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

 


1. 생애
2. 업적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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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동방은 물론이요, 서방 교회 영성의 샘과도 같은 존재'''

-에우세비오, <교회사>에서 오리게네스에 대해 언급하며

'''오리게네스는 사도 시대 이후 교회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 히에로니무스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 혹은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의 교부(敎父)이자, 성경 주석가, 신학자이다. '''오리겐'''이라고도 표기한다[1] 클레멘스와 더불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처음 시도하였고, 신비신학(Mystic theology)[2]의 개념 역시 처음 도입하였다.
오리게네스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요 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순교한 듯한데[3], 이 때문에 오리게네스는 17세 나이로 어린 동생 6명과 함께 고아가 되었다. 그는 무척 부지런한 천재로, 클레멘스가 운영하는 교리학교(敎理學校)에서 학문을 배우고 203년 '''18세 때'''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동 교리학교의 운영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 아라비아, 그리스 등지를 다녀왔는데, 후에 데메토리우스의 미움을 사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팔레스티나의 카에자리아로 가서 그곳에 교리학교를 세웠다. 이 시기가 그의 문필 활동의 최성기였으며 그 후로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받아 254년 티레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2. 업적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구약성경이 확실하게 자리 잡게 한 사람은 오리게네스(185년경~254년)였다. 오리게네스는 구약성경 대부분의 책들에 관한 수많은 강해와 방대한 양의 주해를 집필함으로써 그 토대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오리게네스 시대부터 구약성경의 그리스도교 주석의 원칙들이 정립되었고, 주해서와 강해를 모아 놓은 서고가 생겨나 자료들을 참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많은 해석가가 그와 의견을 달리하였고 그의 주석 방법을 배척하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교회의 주석 역사에 미친 그의 영향은 아무리 높게 평가하여도 부족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리게네스 작품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특히 그리스어권 저자들에게 미친 그의 영향을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남아 있는 그의 작품 대부분은 라틴어 번역이다. 많은 저술가가 그랬지만 암브로시우스히에로니무스는 오리게네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 의존도가 상당히 높아, 성경에 관한 그들의 해설은 오리게네스 작품의 번역이나 다름없다.'''

-조지프 T. 리나드 S.J 신부.(Joseph T. Lienhard S.J.)[4]

오리게네스는 성서신학을 탄생시킨 인물로, 그의 신학사상의 근본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철학을 조화 및 융합시킨 데 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방법이 성서의 비유적 해석, 즉 알레고리이다. 그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철학을 부적절한 이교도의 것으로 무시하거나[5], 아니면 이와 반대로 철학자들을 기독교 이전의 기독교인들로 범주화하여 해석하곤 했다[6]. 하지만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전통을 물리치면서 신학적인 지식과 철학적인 지식을 새롭게 종합하려 했다. 이 때문에 당대의 다른 거대한 학파였던 안티오키아 학파와 대립각을 세웠고, 아프리카 교회 역시 많은 비판을 했다.
특히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은 그의 구원론. 그에 따르면, 종국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마귀마저도 하느님과 화해하고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받으리라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오리게네스의 만유구원론을 비판하였고, 히에로니무스는 교회에서 오리게네스파를 축출하는 데 힘을 썼다.[7]
후대에 와서는 4중적 해석(특히 풍유적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 문자적 해석으로 성경의 본연의 근원적 가르침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종교 개혁가들에게 비판받기도 했고, 결국 보편교회와 교리적 차이가 많이 생겼다.
그의 영성, 신비신학을 후에 성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발전시켰다. 이후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십자가의 성 요한에게서 절정을 이루어 체계화됨으로써 보편교회수도원 영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리게네스의 업적 중에는 구약 아가서의 새로운 주해서를 집필한 것이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新婦)로 해석하는 '혼인적 신비신학'을 시작, 발전시켰다. 이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켜 구약 성경 주해의 양과 질을 모두 높이는 기폭제 역할을 했음은 물론, 후대의 많은 신학, 교리에도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는 <원리에 관하여(De Principiis)>[8], <켈수스를 반박함(Contra Celsum)>, <헥사플라(Hexapla)> 등이 있다. 이외에도 훨씬 더 많은 저서를 남긴 듯하다. 오죽하면 히에로니무스라는 교부가 "어느 사람이 그의 글을 다 읽을 수 있겠느냐."라고 했을 정도다.


3. 기타


그는 나태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에우세비오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가르친 바를 실제로 실천하였고, 실천한 바를 가르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활을 모방하려했다. 그는 가능한 한 학문연구에 몸바쳤으며, 때로는 아주 적은 잠을 자고, 침대에서 자려 하지 않고 바닥에서 잤다. 복음의 말씀을 생각하여 2벌의 겉옷을 갖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앗고, 또 앞날을 걱정하지 말라는 권고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려 하였다

그런 영향으로, 그는 삶에서 성욕을 완전히 배제하고 금욕을 실천하기 위해 실제로 스스로 고자가 된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자기 거세를 중범죄로 통했고, 다른 사제들은 수덕(修德) 생활을 통해 성욕을 절제하는 와중에 혼자서만 고자되기로 성욕을 절제한다는 쉬운 길(...)을 택했다는 점 때문에 당대에도 비판을 강하게 받았다.[9] . 이 때문에 사제로 서품받았지만 지역 주교가 취소했다. 그래서 후에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서품 받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그의 교회 내부 정치 생명은 끝나고 말았다.
방대한 성경 주해를 작업했고, 정말 지치지도 않고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해서 '철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리고 당시에 오리게네스의 명성이 매우 유명해서 아테네 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그를 초청하였고,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어머니 마마이아도 그를 만나기 위해 안티오키아까지 간 일화가 전한다.
이와 더불어 신학적으로도 사도 바오로사도 요한의 가르침과 상충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다는 등 이유로 교부(Church Father)로 인정받으면서도, 다른 교부 대부분과는 달리 여태껏 어떤 교회에서도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와 비슷하게 많은 업적을 세웠음에도 성인이 되지 못한 경우가 삼위일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이다. 그는 몸담은 지역 교회를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말년에 몬타누스주의에 빠지는 등, 이단에 기울어 결국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오리게네스의 경우는 후대에 재평가가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ㄱ. 흔히 비판 받는 그의 총체적 구원론apokatastasis이 맥락적으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점[10] 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학문적 우수성 등으로, 공식적 시성은 안됐을지언정 가톨릭 내부에서는 굉장히 존경받는 학자이다. 다음은 오늘날 오리게네스에 대한 평가가 어느정도로 올라왔는지를 짐작하게 해줄 것이다:

오리게네스가 총체적 구원론으로 사탄과 저주받은 이들의 사면, 복권 및 구제를 가르쳤다는 사실은 너무 폭넓게 확산되어 있어서 그 누구도 감히 이 문제의 근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고 충분히 광범위하게 조사해 본 결과 그 근거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소견이 보인다.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추기경, "Tu m'as trompé, Seigneur", in ''Recherches dans la foi''(''Beauchesne'', 1979).[11]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오리게네스는 영원한 지옥을 받아들이지 않은 최초의 교부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죽은 지 한참이 지난 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책략으로 이단자로 단죄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생각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 문제를 가장 명료하게 논증하는 작품에서조차 오리게네스는 가정적 어법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 《구원 이야기》Was dürfen wir hoffen?, 김관희 신부 옮김, 바오로딸, 2018, 80-81

오리게네스의 견해는 종종 매우 보수적이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12]

에 보면 악마는 절대로 구원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아무리 완전히 미쳐버린 정신병자라 하더라도 그렇다는 말은 못 할 것이다.") 반면에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이 주제에 대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논증을 끌어들인다. 곧 지옥 벌은 하느님이 영원한 것처럼 그렇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 그레고리오의 가르침은(한 번도 단되된 적이 없다)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숙고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플로티노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한 분 하느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불가피하게 어느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곧 피조물은 한 분 하느님에대한 그리움 때문에 존재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회개한epistrophē 후 그분께 다시 돌아가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레고리오 자신의 고유한 생각으로, 하느님이란 존재는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행복이란 하느님을 향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 《지옥 이야기》Kleiner Diskurs über die Hölle – Apokatastasis, 김관희 신부 옮김, 바오로딸, 2017, 131-133

오리게네스는 단죄되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가 죽은지 한참 뒤에 영문도 모르는 그의 제자들이 소위 '총체적 구원론'으로 낙인찍힌 스승의 가르침을 유포했기 때문이었다. 애석한(?) 것은 그 뒤로도 이른바 내로라하는 교부들이 이 총체적 구원론을 대놓고 주장했는데도 아무도 단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3]

라든가 니사의 그레고리오,[14][15] 소경 디디무스,[16] 또는 루피노와 반목하기 이전의 예로니모[17] 등이다. 좀 더 신중한 부류도 있었으니, 오로지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이 문제를 제한적으로 가르치자고 주장한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18]와 고백자 막시모[19]가 그들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 《구원 이야기》Was dürfen wir hoffen?, 김관희 신부 옮김, 바오로딸, 2018, 82-83

유감스럽게도 신학적 문제를 상상력으로 멋지게 꾸며낼 수 있는 황제의 능력은 실로 특이한 형태를 띠었다. 이러한 최초의 능력은 오리게네스 논쟁에서 나타났다. 오리게네스 논쟁은 이전에 히에로니무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시대에도 나타났으며,[20]

지금 팔레스티나의 수도승 무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논쟁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긴 논고에서 다루었으며, 543년 칙령을 공포했다. 그는 이 칙령에서 오리게네스의 『원리론』에 나오는 아홉 명제와 인물을 단죄했다. 오리게네스의 이름은, 주교들과 대수도원장이 서품을 받을 때 파문해야 하는, 이단자 목록에 올랐다. 동방의 모든 총대주교와 로마의 주교 비길리우스도 이 단죄에 동의했다. 오리게네스의 교의서는 특히 우주론에 관한 몇몇 명제를 담고 있었다. 이 명제들은 후대의 신학적 발전의 관점에서 보면 달갑지 않게 생각되었으며,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의 영향을 받은 동방 수도승들은 이를 비정상적인 신비적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취급을 받을 까닭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단호하게 고백했듯이, 자신의 신학으로 오로지 교회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저는 교회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이단의 어떤 창시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축복받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며 이 이름을 지니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행위에 따른 제 열망입니다. 그대의 오른손처럼 보이고, 사제의 이름을 지니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제가 교회의 가르침과 복음의 규칙을 혹시 위반하여, 제가 그대, 곧 교회를 불쾌하게 했다면, 온 교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하여 저, 곧 그대의 오른손을 잘라 버리고 떨쳐 버리기를 바랍니다.[21]

-에른스트 다스만Ernst Dassmann 신부, 《교회사》Kirchengeschichte II/2, 하성수 옮김, 분도출판사, 2016, 197-198

그러나 오리게네스가 자신은 '교회의 사람'이라고 애정을 담아 단언하였을 때, 그는 타고난 특성과 같은 어떤 것을 분명히 나타냈다. 오리게네스는 교회의 사람이었으며 오직 교회의 사람이길 바랐기 때문에 그를 무엇보다도 교회의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 강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교회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어떤 이단의 창시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축복받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며 이 이름을 지니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행위에 따른 제 열망입니다. 그대의 오른손처럼 보이고, 사제의 명칭을 지닌 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제가 교회의 가르침과 복음의 규칙을 혹시 위반하여, 그대, 곧 교회를 불쾌하게 했다면, 온 교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하여 저, 곧 그대의 오른손을 잘라 버리고 떨쳐 버리기 바랍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의 일치, 정통신앙에 대한 열망이 이 부르짖음에 녹아 있다. 그는 자신의 신학이 교회에 도움이 되기만을 바랐다. 게다가 그는 '성경 규범' 또는 복음적·사도적 규범에 호소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교회 규범' '교회 신앙' '교회의 말' '교회의 설교' '교회 전통' '교회의 교의' '교회의 생각과 가르침'이라는 표현을 끊임없이 사용하였다. 오리게네스는 교회에 복종하였고 교회의 결정과 교의를 매우 존경하였으며 이교인 사상가나 이단자들을 거슬러 교회의 일치에 전념한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버릇이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을 교회의 자녀라고 보았다. 그는 영적인 사람이 더 성장하면 교회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 많이 인식한다고 확신하였다. 또한 교회라는 신비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가장 큰 불운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에 대한 그의 감정은 실제로 그리스도에 대한 감정만큼 깊었다. 그는 사람들을 거룩한 삶으로 향하도록 변화시키는 지식은 그리스도에게서만 오며, 그리스도는 교회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가 주해』 2,5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말 때문에 저는 당신을 참된 말로 인정하고 당신에게 갔습니다. 내가 들은 모든 말, 내가 내 나라에 있는 동안 세속의 스승들과 철학자들에게 들은 모든 말은 참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말은 당신 안에만 있습니다." 그는, 예수 이외에는 아무도 본받지 말아야 하며, 예수 이외에 사랑해야 할 가치를 지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예수를 사랑해야 하며,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성부에게 하듯 예수에게 기도해야 하며, 예수는 마음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예수를 열심히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필요한 경우엔 고뇌와 슬픔 안에서 찾기를, 예수와 늘 함께 살며 예수에게 질문하고 예수의 답변을 득기를 바란다. 이는, 오리게네스에게 성경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매우 겸손한 태도로 예수의 감미로운 목소리만 듣기를 원한다. 그는 인간이 기대할 수 있고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이 예수 안에 집약되어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정관하고 애정 어린 감정의 끈으로 예수에게 묶여있으며, 자신의 말보다 자신의 양심을 선호하는 이들을 칭찬한다. 더욱이 오리게네스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떨어진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종종 '나의 예수' '나의 주님' '나의 구원자'에 관해 말한다. 이런 사적인 짧은 언급은 그에게 습관이 되어 그는 성경을 인용할 때도 때때로 무심결에 이 말들을 집어넣었다. 이는 나중에 일종의 그리스도교 신심 용어가 되었다.

그의 인품에 관해서도 좋은 평판만이 전해진다. 그는 매우 겸손하고 질투심이 없으며 권력에도 부(富)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친구와 반대자들에게서 부당한 억압을 받았지만 이를 불평 없이 견뎌 냈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들었지만, 그는 진리를 사랑했고 필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열의에 차 있었으며 생활방식은 철저히 금욕적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늘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애썼으며, 실제로 순교한 이 못지 않은 삶을 살았다. 오리게네스는 어린 시절부터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는 오리게네스 개인에게도 교회에게도 비극이다. 그가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어 순교자의 월계관을 썼다면, 그의 신학적 적대자들이 그를 그리 심하게 중상하지 않았을 것이고, 알렉산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주교와 빚어진 갈등도 객관적으로 조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단시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저서가 대부분 소실되어 부분만 남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정통신앙만을 내세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학문 연구에 매우 유익하고 그의 천성과 인품은 어떤 교부보다 뛰어나 본받을 만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위대한 성인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 오리게네스, 《원리론》, 이성효 주교 · 이형우 아빠스 · 최원오 신부 · 하성수 해제 및 역주, 아카넷, 2014, 60-64쪽

유스티니아누스의 편지(『교회회의에 보낸 편지』)와 열다섯 파문문(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파문문)은 황제에게 제기된 고발 내용에 상응하여, 오리게네스의 고유한 가르침보다 에바그리우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팔레스티나의 극단적 오리게네스파(Isochristes) 수도승들 가운데 매우 격렬한 과격 분리주의자들의 이단적 견해를 과녁으로 삼았다.[22]

이 공의회가 단죄한 명제들 가운데 많은 것이 오리게네스의 저서가 아니라 그를 숭배한 에바그리우스의 저서, 특히 『그노스티코스』에서 유래한 인용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오리게네스의 명제들이 단죄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에바그리우스의 명제들이 단죄된 셈이었다.

-오리게네스, 《원리론》, 이성효 주교 · 이형우 아빠스 · 최원오 신부 · 하성수 해제 및 역주, 아카넷, 2014, 136-137쪽


[1] 영어식 표기로, 국내에서는 주로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들은 물론 개신교계에서 상당수가 이렇게 표기한다. 한국 개신교가 교회사의 인물들을 표기할때 국적과 시대불문하고 무조건 영어식으로 표기하는 관행이 꽤 널리 퍼졌다.[2] 후대에 이르면 '영성'이라고 부른다.[3] 반대로 부모가 이교도였다는 설도 있다.[4] 《교부들의 성경주해(구약성경Ⅲ) 탈출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서문에서 발췌.[5] 특히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했던 아프리카 교회가 그랬다. 그러나 아프리카 교회가 철학을 멀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철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복음을 비롯한 성경을 적지 않게 무시했기 때문이었다.[6]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대중에게 설득력을 얻고 복음을 더욱 풍부하게 해석, 논리적인 해석을 하기 위해서 철학자들에 우호적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7] 대표적으로 <교회사>를 쓴 카이세리아의 에우세비우스는 히에로니무스에게 수많은 비난을 들어야했다. 하지만 이러한 히에로니무스 자신도 오리게네스의 성경 해석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8] '원리론'이라고도 옮긴다.[9] 당시 교회 내부는 수덕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고, 또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옳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하던 시대였다. 당연히 '쉬운 길'을 택한 사람 역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교회는 자기 신체를 고의로 상해하는 일 자체를 매우 중한 죄로 여겼다. 세계공의회 규범에는 스스로 거세 상해한 것은 성직서품 결격(제1차 세계공의회 규범 1항)의 사유가 된다고 했고,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도 복음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지켜 자신의 팔을 잘랐다가 파문 당한 수도자들을 언급한 금언이 나온다[10] 흔히 '모두가 구원 받는다'는 식으로 거칠게 요약되지만 오리게네스는 총체적 구원론을 가정적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를 포함한 많은 교부들, 그리고 엄연히 시성까지 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고백자 막시무스가 총체적 구원론을 주장했다는 점도 오리게네스를 변호할 근거가 된다 '총체적 구원론'이 맞는 명제인가와는 별개로, 총체적 구원론을 주장한 교부 중 오리게네스만 콕 집어서 악당 취급하는건 합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11]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 《구원 이야기》Was dürfen wir hoffen?, 김관희 신부 옮김, 바오로딸, 2018, 82-83쪽에서 간접 인용.[12] (책 속 주석) 자세한 것은 H. Crouzel, ''Origène''(Paris, 1985). pp.38ff., 331ff.을 참조하라.[13] (책 속 주석) 그에게 사후의 모든 벌은 '개선(改善)'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Strom''. VII, 16,102; VI,6,46을 참조하라.[14] (책 속 주석) 예컨대 ''Or. catech''. 26.7-9; 35,14.15. 니사의 그레고리오에 대하여 다니엘루 추기경의 다음 작품이 훌륭하게 논증하고 있다. "Comble dumal"과 "Apocatastase", in ''L'Etre et le Temps chez Grégoire de Nysse''(Leiden: Brill, 1970), pp.186-204, 205-22. 추기경의 의견에 따르면 그레고리오는 종말에 지옥의 폐지라는 개념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의 조치가 내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탄의 유한성에 대해서 니사의 주교는 오리게네스보다 훨씬 더 강하게 강조한다. 그러니까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 (플라톤과 오리게네스의 의견을 좇아서 말한다) 지옥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15] 앞 주석의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한국어 번역이 애매해서 오해를 부를 수 있는데, 영어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But the finiteness of evil s even more strongly stressed by him than Origen, and for him its disappearance "after long periods" (as he says along with Plato and Origen) is '''beyond quiestion.'''[16] (책 속 주석)역시 디디무스에게도 지옥 벌이란 개념은 어디까지나 구원을 전제로 한 벌이다. ''De Trin''. II, 12(이 작품의 정통성은 의심된다); ''Contra Manichaeos'', 2도 참조하라.[17] (책 속 주석) ''In Epist. ad Ephes.'' II,7; IV, 16. 당연히 여기에 에바그리우스 포니쿠스가 빠질 수 없다.(''Keph. Gnost.'', ed. Guillaumont, 1958), 2,84; 5,20; 6,27[18] (책 속 주석) "여기에 다른 불도 추가된다. 이 불은 단순히 정화하는 불이 아니라 죄를 범한 이들을 영원히 벌하는 불이다. 그러나 이 의미를 좀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하느님 품위에 걸맞은 수위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Or''.40,36 "오, 하느님! 당신은 저희를 무에서 창조하시고, 죽어 문드러졌을 때 저희를 다시 새롭게 형성하셨나이다. 저희는 불에 살라지거나 빛의 원조인 당신을 상속받든지 할 터인데, 만일 당신을 상속받는다면 저희도 하느님처럼 되는 것인지요? 분명한 것은 저희가 관여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Poemata de seipso''(''PL'' 37,1010); Charles Bigg, ''The Christian Platonists of Alexandria''(Oxford, 1886), p.293을 참조하라.[19] (책 속 주석)다음 졸작을 참조하라. ''Kosmische Liturgie''(Einsiedeln: Johannes Verlag, 21961), pp.356-359. 여기서 전개한 나의 막시모 해석에 대해서 데일리 신부는 이의를 제기했다. Brian E. Daley SJ., ''Apokatastasis and 'Honorable Silence' in the Eschatology of Maximus the Confessor'', in ''M.C.'', ''Actes du Symposion sur Maxime le Confesseur'', Paradosis 29(Fribourg, 1982). pp.309-339을 참조하라. 그러나 나로서는 그의 논증방식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나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막시모의더 많은 텍스트를(p.321f.) 발굴하는 공헌을 했다. 물론 나도 동의했듯이 막시모가 결정적인 관점에서 반오리게네스주의자라는 것과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게' 접근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 정의에 따라서 상벌을 나누는 것이 사실이듯이, '원수 사랑'이 매우 강력하게 강조되는 것도 사실이다. 선과 악의 분리를 가장 강렬한 어조로 주장하는 막시모의 텍스트를 꼽으라면 다음이 될 것이다. ''Ambig''.(''PG'' 91,1392A-D).[20] (책 속 주석)『교회사』II/1, 369-70[21] (책 속 주석)『루카 복음 강해』 16; 참조: E.DAQSSMANN, Identifikation mit der Kirche: ''MThZ'' 40 (1989) 324.[22] (책 속 주석)참조. Mi. Schär, ''Das Nachleben'', 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