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둘리오 바렐라
1. 개요
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으로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루이스 몬티와 더불어 남미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이자 마라카낭 대첩을 이뤄낸 주역 중 한명이다.
2. 생애
2.1. 초기 선수 생활
그의 혈통은 바렐라의 피부색[1] 만큼이나 복잡했는데 스페인과 그리스 계통의 피를 이어받은 아프리카 인이었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인 이름을 쓸 때 풀 네임 대신 아버지의 성인 무이뇨스 대신 어머니의 성인 바렐라를 썼다는 것.[2]
바렐라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고 그 때문에 신문을 돌리면서 자신의 용돈을 벌었다. 그러다 자신의 꿈인 축구를 위해 학교를 나왔고, 1936년에 우루과이의 하부 리그인 데포르티보 후벤투드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첫 선수 생활은 30년대의 센터 하프 포지션에서 시작하였지만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루이스 몬티와 비슷하게 현대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들에게 영감을 제공하였다.
2년 후인 1938년에 그는 최상위 리그인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몬테비데오 완데레르스로 이적하였고 완데레르스를 4위에 올려놓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 활약으로 그는 꿈에 그리던 하늘색 유니폼을 입는데 성공하였고 1939년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칠레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의 클럽 완데레르스는 페냐롤과 나시오날에게 밀려 우승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3위 언저리의 성적은 꾸준히 찍어주는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바렐라 역시 1941년 이후로는 대표팀의 주장 자리도 차지하였고 1942년에는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에 걸맞는 리그 성적인 우승을 꿈꾸었던 바렐라는 1943년, 결국 페냐롤로 이적하게 되었다. 첫 시즌은 라이벌 나시오날에게 밀려 우승에 실패하였지만 이듬해에는 나시오날을 누르고 바렐라는 커리어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나시오날과 우승 경쟁을 놓고 다투었고, 리그에서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지만 국가 대표팀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1942년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 이후 라 마키나를 앞세운 전통의 라이벌 아르헨티나의 3연패를 막기는커녕 3, 4위 언저리에서만 놀았기 때문이었다. 우루과이는 그나마 지역 예선에서도 에콰도르와 페루의 기권으로 파라과이와 함께 본선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돌아온 우루과이의 우승을 점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2.2. 1950년 월드컵
우루과이가 속해 있던 4조에는 다른 팀들의 기권으로 인해 볼리비아와의 단판 승부로 결승 리그에 올라갈 팀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합에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를 상대로 화력쇼를 선보이며 8:0으로 압살하였고 결승 리그에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결승 리그에서 우루과이가 스페인과 스웨덴을 상대로 보여준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스페인을 상대로 한 첫 경기에서 바렐라는 후반 28분, 중거리 슈팅으로 동점골을 뽑아내었다. 이것이 바렐라의 이 대회에서 유일한 월드컵 득점이었다. 하지만 이 골이 아니었으면 아마 우루과이는 초반에 기운이 빠져서 탈락했을 것이다. 스웨덴과의 경기에서도 우루과이는 에곤 욘손의 부상으로 인해 간신히 역전승을 거두는 졸전을 펼쳤고, 때문에 그 이전에 두 팀을 각각 7:1과 6:1로 깨뜨린 브라질의 상대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앞선 두 경기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펼쳐보인 브라질, 그리고 그들의 홈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경기. 게다가 무승부만 해도 브라질의 우승인 상황. 그래서 브라질 신문들은 브라질의 우승이 확정이라도 된 것 마냥 심하게 설레발을 떨어댔고 바렐라는 이 신문들을 모아 동료들과 함께 오줌을 누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경기 당일, 당시 우루과이의 감독이었던 후안 로페스마저 브라질의 기세에 눌려 수비적인 전술을 펼칠 것을 지시하였지만 주장 바렐라는 달랐다.
경기 시작 직전, 동료들을 향해 최선을 다하자는 내용으로 연설을 하였다.후안 로페즈는 좋은 감독이야. 하지만 오늘은 그의 판단이 틀렸어. 만약 우리가 수비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스페인이나 스웨덴과 같은 꼴을 당할 것이야.
그리고 킥오프 직전 동료들에게 한 마디의 일갈을 날렸다.게임은 피치에서 이루어진다. 피치에 나오면 관중들을 신경쓰지 마라. 그들은 단지 숲 밖에 있을 뿐이니까.
처음에는 우루과이도 맞불을 놓을 각오로 밀어붙이려 하였지만 브라질의 화력은 예상대로 강했고, 우루과이를 작살내겠다는 각오로 거칠게 몰아붙였다. 결국 우루과이는 브라질의 공세에 밀렸다. 후반 2분, 브라질의 프리아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다른 우루과이 대표팀 멤버들이 전부 시합을 포기하려고 할 때 바렐라가 나섰다.경기를 하는 것은 제 3자가 아니야. 자! 이제 쇼를 보여주자!!
이 말에 투지를 크게 자극받은 우루과이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남은 시간 동안 처절하게 버텨냈고 결국 후안 스키아피노의 동점골과 알시데스 기지아의 역전골로 대역전극을 이끌어내고야 말았다.이제 우리가 본때를 보여줄 때가 왔다!
기지아가 이 경기에서 1골 1 도움을 기록하였고, 스키아피노가 쉽게 따라하기 힘든 기술적인 슈팅으로 동점골을 뽑아내었지만 그들의 투지를 일깨워준 바렐라의 멘탈이 아니었다면 이 기적과도 같은 우승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2.3. 월드컵 우승. 그 이후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나서 돌아온 바렐라는 페냐롤에서도 역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그 이후에 보낸 5번의 시즌 중 3번을 더 우승했으며, 그 곳에서도 역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보였다.
1954년 월드컵에도 역시 주장으로 출전한 바렐라. 우루과이는 잉글랜드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였지만 바렐라는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입었고 준결승전에 뛸 수 없었다. 준결승전의 상대는 당시 자타가 공인하던 최강팀 매직 마자르, 헝가리였다. 우루과이는 바렐라가 빠진 상황에서도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자존심을 세우려 노력했지만 결국 연장전에서 산도르 코치슈에게 두 골을 내주고 패배하고 말았다. 이 잉글랜드전이 바렐라의 마지막 A매치가 되고 말았다.[3]
바렐라는 이듬해 페냐롤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였고 1년 후에 아예 축구계에서 은퇴하였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바렐라는 전반을 끝내고 자신이 경기를 뛸 수 없다는 것을 느꼈고 후반을 뛰는 것을 포기하였다. 결국, 이것이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 은퇴 이후에는 거의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96년 8월 2일에 숨을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체력도 좋고 뛰어난 패싱 능력과 가끔 터지는 위력적인 중거리 슈팅을 갖춘 수비형 미드필더.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재능으로 평가 받는 대목은 멘탈이다. 그의 멘탈은 우루과이의 월드컵 우승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그로 인해 초대 월드컵 당시 주장이자 대표팀 선배인 호세 나사치와 더불어 우루과이 대표팀 역대 최고의 주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4. 수상
4.1. 클럽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6회: 1944, 1945, 1949, 1951, 1953, 1954(이상 페냐롤)
4.2. 국가대표
FIFA 월드컵 우승 1회: 1950
코파 아메리카 우승 1회: 1942
4.3. 개인
FIFA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50
1937년 코파 아메리카 공동득점왕(5골)
[1] 디스트로이어와 함께 자주 쓰이던 별명인 El negro Jefe(영어로 The black Chief)도 그의 까만 피부색에서 나온 별명이다[2] 우루과이는 스페인 문화권이고 스페인 사람들의 풀 네임은 성이 두 개다. 즉, 아버지의 첫 번째 성을 앞에, 어머니의 첫 번째 성을 뒤에 쓰는 형식. 예를 들어 페르난도 토레스의 풀 네임은 페르난도 호세 토레스 산스(Fernando José Torres Sanz). 여기에서 토레스는 아버지의 첫 번째 성, 산스는 어머니의 첫 번째 성이 된다. 일반적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풀 네임을 써야 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아버지의 성만을 쓴다. 그래서 페르난도 토레스라고 하지 페르난도 산스라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렐라는 이 관례를 뒤집었다[3] 바렐라가 출전했을 때 우루과이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