1370년 ~ 1372년)
'''존호'''
광화영철태상황제(光華英哲太上皇帝)
''''''
쩐(Trần, 陳/진)
''''''
푸(Phủ, 暊/부)[1]
'''생몰기간'''
1321년 ~ 1395년
'''재위기간'''
황제
1370년 ~ 1372년
태상황
1372년 ~ 1394년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전
2.2. 진일례의 즉위
2.3. 즉위
2.4. 치세
2.5. 태상황 재위
2.5.1. 호꾸이리에 대한 오신(誤信)
2.6. 대외 관계
2.7. 사망
3. 글재주
4. 평가
5. 창작물에서


1. 소개


베트남 쩐 왕조의 제9대 황제로 왕조의 쇠락에 일조한 암군이었다. 휘는 부(Phủ, 暊). 명종(明宗)의 아들로, 전임 황제인 양일례(楊日禮)가 진씨(陳氏)가 아닌 양씨(楊氏)라는 것이 밝혀지자 양일례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전 작위는 공정왕(恭定王).

2. 생애



2.1. 즉위 전


명종(明宗)의 셋째 아들이었던 진부는 1321년 12월에 태어났고, 공정왕에 봉해졌다. 능력이 있었던 진부는 1338년[2]겨우 18살의 나이로 군령(軍領)이 되었고, 조정에서의 지위가 올라갔다. 1353년엔[3]상국, 1367년엔 좌상국에 대왕(大王) 작위까지 받았다.
진부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황제들을 섬겼고, 여징(黎澄)[4]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恭定忠信誠確,事君與親,謹慎毫髮,人無間言,接物不親不疏,臨政無咎無譽。明王棄世,居喪三年,淚不乾睫,服除,衣無綵色,食不重味,菴蘿果、海豚魚,是南方珍味,自此絕不到口。

공정왕(진부의 작위)은 충직하고, 군주와 친밀하며 간언(間言)[5]

이 없고, 청렴하며 정치에 임했을 때, 죄를 저지르지 않지만 명예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명나라 황제가 승하하면 삼년상을 치르고 슬퍼하며 색이 없는 옷을 입고 음식도 진미가 아닌 맛이 없는 음식을 먹었다.

이처럼 진부는 능력이 출증하고, 청렴했던 쩐 왕조충신이었다. 그렇게 신하로서의 삶을 보내던 진부는 태자도 아니었고, 후임권도 없었지만 황제 즉위의 발판이 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마주치게 된다.

2.2. 진일례의 즉위


1369년 황제 유종이 승하했을 때 후사가 없어 명종의 손자이자 진원욱[6]의 아들이었던 진일례가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례는 쩐씨가 아니였다. 이 것은 훗날 일례가 폐위되는 근원이 되었다. 일례가 즉위하자 진부는 태사로 임명되었다.
유종의 제위를 이은 일례는 술을 탐하고 음탕했으며 자신의 성씨를 쩐(陳)[7]이 아닌 즈엉씨(楊氏)[8]로 바꿔버려[9] 많은 신하들을 실망시켰다. 여징은 일례의 행위를 '일례가 양씨로 태어나서 진씨 일족에게 경시당했고, 그 때문에 진씨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일례의 행위에 반발한 태재 공정왕(太宰 恭靖王)[10]이 정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처형당했다. 곧이어 진부는 위험이 자신에게 들이닥칠걸 예상하고 그 해 10월 타강진(沱江鎮)으로 도망갔다.

2.3. 즉위


도망치는 동안 좌절감을 느낀 진부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신하들이 말려 다행히 미수에 그쳤다. 이후 진씨 황실을 따르는 신하들을 만났을 때,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다는 말에 진의를 의심했지만 그들에게 진심을 느꼈고, 결국 결심하여 회군(回都)을 단행, 일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폐위된 일례를 혼덕공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12월 3일 연호를 소경(紹慶)으로 개원한다.
예종은 즉위 후 양일례의 잔당들을 제거했고, 양일례에게 진씨 황족 살해를 권유한 진일핵(陳日覈)이란 자는 '종묘사직 경위(위험)의 죄'로 다스려 사형 선고를 내렸다.

2.4. 치세


예종은 재위 2년 이후 자신의 동생 예종(睿宗)에게 양위하고, 이후 20년 동안 태상황으로 군림하며 권력을 잡았다. 예종(藝宗)이 2년 동안 재위했을 때의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았다.
  • 명종 때의 옛 제도를 복원한다.
  • 외척 호꾸이리를 중용: 호꾸이리의 두 고모는 모두 진 명종의 후궁이었는데, 한 명은 예종(藝宗), 한 명은 예종(睿宗)의 모친이었다. 태상황 예종은 호꾸이리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 1371년엔 그를 추밀원(樞密院)의 대사(大使)에 임명하였다.

2.5. 태상황 재위


예종(藝宗)은 1372년 황태제 진경(陳曔)[11]에게 양위하고, 동생으로부터 광화영철태상황제(光華英哲太上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다. 그 후 1377년 동생이 죽자 조카였던 진현(陳顯)을 옹립했으나 진현이 호꾸이리를 암살하려 하자 태상황 예종은 조카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막내아들 진옹(陳顒)을 세웠다.
베트남의 근대사학자 진중김(陳仲金)의 말에 따르면 예종 진부의 통치 시기에는 전쟁이 잦아 재정난이 가중돼 세금을 많이 걷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5.1. 호꾸이리에 대한 오신(誤信)


태상황의 지위에 있던 진부는 외척 호꾸이리를 줄곧 신임하였다. 1380년 5월 호꾸이리는 참파를 물리친 공으로 도통(都統)이 되었고, 1387년에는 상황이 그에게 평장사(平章事)라는 고위직, 검, 그리고 그를 진심으로 신임하는 느낌이 나는 글까지 하사했다.

「文武全才,君臣同德」,문무전재 군신동덕,

상황이 하사한 글. 호꾸이리의 재능을 신뢰하고 충성을 의심치 않았음을 나타낸다.

후폐제(진현)의 축출과 의문사는 호꾸이리와 관련이 있었는데 후폐제는 1388년 8월 그의 권세에 위협을 느껴 백부(상황 예종)에게 신하를 시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上皇寵愛外戚季犛,肆意任用,若不先為之慮,後必難制矣。」

상황께서 외척 계리(꾸이리)를 총애해 제멋대로 임용했으니, 먼저 쳐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를 견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발언이 호꾸이리의 귀에까지 새어나갔고, 정치적 위기에 처한 호꾸이리는 측근들과 상의, 상황은 처자식이 많으며, 진현은 예종(睿宗)의 아들에 불과하다는걸 이용하여 상황에게 말했다.

未有賣子而養姪,惟見賣姪而養子

아들을 팔아 조카를 키우는 자 없으며, 조카를 팔아 아들을 키우는 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호꾸이리는 이 말로 상황을 미혹시켰고, 여기에 넘어간 상황은 '진현을 사직을 흔들게 했으며 덕(德)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다시 자신의 막내아들인 진옹을 황제로 옹립한다. 폐위된 진현은 호꾸이리에게 시해당하였고, 신하들 중 연루되어 죽거나 벌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후 상황 예종이 사망할 때까지 호꾸이리에게 해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황이 권력을 장악하는 동안 국내에서는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완청(阮清)이 영덕왕을 자칭하며 난을 일으켰고, 완기(阮忌)가 노왕(魯王)을 자칭하며 난을 일으켰다. 가장 심했던 건 광태 2년(1389년 12월)의 반란이었다.

2.6. 대외 관계



2.6.1. 명나라


상황 예종은 1370년에 즉위했지만 명실록에 따르면 홍무 4년 (1371년)에도 양일례의 이름으로 입조했다. 홍무 5년[12]에 이르러서야 진숙명(진부)의 이름으로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선

「前王乃陳日熞,今表曰叔明,必有以也」

전대 왕은 진일정(진일례)이었는데, 지금은 숙명(진부)이라 하니, 이 상황에 이유가 필요하다.

라고 말하며 진부의 지위를 의심했다. 홍무제는 더 나아가,

「島夷何狡如是!」於是被「卻其貢不受」

오랑캐가 어찌 이리 간사한가! 그 공물은 받지 않겠다.

라며 국왕의 대우를 하지 않았다가, 다음해인 1373년에 이르러서야 진부에게 전왕인친사(前王印視事)[13]라는 애매한 직위를 내려 책봉했다.
명나라는 진부의 정권 자체가 불분명하다 판단하여 진부는 사후에도 명의 조문을 받지 못했다. 명실록엔 1396년 3월 23일 안남 사신이 진숙명이 죽었음을 알리고 애도를 표했으니 홍무제가 말했다.

「安南自陳叔明逼逐其陳日熞,使不得其死,因篡位,廢置相,仍未來告。叔明懷奸挾詐,殘滅其王,以圖富貴,不義如此,庸可與乎?今叔明之死若遣使吊慰,是撫亂臣而與賊子也。異日四夷聞之,豈不效尤,狂謀踵發,亦非中懷憮外夷之道也。爾禮部咨其國知之。」

진숙명이 진일견(양일례)을 강제로 쫒아내어, 죽게 한건 그릇된 일이고, 찬위 등 여러 문제가 있으며 숙명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일례를 멸하고 부귀를 탐하는 것은 불의에 해당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지금 숙명의 죽음을 사자를 보내서 조위하는 것은 난신[14]

을 위로하고 도적과 함께 하는 것이다.


2.6.2. 참파


진부가 태상황에 있을 때는 참파의 왕 포 비나수오르와 재위기간이 겹쳤다. 당시 대월의 황제였던 예종(睿宗)은 1376년 친정하여 참파에 쳐들어갔으나 패배하고 전장에서 전사했다.

2.7. 사망


상황으로 권세를 휘두르던 진부는 광태 7년 12월 15일[15]에 사망했다. 시신은 안생원릉(安生原陵)에 매장되었고, 묘호와 시호가 추증되었다.
상황이 사망한 후 외척 호꾸이리순종의 조정태사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고 쩐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진안을 폐위시킨 후 호 왕조의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3. 글재주


진부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글재주가 있었으며 여징은 예종이 89세 때 젊었을 때의 일을 회상하니, 아버지 명종이 죽노(竹奴)를 주제로 시를 지으라고 명하자 시를 지었고 아버지 명종도 의아하게 감상했다고 한다.

「有偉此君,中空外功,削汝為奴,恐傷天性。」

한 대나무가 있으니, 속은 비었고 겉은 단단하며, 깎아 죽부인을 만들자니, 천성을 해하는 것일까 두렵다.

또한 그가 11살 때, 한 번 궁중에서 큰 비바람을 만나 시를 지어 말했다.

「安得壯士力蓋世,可禦大屋之頹風」,

장사의 힘을 얻어 세상을 덮으니, 대옥의 퇴락한 풍조를 막을 수 있다.

예종의 작품은 여징의 남옹몽록(南翁夢錄)과 대월사기전서 등 역사서에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4. 평가


후 레 왕조때의 사관들은 예종 진부를 가리켜 일찍이 위기는 해결했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끝내 외척의 찬탈을 막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대월사기전서의 저자는 내간(內姦)이 왕의 자리를 넘봐 사직이 망했다고 직설적으로 혹평했으며 오사련(吳士連, ? ~ ?)은 더 직접적으로 그를 비난했다.

「乃委政外戚,使陳氏社稷馴致危亡,所謂前有讒而不見,後有賊而不知者也。」

'외척을 임명하여 진씨 사직을 망하게 했고, 앞에는 참언(나쁜 말)이 있어도, 뒤에는 도둑놈이 있어도 모르는 자였다. - 오사련

근대 학자 진중김(陳仲金) 역시 '큰 뜻이 없고 간신에게 속아 동족의 자손을 모두 죽이며, 충신을 멀리한 황제'라 평했다.

5. 창작물에서


징기스칸 4 PK 시나리오 4에 쩐 왕조의 국왕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정치 67, 전투 59, 지모 56. 특기로는 농업, 등용, 복병이 있다. 일본판에는 한자로 이 둘을 구분 할수 있지만, 한글패치판에서는 동생 예종과 한글 묘호(...)가 겹쳐지는 관계로 ‘례종’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었다.[16]
[1] 중국의 기록에는 휘가 진숙명(陳叔明)으로 기록되어 있다.[2] 헌종 개우 10년.[3] 유종 소풍 13년.[4] 호원징(胡元澄, 1374 ~ 1446). 호꾸이리의 아들이자 호한뜨엉의 형이다.[5] 남의 사이를 떼어 놓는 말.[6] 陳元昱, 1328 ~ 1364. 양일례가 황태백(皇太伯)으로 추존.[7] 쩐 왕조의 국성.[8] 양일례의 어머니는 본래 양강(楊姜)의 첩으로, 이미 양강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양강이 진원욱에게 일례의 어머니를 바쳤던 것이다. 그래도 진원욱은 자신의 황성인 진씨를 일례에게 주고 친자식처럼 키웠다.[9] 사실상 자신의 정통성을 없앤 것으로 쩐씨 황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10] 진원정(陳元晫).[11] 명종의 11남. 예종(藝宗)의 동생.[12] 1372년 2월 12일.[13] 선대 왕의 정무를 보는 자.[14]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15] 1395년 1월 6일.[16] 한글패치 제작자가 藝의 발음이 례라고 두음법칙이 적용한 발음이라고 생각하여 표기한 것 같은데, 본음이 '례'가 아니고, '예'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