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자유당

 


[image]
'''Freiheitliche Partei Österreichs'''
'''약칭'''
FPÖ
'''상징색'''
푸른색
'''영문명칭'''
Freedom Party of Austria
'''한글명칭'''
오스트리아 자유당
'''창당일'''
1956년 4월 7일
'''정치적 스펙트럼'''
우익 ~ 극우
'''이념'''
오스트리아 내셔널리즘
사회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유럽회의주의
우익 포퓰리즘
'''주소'''
오스트리아
Theobaldgasse 19/4A-1060
'''유럽 정당'''
정체성 민주당
'''유럽의회 정당'''
정체성과 민주주의
'''국제 조직'''
없음[1]
'''청년 조직'''
Ring Freiheitlicher Jugend
'''대표'''
노르베르트 호퍼
(Norbert Hofer)
'''연방 의회(상원) 의석수'''
16석 / 61석
'''국민 의회(하원) 의석수'''
30석 / 183석
'''유럽의회 의석수'''
3석 / 19석
'''기관지'''
''Neue Freie Zeitung''
'''웹사이트'''

1. 개요
2. 상세


1. 개요


오스트리아우익~극우 정당. 처음 이름은 독립연맹(Verband der Unabhängigen, VdU)이며 현재 이름으로 개칭한 것은 자유당이라는 군소정당과 합당한 다음 해인 1956년이다.

2. 상세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전신 독립연맹(Verband der Unabhängigen, VdU)은 1949년 옛 나치당원들과 동유럽에서 추방된 독일인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창당된 정당이었다. 1955년 자유당이라는 군소 정당과 합당하면서 다음 해에 당명을 오스트리아 자유당이라는 현재 이름으로 변경했다. 나치 잔당의 정당이라는 것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첫 번째 당수(1956~1958) 안톤 라이트할러와 두 번째 당수(1958~1978) 프리드리히 페터는 모두 친위대 장교 출신이었다. 이렇게 당의 출발부터 나치 잔당 및 나치 친화적인 추방민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리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그럼에도 이 정당의 존재가 용인될 수 있었던 데에는 중도우파 국민당의 지지표를 분산시키려는 사회민주당 측의 계산이 있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당수 프리드리히 페터는 나치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나치즘이 갈수록 인기를 잃고 또한 자유주의오스트리아 국민당 탈당파를 수용하면서, 강성우파 민족주의 색채를 희석하고 중도우파 국민자유주의로 당의 이념을 이동시켰다. 1957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국민당과 단일후보를 내세웠지만 승리하지 못했는데, 두 번째 당수인 프리드리히 페터의 재임기간 동안 당은 선거연합 대상을 바꾸어 중도좌파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선거연합을 맺었으며, 공식적으로 선거연합을 맺기 몇 년 전부터 프리드리히 페터는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브루노 크레이스키와 친분을 돈독히 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자유당이 국민당과의 동맹을 파기한 다음 사회민주당과 1970년부터 1986년까지 선겨연합을 한 결과로 1983년부터 86년까지 연립여당으로써 장관을 배출시켰고, 이렇게 당의 이념을 변화시키고 선거연합 대상을 바꾸는 과정 속에서 당의 자유주의화에 반대한 당내 극우파는 1967년 당을 탈당하여 민족민주당이라는 독자정당을 창당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58년부터 86년까지 극우정당이라기보다는 중도우파 국민자유주의 정당에 가까운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6년 외르크 하이더가 당수로 오르면서부터 당 성향이 다시 극우화되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사회민주당과 선거연합을 끝내고 히틀러 찬양 등의 극우 행보를 일삼았다.[2] 덕택에 당선된 케른텐 주지사 직에서 짤리기도 했다. 그래도 수십년 좌우대연정에 대한 피로감과 나치 출신임이 들켜버린(...) 전직 유엔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에 대한 싸늘한 국제사회의 반응에 대한 억하심정이 겹치며 차근차근 지지층을 늘려먹었고, 결국 1999년 총선에서 국민당/사민당 대연정이 파토난 틈을 타 집권에 성공한 국민당과 협상 끝에 연정을 구성하여 다시 내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집권 기간 동안 수많은 구설수로 연정내에서도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결국 2002년 총선에선 대참패하고 만다.[3] 이후 오스트리아 국민당이 사회민주당과 다시 연립정권을 구성하며 정권도 내주지만, 유럽발 극우 열풍 속에 2008년 총선에서 다시 부활의 끈을 잡았고, 급기야 2017년에는 국민당과 연립정권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국민당과 연립정부를 세우면서 1기 집권 때와 마찬가지로(...) 불협화음이 지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지지율도 크게 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2019년에 연립정권의 부총리였던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 부총리의 부패 스캔들이 드러나면서 모든 자유당 출신 장관이 사임하여 연정에서 이탈했다.
2019년 총선에서 국민당으로 몰리면서 결국 의석수가 떨어졌다. 부패 스캔들과 합쳐 2020년 코로나19 정국에서의 구미권 극우 정당의 뻘짓(...)으로 인해 유럽 극우정당의 지지율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면서 현재는 녹색당, 사민당에 이어 지지율 4위를 기록하고 있다.


[1] 1993년까지 자유주의 인터내셔널[2] 그럼에도 카다피사담 후세인 같은 무슬림 독재자들과 우정을 돈독히 하는 행보도 같이 보였다. [3] 이후 외르크 하이더는 당내 내분 과정에서 일부 계파와 함께 탈당해 오스트리아 미래당을 창당하지만, 2008년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