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시데스 기지아

 


'''알시데스 기지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AS 로마 주장'''
아르카디오 벤투리
(1953~1957)

<color=#373a3c> '''알시데스 기지아
(1957~1958)
'''


에기디오 구아르나치
(1958~1959)


'''알시데스 기지아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팀 수상'''




'''개인 수상'''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950'''[9]



'''베스트팀'''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50'''




''' 우루과이의 축구감독 '''
[image]
'''이름'''
'''알시데스 기지아'''
'''Alcides Ghiggia'''
'''본명'''
알시데스 에드가르도 기지아
Alcides Edgardo Ghiggia
'''출생'''
1926년 12월 22일 / 몬테비데오
'''사망'''
2015년 7월 16일 (향년 88세) / 라스 피에드라스
'''국적'''
[image] 우루과이[image] 이탈리아
'''신체'''
169cm / 체중 62kg
'''직업'''
축구선수(라이트윙 / 은퇴)
축구감독
'''등번호'''
7 - AS 로마
'''소속'''
'''선수'''
CA 페냐롤 (1948~1953)
AS 로마 (1953~1961)
AC 밀란 (1961~1962)
다누비오 FC (1962~1968)
'''감독'''
CA 페냐롤 (1980)
'''국가대표'''
12경기 4골(우루과이 / 1950~1952)
5경기 1골(이탈리아 / 1957~1959)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초창기
2.3. 이탈리아
3. 은퇴 후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5. 여담
6. 수상
6.1. 클럽
6.2. 국가대표
6.3. 개인
6.4.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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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역사적으로 세 명만이 마라카낭을 침묵시킬 수 있었습니다. 교황, 프랭크 시나트라, 그리고 저입니다.'''

(When you look down through history, only three men have ever silenced the Maracanã: the Pope, Frank Sinatra…and me.)

알시데스 기지아, 마라카낭의 비극을 회상하며

우루과이의 전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 위 어록대로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마라카낭의 비극 당시 결승골을 넣은 선수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당시 브라질에 강림한 재앙의 사신 이라 할수있다.

2. 선수 경력



2.1. 초창기


기지아는 1926년 몬테비데오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기지아는 축구와 농구를 모두 좋아했는데 안타깝게도 키 때문에(...) 농구는 취미로 즐길 수밖에 없었다.
1944년에 우루과이의 하부 리그 팀인 수드 아메리카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2년 후에는 1부 리그 팀인 프로그레소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년 후 프로그레소는 강등을 당하고 말았고, 1년 후인 1948년 우루과이의 최고 명문 팀인 CA 페냐롤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페냐롤에는 말 그대로 이름값 하는 수많은 스타들이 즐비했고 첫 시즌에는 그들에 밀려 벤치만 달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냐롤에서의 첫 시즌은 선수들의 파업으로 인해 리그가 파행되었고, 그 다음 해에서야 리그가 정상화되었다. 이 때 기회를 잡은 기지아는 8골을 넣으며 페냐롤의 리그 우승에 일조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소집되었다.

2.2. 1950년 월드컵


23살의 젊은 선수였던 기지아는 월드컵 대표팀에도 선발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7번을 달고 주전 라이트 윙이 되어 필드를 누볐다.
첫 경기이자 단판 승부였던 조별리그에서 우루과이볼리비아를 상대로 8: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를 내며 안드로메다보내 버렸다. 기지아는 이 경기에서 1골을 기록하였고 개최국 브라질, 유럽의 스페인, 스웨덴과 결승 리그를 치르게 되었다.
기지아는 매 경기마다 골을 기록하였지만 우루과이스페인스웨덴을 상대로 간신히 이기거나 비기는 등 졸전을 펼쳤다. 반면 브라질은 이 두 나라를 6:1, 7:1로 떡실신시켜 버린지라 우승의 가능성은 누구나 브라질의 우승을 예상했다. 심지어 브라질은 아직 경기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이미 우승했다며 신문 기사에 '''★경★ 1950년 월드컵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우승 ★축★''' 이라고 써 놓은 데다가 우승 메달, 우승 표창장, 우승 기념 노래까지 만드는 등 온갖 설레발을 쳐 놓았다.
우루과이를 식민지로 만들어 탄압했던 전적이 있는 브라질이 저렇게 설레발까지 쳤으니 우루과이 선수들이 머리 끝까지 빡친 건 당연지사. 결국 기지아는 그 신문을 한 부 구해 놓고 동료 선수들을 모아 그 신문 기사를 향해 단체로 소변을 본 뒤 결의를 다졌다. '''저 빌어먹을 브라질 새끼들을 밟아서 으깨버리자고!'''[1]

브라질과의 마지막 승부.
브라질은 역시 초반부터 우루과이의 골문을 사정없이 두들겼고, 후반 2분 프리아사가 선제골까지 터뜨리자 브라질 국민들의 환호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는 굴하지 않았다. 선제골을 얻어맞자 분노한 기지아는 그때부터 불같이 맹렬하게 만회골을 노렸고 기적의 시작은 기지아의 발끝에서 나왔다.
기지아는 후반 21분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고, 34분에는 본인이 측면으로 돌파하면서 기습적인 타이밍에 니어포스트를 노려 직접 슛을 날렸다. 그의 발을 떠난 공은 브라질의 골문을 지키던 바르보사 골키퍼의 손을 지나 역전골이 되었다. 순간 열광하던 브라질 팬들은 일제히 침묵했고, 우루과이 팬들은 기지아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그렇게 10분이 흘렀고, 경기가 종료되었다. 우루과이의 팬들조차 반신반의했던 기적의 드라마가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기지아는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우승 팀 선수 중 전 경기 득점을 기록한 주인공이 되었고[2][3] 이것이 축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경기 중 하나인 마라카나조이다.[4]
이 덕분에 우루과이는 광란의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반면 당연히 우승을 거두리라고 굳게 믿었던 브라질은 거의 다 잡았던 우승을 홈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놓쳐버려서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였고 거대한 홍역을 치러야 했다. [5]

2.3.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의 영웅은 소속팀으로 돌아왔고 1951년에도 우루과이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거칠 것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선수 생활에 큰 위기가 닥쳤는데 1952년 리그 경기에서 8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은 것이었다. 사유는 심판 폭행(...). 기지아는 경기 중 심판이 자신의 골을 무효처리하자 이에 격분하여 심판을 폭행하였고 그 징계로 인해 우루과이 리그에서 더 이상 뛸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로 인해 유럽 팀을 알아보게 되었고, 징계가 끝난 1953년 시즌부터 세리에 AAS 로마에서 뛰게 되었다.
월드컵에서 큰 활약을 했던 선수였기에 AS 로마의 팬들은 기지아를 크게 환영하였고, 그에 걸맞게 8시즌 동안 200경기 넘게 출전하면서 남미 축구의 높은 수준을 다시 한 번 이탈리아 팬들에게 선보였다.
로마는 비록 기지아가 활약하는 동안에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기지아는 1957년 이탈리아의 국적을 얻기도 하였고, 우루과이 시절 동료였던 후안 스키아피노와 함께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뛰기도 하였다. 그는 1958년 월드컵 지역예선에 이탈리아 국적으로 참가하였지만 이탈리아는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1959년부터 기지아는 노쇠의 기미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결국 1961년에 AC 밀란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새로운 팀에서 35세의 나이에 결국 스쿠데토를 차지하였지만 4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활약을 펼쳤고, 그 해를 끝으로 이탈리아에서 나와 다시 우루과이로 돌아가 군소 클럽 다누비오 FC에서 5년을 더 뛰다 은퇴하였다.

3. 은퇴 후


1980년 잠시 친정 팀 페냐롤의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2012년 6월 15일, 기지아는 타고 가던 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혼수 상태로 2주 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트럭 운전사는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2013년 12월 7일,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조 추첨 식에 참가하였다. 87세의 노인이라 그런지 볼을 떨어뜨리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정정한 모습을 보였다.[6] 한편 그 월드컵에서 마라카낭을 뛰어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마는데...
[image]
기지아의 조추첨
2015년 7월 16일, 라스 피에드라스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 그리고 이 날은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이 마라카낭에서 브라질을 꺾은 지 정확히 6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임팩트에 비해 국가대표 경력이 다소 적은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우루과이 역대 최고의 윙어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빠른 스피드, 정확한 크로스, 정교한 드리블 등 윙어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선수였다.

5. 여담


  • 브라질의 전기 작가 Roberto Muylaert는 기지아의 골을 존 F. 케네디암살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 1996년 우루과이의 밴드 Casa de Jardineria[7]는 로스 델 리오의 히트곡 마카레나를 우루과이식으로 녹음하면서 노래의 가사를 바꿨는데 노래의 제목 마카레나를 Maracanã Macarena로 바꾸었다.[8] 게다가 기지아에게 노래 끝부분의 스캣을 맡겨 우루과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 기지아는 마라카낭의 비극 이후 50년 정도 지나서 브라질로 여행을 갔다가 정말 기가 막힌 일을 겪었다. 어떻게 봐도 20대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여성 세관원이 기지아를 알아본 것. 기지아가 놀라서 '그건 50년 전의 일이다'라고 하자 세관원은 '브라질의 우리들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오늘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낀다'고 했다고... 이쯤 되면 정말 무서울 지경이다.
  • 2009년 브라질의 초청으로 마라카나소의 일등 공신 기지아는 마라카낭에 거의 60년 만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서 기지아는 펠레, 에우제비우, 프란츠 베켄바워 등과 함께 행사에도 참석했고, 풋프린트가 새겨지는 영예도 안았다. 기지아는 이후 브라질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6. 수상



6.1. 클럽



6.2. 국가대표



6.3. 개인



6.4. 감독


에콰도르 세리에 A 우승 1회: 1987(이상 바르셀로나 SC)

[1] 사실 이 제안은 옵둘리오 바렐라가 먼저 했다. 그리고 기지아를 포함한 선수단 전원이 이에 동의.[2] 현재까지 이 기록은 기지아와 자이르지뉴만이 가지고 있다.[3] 월드컵 전 경기 득점 기록은 이들 외에도 쥐스트 퐁텐이 가지고 있다.[4] 우루과이 사람들에게는 기적, 브라질 사람들에게는 비극.[5] 그보다 더 비참한 건 마라카낭의 비극 때의 기지아 한 명보다 에게 무려 7골이나 먹었다는 점에서 브라질로서는 정말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6] 여담으로, 마라카낭의 비극 당시 경기에 참가한 22명의 선수 중 공교롭게도 기지아가 마지막 생존자였다.[7] 한국어로 번역하면 집과 정원[8] 참고로 뒤의 Macarena는 영어식으로 읽는 마카레나지만, Maracanã는 Estádio do Maracanã같은 지명 처럼 마라카낭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