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벨라돈나
1. 개요
哀しみのベラドンナ / Belladonna of Sadness
무시 프로덕션이 제작한 성인용 극장 애니메이션. 1973년 개봉.
감독은 야마모토 에이이치 (山本暎一).
2. 제작 과정
당시 무시 프로덕션은 천일야화, 클레오파트라라는 성인 애니메이션을 '애니메라마' 라는 라벨로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 두 작품 모두 야마모토 에이이치가 감독이었다. 이에 데즈카 오사무는 야마모토 에이치가 고생을 했으니 원하는 작품을 하나는 맘대로 만들어도 좋다면서 이 애니의 제작을 허락했다. [1]
오락성이 강한 이전 두 작품과 다르게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 애니메이션으로 기획되었고 라벨도 애니메라마가 아닌 '애니메이션 로마네스크'로 바뀌었다. [2] 내용은 프랑스의 역사 연구가 '쥘 미슐레'의 책 '마녀'를 참고했다. 작품 컨셉은 Yellow Submarine에서 따왔다.
실험적인 기획이라 소규모로 개봉하고 제작비를 적게 들이기로 한다. 야마모토 에이이치는 후배인 스기이 기사부로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3,000만 ~ 4,000만 엔 정도의 적은 제작비로 극장용 영화를 만든다는 무모한 도전에 스기이 기사부로는 재밌겠다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스기이 기사부로는 작화감독으로 크레딧되었으나 작화 수정을 하지 않고 대부분의 그림은 원화가들이 그린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자신이 한 일은 오히려 지시를 내리고 관리하는 연출에 가까웠다고 한다. 또한 야마모토 에이이치는 이러한 내용이라는 것만 지시하고 영상을 만들 땐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흥적인 영상을 만들려고 콘티조차 안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스기이 기사부로가 감독하고 야마모토 에이이치가 기획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제작이 지연되면서 8,000만 엔 정도의 제작비가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도 적게 들인 것이긴 하다.
3. 예고편
4. 시놉시스
5. 등장인물
- 잔느 - 나카야마 아이코
- 악마 - 나카다이 타츠야
- 장 - 이토 카츠유키
- 영주 - 타카하시 마사야
6. 줄거리
마을의 농민 총각과 처녀 장과 잔느는 사랑해서 결혼을 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장이 영주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 그 대가로 당시의 법에 따라 잔느는 영주에게 처녀를 바치게 되고 신하들에게 강간을 당한다. 장은 충격에 빠져 폐인이 된다.
슬픔에 빠진 잔느에게 악마 [3] 가 나타나고 잔느는 장을 살리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해 부와 명성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유능한 잔느를 시기한 사람들은 잔느가 마녀라며 영주에게 신고하고 잔느는 목숨을 잃을 뻔한다.
이는 잔느의 영혼을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차게 해서 더 맛있게 먹으려 했던 악마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잔느는 악마를 증오하지 않고 인간 세상을 증오하며 복수를 위해 악마에게 자신을 판다.
이윽고 나라에 흑사병이 돌고 진짜 마녀가 된 잔느는 벨라돈나 꽃으로 만든 약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다시 세상에 복수를 하기로 한다.
7. 해설
연출은 아방가르드이며 성과 죽음, 폭력을 추상적으로 그려냈다. 저예산 작품이므로 화면에 움직임을 줄이기 위해 [4] 현실 세계에서는 정지화를 사용하고 대신 원화는 모두 고퀄리티의 수채화로 만들어 영상의 질을 높였다. 현실이 아닌 심상 세계의 표현은 셀 애니메이션을 사용했다. 작화의 모티브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양화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성인용 애니메이션이지만 추상적이고 굉장히 불쾌하게 연출된 성교 장면도 있어 이걸 음란하다고 하거나 야하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작품 주제는 성보다 다른 쪽에 있었다.
여성으로 태어나면 수동적으로 살아야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악마와 계약해서 뒤집는 내용으로서 페미니즘이 담겼다. 잔느는 악마와 계약했지만 잔느가 하는 행위는 전혀 악행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주목할 점이다.
수채화 원화는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후카이 쿠니가 그려냈고 [5] 중간에는 만화가 하야시 세이이치가 유리 판에 그림을 물감으로 그리고 지워가면서 하나하나 촬영해 그려내는 장면이 들어가기도 했다. 도입부 잔느가 강간을 당하는 장면과 흑사병에 나라가 무너지는 장면은 스기이 기사부로가 직접 원화를 그렸다. 그 외에는 데자키 오사무, 하네 유키요시도 원화로 참가했다. 이렇게 애니메이션임에도 움직임이 적고 그림이 추상적이라 애니메이터보다는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연출가가 많이 참여했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여성 애니메이터 오쿠야마 레이코는 여성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와 토에이에 숨기고 가명 참여를 했다고 한다.
성우는 나카야마 아이코, 나카다이 타츠야 등 주로 배우를 기용했다.
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내용은 여러 번 편집해서 개봉했으나 1986년 나온 최종 버전은 실사 부분을 제외한 무삭제판이다. 검열을 당한 것은 아니고 야마모토 에이이치 감독이 자체 검열했다고 한다. 오히려 일본의 영화 윤리위원회 쪽에서는 예술로 보고 어디를 수정하라는 지시는 전혀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시사회 때는 실사 사진을 이용한 파트가 있었으나 이것은 개봉될 때 삭제되어 최종판에도 실리지 않았다. 결말이 상영할 때마다 바뀌었는데 야마모토 에이이치는 결말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스기이 기사부로는 열린 결말을 해야한다고 주장해 이랬다 저랬다 했다고 한다. 최종적으론 야마모토 에이이치의 결말로 정해졌으며 이쪽이 더 좋은 평을 받는다.
8. 평가
아방가르드 기법이 퍼지지도 않았고 여성의 사회 진출도 부정적으로 보는 1970년대의 일본에 페미니즘을 담은 아방가르드 애니를 내놨으니 당시 사람들의 평가는 최악이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다. 차라리 야하기라도 했으면 참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추상적이고 불쾌한 연출이 많아서 성적인 흥분을 유도하지도 않는다.Belladonna of Sadness has more than enough brilliant visual artistry to keep audiences enraptured even as the film's narrative reach slightly exceeds its grasp.
'''<슬픔의 벨라돈나>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약간 따라가기 버거운 관객들조차 황홀하게 만들 만큼 눈부신 시각적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 로튼 토마토 총평
애초에 소규모 개봉에 흥행을 기대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제작비 8,000만 엔을 들였으나 흥행 수익은 4000만 엔 밖에 못 올리고 폭망했다. 배급사도 도호, 도에이, 쇼치쿠, 닛카쓰 같은 메이저 배급사가 아니라 일본 헤럴드 영화사라는 초창기 예술 영화 배급사 [6] 였으니 배급 파워를 기대할 수 없었던 상황. 이후 무시 프로덕션은 파산하고 만다. 그래서 한때 이 애니가 무시 프로덕션을 파산 시킨 애니라는 소리가 정설처럼 들렸으나 야마모토 에이이치와 스기이 기사부로는 "제작할 때부터 이미 회사에 망조가 있었다." 라면서 이 사실을 부정했다.
이렇게 다시는 볼 수 없는 환상의 작품이 되었으나 베를린 영화제에 보냈더니 [7] 비평가들이 찬사를 보냈고 유럽에서 널리 개봉되어 오히려 일본보다 유럽에서 유명한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특히 이 작품의 배경이기도 한 프랑스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애니를 극찬했다. 유럽에서는 일본을 대표하는 예술 애니메이션으로 거론되는 작품으로 오히려 일본보다 더 유명하다. 프랑스의 영화 리뷰 사이트 알로시네에서는 5점 만점에 평론가 점수 4.6점을 받았다. 프랑스의 영화 감독 '재키 골드베르' 가 극찬하기도 했다.
이로서 일본에서도 여러 번 재개봉이 되었고 마이너하지만 재조명을 받았다. 평론가 히카와 류스케, 오구로 유이치로는 이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남을 작품이라고 극찬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용이 굉장히 과격하고 일반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평론계에서는 만장일치로 극찬하고 있지만 일반 대중의 별점은 3점대라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방가르드에 내성이 없는 사람들은 역겹고 불쾌하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9. 기타
- 스기이 기사부로 말로는 원래 히피 층의 공감을 노리기 위해 만들었는데 [8] 제작이 지연되어 다 만드니 히피 문화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시기상 상당히 안 좋았던게, 1970년대 초반은 일본 영화는 전공투 운동으로 대표되는 전성기를 찍고 서서히 하향세를 타고 있던 추세였다. 스즈키 세이준이나 이마무라 쇼헤이,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감독들이 작품을 만들지 못하던 시절로, 스튜디오 체제가 해체되고 로망 포르노라는 제작방식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있었다. 산업적으로 실험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던 셈. 오시이 마모루가 영화 감독을 포기하고 애니메이션에 뛰어든 계기도 이 시절의 영향이 크다.
- 한국엔 이런 예술 애니메이션을 보는 층이 거의 없어 전혀 화제에 오르지 않으나 2016년 미국 아르벨로스에서 [9] 만든 HD 복원판이 정식 수입되었으며 구글 플레이, 유튜브 무비에서 유료로 시청할 수 있다.
- 애니메이션 감독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이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훗날 아방가르드 페미니즘 애니메이션 소녀혁명 우테나를 만든다.
10. 관련 문서
11. 바깥 고리
12. 둘러보기
[1] 데즈카 오사무는 이후 회사를 떠나 무시 프로덕션 작품임에도 제작에 데즈카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2] 다만 따로 분류하기도 귀찮고 바뀌었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아 그냥 애니메라마 3부작으로 통칭되기도 한다.[3] 마라로 추정.[4] 애니메이션에서 돈이 제일 많이 들어가는 것은 움직일 때 들어가는 동화 (프레임)이다. 움직임이 적으면 저예산으로도 작화가 좋은 애니를 만들 수 있다.[5] 츠게 요시하루랑 친한 사이라고 한다. 복원판 개봉해서 미국 배급사랑 인터뷰를 했는데, 상당히 시니컬한 성격.[6] 한국으로 따지면 백두대간 같은 곳으로, 장 뤽 고다르나 로제 바딤, 아녜스 바르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같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를 비롯한 유럽 아트하우스 영화를 배급하던 곳이었다. 2006년 카도카와(기업)에서 인수해 당시 배급한 영화들은 이 쪽에서 블루레이가 나온다.[7] 심지어 경쟁 부문이었다. 베를린 영화제는 디즈니 작품도 경쟁에 초청하는 등 그나마 칸에 비하면 애니메이션에 관대하긴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이 3대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건 이 작품이 처음이다. 영화제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디즈니를 생각하고 보러온 독일 가족 관객들이 낭패를 보고 퇴장하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https://www.berlinale.de/en/archive/jahresarchive/1973/01_jahresblatt_1973/01_jahresblatt_1973.html.[8] 실제로 사이키델릭한 연출에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히피 문화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랠프 박시의 프리츠 더 캣이나 판타스틱 플래닛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9] 복원 당시엔 시넬리시어스 픽스였다. 예술 영화 복원이나 후반 작업을 담당하는 회사로, 마츠모토 토시오의 장미의 장례 행렬을 복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