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나사치

 

'''호세 나사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color=#373a3c>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알프레도 시베키
(1922~1923)

'''호세 나사치[3]'''
'''(1923~1935)'''

알바로 헤스티도
(1935~1940)




'''호세 나사치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FIFA 월드컵 골든볼 1930'''



'''베스트팀'''




'''1923 코파 아메리카 MVP'''
'''호세 나사치'''
'''1935 코파 아메리카 MVP'''
'''호세 나사치'''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30'''

''' 우루과이의 前 축구인 '''
''' 이름 '''
'''호세 나사치'''
'''José Nasazzi'''
''' 본명 '''
호세 나사치 야르사
José Nasazzi Yarza
''' 출생 '''
1901년 5월 24일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주 몬테비데오시
''' 사망 '''
1968년 6월 17일 (향년 67세)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주 몬테비데오시
''' 국적 '''
우루과이
''' 신체 '''
182cm | 체중 85kg
''' 직업 '''
축구선수(수비수[1]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CA 리토(1918~1920)
CA 베야 비스타(1922~1932)
CA 나시오날(1932~1937)
''' 감독 '''
우루과이 대표팀(1942~1945)
''' 국가대표 '''
41경기(우루과이 / 1923~193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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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번호 '''
-[4]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선수 시절 & 영광의 시작
2.3. 월드컵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나사치의 바통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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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선수시절 우루과이 최강의 수비수이자, 초대 줄리메 컵을 들어올린 주장으로 역사에 남았으며 다니엘 파사레야, 엘리아스 피게로아와 더불어 남미의 위대한 센터백 중 한 명이었다. '''엔 그란 마리스칼'''(En Gran Mariscal. 위대한 사령관)이라는 별명이 있다.

2. 생애



2.1. 초기 선수 시절 & 영광의 시작


나사치의 조상들은 대대로 밀라노 근교의 에시노 라리오에서 살았으며 어머니는 바스크 출신으로, 나사치는 이탈리아계이다.
나사치는 18세이던 1918년. 군소클럽 리토에서 처음 프로생활을 시작하였고, 1922년 몬테비데오에서도 자신의 고향을 연고지로 하는 베야 비스타[2]로 팀을 옮긴다. 나사치는 여기에서부터 싹수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1923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국가대표팀에 주장 완장을 차고 데뷔함으로서, 그리고 베스트 플레이어에 선정됨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남미 전체에 알리게 된다.
그가 속해있던 우루과이 대표팀은 그의 데뷔 이전에도 남미에서는 거의 깡패팀 수준이었는데 코파 아메리카에서 4번째 우승을 차지함을 시작으로 남미 최강팀을 넘어 세계구급 초강팀이란걸 증명이라도 하듯 우승을 쭉쭉 쓸어모으기 시작했다.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서는 1926년까지 3번 우승했으며, 월드컵이 생기기 전의 축구계 최고 대회였던 올림픽에서도 1924년1928년 대회를 연속으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2.2. 초대 월드컵


국가대표팀이 이런 대단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우루과이 정부는 초대 월드컵 유치를 위해 FIFA를 설득했다. 마침 1930년이 우루과이의 독립 100주년도 되는 의미가 있는 해였기 때문에 FIFA의 승인을 받아 초대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었다.
나사치는 어느덧 29세의 원숙한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고 수비의 핵심이자 팀의 주장이 됨으로서 당시 우루과이에 없어서는 안되는 그런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우루과이는 3조페루, 루마니아와 한 조가 되었고 나사치는 예선 2경기를 무실점으로 막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 포스는 결승전까지 쭉 이어져서 우루과이는 월드컵의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결승전의 상대는 우루과이의 전통적인 라이벌 아르헨티나였고, 1928년 올림픽의 결승에서 패배했던 아픔을 갚기 위해 아르헨티나는 이를 갈고 나왔지만 여기에서 우루과이가 승리했다. 그리고 나사치는 월드컵 베스트 11과 골든볼을 싹쓸이했다. 이로써 그는 당시 세계 최고의 수비수임을 증명함과 동시에 줄 리메 트로피를 처음으로 들어 올린 주장이 되어 축구의 역사에 남게 되었다.

2.3. 월드컵 이후


1932년 정들었던 베야 비스타를 떠나 우승을 위해 우루과이의 명문팀 중 하나인 나시오날로 팀을 옮겼다. 여기에서 그는 옮기자마자 브라질의 도밍구스 다 기아와 함께 든든한 벽을 쌓았고 처음으로 우루과이 리그의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는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았던 유럽 팀들에게 앙심을 품고 우루과이가 참가하지 않았지만, 나사치의 실력은 어디 안 갔다. 193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하고, 베스트 플레이어에 다시 한 번 선정되었다.
그의 활약은 1937년까지 이어졌다. 1937년. 36살의 나이로 그는 모든 유니폼을 벗었고, 페드로 세아의 뒤를 이어 1942년에서 1945년까지 잠시 우루과이 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었다. 3년간 16경기에서 10승 3무 3패. 승률이 62.5%로 꽤 좋았지만 아르헨티나에 밀려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축구와 큰 관련을 맺지 않고 몬테비데오의 카지노에서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 후 1968년 6월 17일. 나사치는 몬테비데오에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영상이 얼마 남아있지는 않아서 정확한 추론을 하기는 힘들지만 182cm / 85kg의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체구를 바탕으로 힘이 넘치는 수비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술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지만 빠르고 위치 선정까지 좋았다 한다. 그래서 우루과이에두아르도 갈레아노X선조차 그의 수비는 뚫지 못할 것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진정한 장점은 리더십인데 초대 월드컵과 2번의 올림픽, 4번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차지할 당시 대부분 대회에서 주장으로 활약했다. 우루과이의 역대 베스트 11을 뽑으면 중앙 수비수로서는 당연히 선발되며, 주장의 자리도 당연히 그의 몫이다. 우루과이 축구 전성기 때의 주장이니 당연한 일이고 수비수로서 이뤄낸 대회의 성과를 따지면 대회 우승은 물론 월드컵 mvp와 2회의 대륙 대회 mvp를 수상한 엄청난 커리어의 소유자이다. 역대 모든 수비수들을 놓고 비교해봐도 발롱도르 2회에 빛나는 프란츠 베켄바워 정도만이 비견 가능하다. 단지 3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선수라 영상 자료가 거의 없어 평가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의 리더쉽은 역대 최고의 주장을 꼽을 때도 빠지지 않으며, 프란츠 베켄바워, 보비 무어, 프랑코 바레시 등과 동급으로 칭해진다.

4. 나사치의 바통


1872년 세계 최초로 A매치를 벌였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를 시작으로, 1873년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이겼던 것에서부터 타이틀을 가진다고 가정하여 권투와 같이 타이틀을 방어한다는 개념으로 따지는 비공식 축구 월드 챔피언쉽이란 것이 있다. 그리고 나사치의 바통이라 하여 1930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우루과이 대표팀을 시작으로 거의 비슷한 방식을 쓰는 이야깃거리가 있다. 한가지 다른 것은 나사치의 바통이 비공식 축구 월드 챔피언쉽과 다른 점은 나사치의 바통은 90분간의 정규 시간만으로 따진다는 것이다.
2018년 11월 현재 나사치의 바통을 가진 팀은 11월 18일의 A매치에서 탄자니아 민주 공화국를 1:0으로 꺾은 레소토이다.
나사치의 바통이나 비공식 축구 월드 챔피언쉽이나 모두 공식 이벤트가 아니며, FIFA에서는 어떠한 홍보도 하지 않는다. 또한 나사치의 이름만 딴것일 뿐, 나사치가 만들거나 나사치와 특별한 관련이 있는것도 아니다.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라이트백, 센터백[2] 베야 비스타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1990년에서야 단 한 차례 우승했던 경력이 있는 약체팀이다. 하지만 나사치가 이 팀 출신이라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삼고 있으며, 그들의 홈구장 이름을 에스타디오 호세 나사치라 이름붙인 것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