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양 · 성고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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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荥成之战, 成皋之战, 滎陽之战, 汜水之战 '''비록 지금 군량이 부족하더라도, 과거 초(楚)와 한(漢)이 형양(滎陽)[2]
과 성고(成皐)[3] 사이에서 싸웠을 때만큼은 아닙니다.그 무렵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는 결코 먼저 물러서려 하지 않았으니, 먼저 물러서는 것은 곧 세력상 상대에게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초한전쟁 당시 초나라(楚)와 한나라(漢)의 격돌,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정면 대결이다. 형양전투(滎陽戰鬪)와 성고전투(成皋戰鬪) 등 세세하게는 나뉘지만 기본적으로는 거의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팽성 전투(彭城戰鬪) 이후 광무 대치 직전까지의 항우 - 유방의 초한전을 '''형양 · 성고 전역''' 으로 설명한다. 형양 전투, 성고 전투, 사수 전투라는 검색으로도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
초한전쟁이 고대 중국 세계를 결정지은 대전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 초한전쟁의 향방을 좌우한 전역'''이 성고와 형양의 사투다. 팽성대전 이후 파도처럼 밀려오는 항우의 공세를 유방은 성고와 형양을 기점으로 수성(守城), 도주, 외교, 반간계(反間計)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막아내었는데, 이 과정에서 '''죽어나간 장수들이 수두룩 하고,[5] 상대편인 항우는 그럴 듯한 패배조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항우는 형양, 성고를 넘어 유방의 본거지인 관중(关中)을 향해 진격하는 데 실패했고, 유방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는 지리한 우세만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 무렵, 한신(韓信)은 북방을 휩쓸며 초한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유방이 탱커 노릇을 하는 사이 한신이 데미지 딜러로 활약한것. 망치와 모루 개념을 적용하자면, 유방이 모루가 돼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한신이 망치가 돼 전선 좌측면을 휩쓸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결국 최악의 시기를 버텨낸 유방은 기원전 203년, 광무 대치를 기점으로 완전하게 세력 균형을 뒤집는 데 성공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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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양과 성고의 위치'''
2. 배경
2.1. 최강이 된 항우와 짓눌린 유방
진승·오광의 난(陳勝吳廣─亂) 이후로 중국 전역은 온갖 군웅들의 할거장이 되었고, 개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항량(項梁)은 조카 항우, 그리고 패공(沛公) 유방 등을 수하로 거느리며 과거 멸망한 초나라를 부활시켰으나, 결국 진나라의 장군 장한(章邯)에게 참살되고 만다.
[image]이후 초회왕(楚懷王)은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 사람이 관중의 왕이 될 것이다."''' 라고 공언했는데,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지만 항우는 송의(宋義)의 부하가 되어 조나라(趙)를 구원하러 가게 됨으로써 불리한 지경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항우는 송의를 참살한 후, 군권을 탈취하여 그대로 진나라군과 교전, 거록전투(鉅鹿戰鬪)에서 진나라군을 아주 박살을 내며 장한을 항복시키고, 제후들을 복속시키며 최강의 세력이 되어 서진을 시작했다.
그 무렵에 유방은 필사적으로 서진하며 역이기(酈食其), 역상(酈商) 등을 만나고 팽월(彭越)과 귀중한 안면을 트기도 하였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관중에 먼저 입성하여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내세워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하여 꽤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 동쪽에서부터 뒤늦게 나타난 항우의 세력은 가히 어마어마했고, 잠깐 헛물을 키던 유방은 장량(張良)의 조언을 듣고 정신을 차려 항우에게 항복, 홍문연(鴻門宴)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진 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천하의 벽지 파촉(巴蜀)에 처박히는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
항우는 유방의 병력 중 단 3만 정도만 그를 따라갈 수 있게 조치했으며[6] , 삼진을 설치하여 유방을 철저하게 견제했다. 이후 함양에서 잔혹하게 대학살을 하고 진나라의 보물을 싹쓸이한 항우는 "관중을 중심지로 삼아야만 천하를 아우를 수 있다." 는 한 조언자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삶아서 죽인 후, 위풍당당하게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여기서 나온 말이 초인목후이관(楚人沐猴而冠), 금의야행(錦衣夜行)의 고사. 이후 초의제(楚義帝)를 살해하고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된 항우는 그 위엄이 전중국을 쩡쩡 울릴 지경에 이른다.
2.2. 유방의 반격과 팽성대전
그러나 벽지에 처박히며 안습한 신세가 되는듯 했던 유방의 한나라군은 소하(蕭何)의 노력을 바탕으로 다시 재기에 성공했다. 소하는 멘붕한 나머지 아예 항우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싸워보려는 유방을 '''"까짓 죽는 것보다는 굴욕 당하는게 낫다."''' 며 설득하고[7] 한신을 끌어들여 대장군이 되게 만들었다. 그 후 항우가 제나라의 전영(田榮)을 상대하는 틈을 타 반격을 개시, 삼진을 평정하고 장한을 폐구(廢丘)[8] 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계속 서진하여 위표 등 여타 많은 제후들을 항복시키거나 평정하여 엄청난 세력을 이루었고, 비어있는 항우의 본거지 팽성(彭城)[9] 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허나 승리를 확신한 유방과 제후들이 흥청망청 놀며 즐기는 사이, 유방의 빈집털이에 격분한 항우는 성양(城陽)에서 저항하는 전횡(田橫)을 내버려두고 3만 군대를 편성, 한나라군을 급습하여 56만 대군을 완전히 분쇄해버리고 만다. 이 전투가 바로 그 팽성대전이며, 이 전투로 유방은 죽을 위기까지 겪으며 간신히 살아남았고, 한나라군도 팽성에서 밀려났다. 유방은 하읍(下邑)[10] 지역에 있었던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과 합류하여 형양[11] 으로 이동하여 조금씩 병력을 수습했고, 여기서부터 초나라와 한나라의 진정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3. 전개
3.1. 세력을 수습하기 위한 유방의 노력
3.1.1. 구강왕 경포를 회유하다
팽성에서의 대패 이후 유방은 병력, 세력, 상황 등 여러 방면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항우의 초나라군이 물밑듯이 서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세가 뒤바뀐 것을 본 제후들은 자기들만이라도 살기 위하여 서둘러 편을 갈아타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전투로 복속시킨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적왕(翟王) 동예(董翳)는 서둘러 항우에게 돌아갔다. 그래도 옛 새나라와 적나라의 국토는 이미 완전히 한나라에 편입되었기에 땅을 잃지는 않았으나, 옛 서위왕 위표(魏豹)는 '''어머니 병문안을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쳐 한나라에 병합된 옛 서위왕령을 가지고 자립해버렸다. 또한 본래 장이(張耳)의 죽음을 동맹의 조건으로 내세웠던 진여(陳餘)는 장이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유방을 배신하고, 그런 진여를 따라 조나라의 조헐(趙歇) 역시 유방에게 등을 돌리며 유방은 단번에 천하에 자신의 적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제후국 중 한나라 편으로 남은 것은 유방 자신이 항우가 한왕(韓王)으로 세운 정창을 몰아내고 세운 한왕 한신과, 봉국을 잃고 쫓겨온 상산왕 장이뿐이었다. 다만 이때 제나라는 한나라 편은 딱히 아니지만 서초와 맞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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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불리한 상황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구강왕(九江王) 영포(黥布)로, 영포는 항우가 거록대전 등에서 진나라군을 물리쳤을 때 가히 으뜸가는 공훈을 세웠지만 구강왕이 되고 나서는 항우의 제나라 원정 등에 핑계 등을 대며 종군하지 않았다. 일단 항우는 영포만한 인물도 드물고 주위에 적수들이 있는 상황에서 또 적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영포에게 손을 대진 않았지만, 양 측은 미묘하게 알력이 생긴 참이었다.
매의 눈으로 이를 지켜본 장량(張良)은 유방에게 영포를 회유할 필요가 있음을 충고했다.[12] 이에 막 하읍에서 세력을 회복하고 서쪽으로 물러나던 유방은 갑자기 성질을 내면서 "이 쓸모없는 놈들, 네놈들 중에 함께 천하 대사를 논할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 라고 소리쳤고, 이에 수하(隨下)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묻자, 유방은 "영포로 하여금 항우를 배반케 해 단 몇개월만 초나라를 묶어준다면 내가 천하를 취할 수 있다. 너희 중 누가 가능하겠느냐?"라고 하여 수하가 그 역할을 자청하고 나서면서 영포를 만나게 된다. 그만큼 당시 유방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당초 영포는 수하를 제대로 만나주지도 않았지만, 수하는 어떻게든 영포를 만난 후, 원칙없는 정치와 인색한 포상으로 천하에 적이 깔린 항우의 처지, 그리고 항우의 신하로서의 도리는 저버린지 오래인 영포의 진짜 욕심을 정확하게 찔러 회유했고, 영포는 마음이 동하는 부분이 있어 돕겠다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마침 초나라의 사자가 경포를 찾아왔다.''' 초나라의 사자는 꿈지럭거리는 영포를 재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수하는 '''곧바로 난입하여 "구강왕은 이미 한나라와 함께 한지 오래거늘, 누구에게 군사를 준단 말이냐!"''' 라고 소리치며 판을 깨버렸고, 영포도 당황해서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경악한 사자가 뛰쳐나가자 그제서야 자신이 말려버렸음을 깨달은 영포는 어쩔 수 없이 초나라의 사자를 붙잡아 살해하고 항우를 배신하게 된다.[13]
이에 항우는 한동안 스스로 하읍에 머물면서, 용저(龍且)와 항성(項聲)을 시켜 영포를 치게 했다. 이후 영포는 결국 용저에게 무너지게 되지만, 그때까지 몇 개월 가량을 벌 수는 있었다. 이렇게 해서 유방은 팽성대전 패배 이후 정말 중요한 몇달을 벌 수 있었고, 패전한 영포는 수하와 함께 한나라로 도망쳐왔다.
3.1.2. 장한의 사망과 경색전투의 승리
이렇게 외교전을 통해 항우의 발을 묶는 사이에, 군사적으로도 초군의 발을 묶을 필요가 있었다. 팽성대전 승리 이후 초나라군은 끝도 없이 서진을 계속하기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저지를 할 필요가 있었던것. 당시 유방은 하읍을 시작으로 양(梁)[14] , 우현(虞縣)[15] 을 거치며 계속해서 서쪽으로만 물러나고 있었다. 이렇게 밀리기만 할 수는 없었기에, 유방은 형양[16] 을 기점으로 수비라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방이 형양에 버티고 서 있자 한신 등 팽성에서의 대패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여타 장수들은 휘하 패잔병을 이끌고 속속 몰려들었고, 여기에 더해 관중에 있던 소하가 23세 이하 · 56세 이상의 병역 비해당자 마저 싹싹 긁어 형양으로 보내는 통에 어떻게든 구색은 갖출 수 있었다. 유방은 이렇게 병력을 수습하는 한편 영포가 벌어주는 시간을 통해 잠시 후방으로 이동해 훗날의 혜제인 아들 유영(劉盈)을 태자로 삼고 역양(櫟陽, 약양)[17] 을 지키게 하며,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했다.[18]
당시 유방에게는 전면에서 오는 항우의 존재가 압도적인 만큼, 후방의 위협은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유방이 평정한 삼진의 땅에서는 오직 장한만이 폐구성(廢丘城)에서 포위된 지 아홉 달이 되도록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유방은 폐구성으로 물을 흘려보내 성이 물에 잠기게 했고, 가망이 없어진 것을 깨달은 장한은 구차하게 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목숨을 끊어 자살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후방의 위협인 장한을 제거한 유방은 관중의 병력을 동원해 변경을 지키게 조치했다. 이후에도 유방은 한동안 전방인 형양과 후방인 역양(약양)을 오고가며 민심을 수습하고 병력을 다독이는 데 힘을 썼다.
이런 식으로 어느 정도 전력을 수습한 유방은 관영(灌嬰)을 기병대장으로 삼아 한군의 기병대를 창설하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진격해 오는 초나라군을 형양 주변의 경읍(京邑)[19] 과 색읍(索邑)[20] 에서 물리친다. 이 경색전투(京索戰鬪)에서의 승리로 유방은 이제서야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3.1.3. 한신을 별동대로 파견하다
이렇게 일단 팽성의 대패를 수습한 유방은 역공에 나섰다. 물론 항우를 상대로 공격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한나라군의 세력으로는 초나라군을 막기만도 벅찼으므로 역공은 꿈만 같은 소리였고, 대신 항우의 편에 붙은 제후들을 타격하여 세력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적대적인 제후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손을 봐야 할 대상은 바로 배신자 위표 였는데, 어머니 병을 핑계로 도주한 위표의 세력지인 서위(西魏)는 형양의 한군으로 따지면 후방에 위치하는 데다, 한군의 주세력지인 관중과 전방의 전선인 형양의 사이를 타격할 수 있었기에 조속하게 손을 볼 필요가 있었다. 만일 그대로 둘 경우 위표가 항우와 연계하여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한군을 괴롭힐 우려가 있었기 때문. 당시에는 한군의 세력도 손 하나가 아쉬운 판이었으므로 유방은 우선 역이기(酈食其)을 보내 외교로 해결을 보려고 하였다. 헌데 위표는 '''"유방 그 인간은 욕을 너무 많이 하니 같은 편을 못하겠다!"''' 라는 이유를 대며 이를 거부했고,[21] 결국 무력 행사 밖에 답이 없어지자 유방은 한신, 조참, 관영 등 휘하 주요 장수들을 파견하여 위표를 공격하였다.[22]
이렇게 하여 벌어진 안읍 전투(安邑戰鬪)에서 한신은 위표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이후 유방에게 따로 3만의 병력을 요구하며 자신이 별동대로 출진, 여타 제후들을 평정할 수 있게 해주기를 요청하였다. 유방의 상황으로 보자면 이렇게 병력을 분할하는 것은 꽤 위험 요소가 따르는 일이었지만, 유방은 3만의 군대와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파견하여 한신을 돕게 하였다. [23]
이후 한신이 군대를 이끌고 북상을 하게 됨으로써, 이제 초한전쟁의 전역은 유방과 항우의 대결, 그리고 한신의 북벌이라는 양대전선의 큰 그림으로 바뀌게 된다.
3.2. 역습의 항우
3.2.1. 유방의 보급을 공격하는 항우
그러나 이렇게 유방이 조금씩 세력을 회복하고 다시 강대해져 가는 것을 항우가 손가락만 빨며 지켜볼 리가 없었다. 용저 등이 영포를 무찌르고 난 후 항우는 항백(項伯)을 시켜 영포의 나라였던 구강의 남은 병력을 거두고,[24] '''남아 있던 영포의 처자식을 모조리 학살했다.''' 영포 문제가 해결된 항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전초전 격으로 항우의 병력들은 한나라군의 보급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군은 형양 북서쪽으로 황하와 통하는 용도(甬道)[25] 를 만들고, 이를 통해서 오창(敖倉)[26] 의 양식을 보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나라군은 계속해서 이곳들을 기습 타격하여 한나라군의 보급을 지리멸렬하게 만들었고, 그 탓에 한나라군은 지속적으로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전쟁에서 식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에 한나라군이 당했을 괴로움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나마 이때까지는 보급로가 공격을 받는 정도라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한나라군에게는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3.2.2. 형양을 포위하는 항우와 유방의 강화 제의
기원전 204년의 여름 무렵, 항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형양을 포위하기 시작하자 한나라군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대략 그 즈음에 유방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역이기의 제안에 따라 육국의 후예들을 부활시킬 생각이 있었으나 장량의 반대로 이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세력에서 앞서는 항우가 형양을 포위하여 매섭게 공격을 하고 있으니, 형양에 있던 유방으로서는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형양의 한군으로서는 항우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결국 유방은 항우에게 급하게 화의를 청했다. 강화의 조건은 형양을 기점으로 서쪽은 한나라에, 동쪽은 초나라에 속하게 하자는 것.
당시 초나라의 우세를 생각하면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은 조건이었지만, 항우로서도 전횡이 있는 북방의 제나라나 반기를 들은 경포, 또 유방이 삼진을 깨고 나올 무렵부터 성가시게 굴던 팽월 등 귀찮은 적들이 사방에 있었기에 휴전이라고 생각한다면 동의할 수는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나 항우 본기의 언급을 보자면 항우는 당초에 이를 승낙할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범증은 이를 극렬하게 반대했는데, 홍문연 무렵부터 유방을 강하게 견제한 범증은 지금 유방을 잡을 수 있을때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항우에게 충고했고, 이 때문에 항우는 계속해서 형양을 공격, 한나라군을 모조리 섬멸이라도 시킬 태세를 보였다. 유방으로서는 거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진 것.
3.2.3. 진평의 술수
불리한 형세를 크게 우려스러워 한 유방은 진평(陳平)에게 대책을 물었다. 진평은 '''"항우는 인색하고 의심도 많다. 항우의 신하 중에서 진짜 충성스러운 사람은 범증, 용저, 종리말(鍾離昧), 주은(周殷) 등 몇 사람밖에 없다. 잘만 하면 내부에서 서로 죽이게 할 수 있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고, 이에 유방은 진평에게 황금 4만 근을 내려 주고 이것으로 사람들을 구워먹든 삶아먹든 일체의 사용을 전부 진평 한 사람에게 맡겼다. 진평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초나라군에 첩자를 파견해서 유언비어를 퍼뜨렸는데, 종리말 등은 공이 적지도 않은데 쫌생이 같은 항우가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등에서 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이 막대하여 유방과 내통, 최종적으로 왕이 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속 좁은 항우는 그런 뜬소문을 듣게 되자 과연 종리말 등을 불신하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진평은 일부러 초나라의 사신에게 범증이 한나라와 연관되었다는 식의 뉘앙스를 보이며 범증에 대한 항우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렸다. 이 때문에 항우는 형양을 더욱 거세게 공격하자는 범증의 주장을 무시하더니, 조금씩 조금씩 범증의 권력을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범증은 화가 나서 '''"천하의 일이 대체로 정해졌으니, 이젠 군왕 스스로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저의 늙은 몸을 돌려주시어 평민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하고는 돌아가버렸지만, 팽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독창(毒瘡)이 나서 죽고 말았다.
3.2.4. 형양 함락과 기신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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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진평의 계략으로 항우의 브레인 역할을 할 사람 하나를 보내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형양 주변에 있는 초나라군의 포위가 풀릴 리는 없었다.[27] 초나라군의 공격은 대단히 거세었고 한나라군은 식량마저 떨어지고 있던 판이었기에, 이대로 가다간 끝장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때, 한나라군의 장수 중 한 사람인 기신(紀信)은 "사태가 이미 위급해졌으니 청컨대 제가 대신 왕의 모습으로 꾸미어 초군을 속이고자 합니다. 그 틈을 타서 왕께서는 빠져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라며 사실상 죽음을 자처 했다. 이렇게 희생을 자처한 기신에 더해 진평은 또 하나의 모진 계략을 꾸민다. '''바로 형양의 여자들을 총알받이로 이용하는 것.''' 진평은 형양의 동쪽 문으로 갑옷을 입혀 한나라 병사들처럼 꾸민 '''여자들 2천여 명을 밖으로 내보냈으며,''' 포위하는 성문에서 병사로 보이는 무리가 나오자 '''초나라 군은 사방에서 이를 공격했다.''' 이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십중팔구는……
그런 난리통 속에 기신은 유방처럼 황옥거(黃屋車)를 타고 좌독(左纛)[28] 을 붙이고 나서 '''"식량이 떨어져서 한왕은 항복한다!"''' 고 소리쳤다. 속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초나라 병사들은 만세를 불렀지만, 이미 그 사이에 유방은 진평 등의 측근 수십 명과 함께 형양의 서쪽으로 도주한 지 오래였다.
이후 낚였다는 것을 깨달은 항우는 기신에게 "유방 어디 있냐?" 라고 물었고, 기신이 '''"한왕은 이미 떠나셨소."''' 라고 대답하자 분노하여 기신을 '''태워 죽였다.'''
3.3. 기각지세
3.3.1. 완에서 우주방어를 시도하는 유방
형양성에 대한 초나라군의 포위가 지속되는 와중에 유방은 서쪽을 향해 달려 성고[29] 에 진입했다. 당초에 유방은 더 서쪽이자 자신의 본거지인 관중까지 이동, 그곳에서 다시 군사를 끌어모아 동쪽으로 재진출하여 항우와 결전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원생(袁生)이라는 인물은 이를 만류하며 유방에게 다음과 같은 대전략을 내놓았다.
원생의 이 대전략에서 살펴볼 만한 부분은 형양이나 성고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항우와 가망없는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곳에서 자리를 잡아 항우를 끌어내면 다른 전선의 압력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여러 방면으로 초나라의 힘을 분산시키자는 것이다. 이후 한나라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이 원생의 제안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는 점을 알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한나라와 초나라가 형양에서 서로 대치한것이 오래되었는데, 한나라는 항상 초나라에 비해 어려웠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무관(武關)[30]
으로 가십시오. 그리하면 항우는 남쪽으로 이동할 것이니, (항우를 끌어낸)우리는 성벽을 깊게 쌓아 수비만 하면서 싸우지 마십시다. 그렇게 된다면 형양과 성고의 병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한신이 하북의 조나라 땅을 안정시킨 후, 연나라와 제나라를 연합시키면 됩니다. 이후 다시 대왕이 형양으로 가면 초나라는 막을 곳이 많고 힘도 분산되는 반면, 한나라는 휴식을 충분히 취할 수 있으니 그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원생의 제안에 따라 유방은 멀고 먼 관중으로 가는것을 그만두고, 성고에서 남쪽에 위치하는 완읍(宛邑)[31] 과 섭읍(葉邑)[32] 으로 나아가 경포와 함께 병사를 모으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완에 도착한 이후에는 방어를 튼튼하게 하는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항우는 과연 이 말을 듣자 형양을 일단 내버려두고 완으로 유방을 잡으러 옴으로써 형양은 잠시동안 함락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성고의 경우는 애매한데, 좀 뒤에 항우가 종공(終公)이라는 인물에게 성고를 맡겨두고 동쪽으로 팽월을 잡으러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서는, 유방이 완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비어버린 성고는 항우에게 일시적으로 함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성고 주변을 항우가 장악을 했다거나.
완에 도착한 항우는 형양에서처럼 포위를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유방도 이미 포위될 것을 각오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수비만 견고하게 하며 전혀 싸우지를 않으니 항우로써도 쓸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다.
3.3.2. 팽월의 후방 교란
한편, 유방을 쫓아다니는 항우의 후방에서는 팽월이 매의 눈을 번뜩거리고 있었다. 팽성대전 직전 팽월은 3만의 병력과 함께 유방에게 귀순했고, 유방은 당시 항복했던 위표의 위나라 지역의 상국(相國) 자리를 팽월에게 맡긴 동시에, 위나라의 병력을 징발하여 양(梁)나라 땅을 공략하게 했다. 팽성대전에서 한군 본대가 괴멸을 당하자 팽월도 잠시 북쪽으로 이동해 황하 주변에서 얼쩡거리다, 이후 유격군을 이끌고 위나라 지역에서 초나라로 오는 후방 지원을 모조리 차단하였다.
이러는 와중, 유방이 완에서 항우를 묶어두고 있자 급기야 팽월은 수수(睢水)를 건너 하비(下邳)까지 진출, 항성(項聲), 설공(薛公)이 이끄는 초나라 군을 '''크게 무찌르고 만다.''' 팽월이 초나라의 중심지까지 밀고 들어오는 판이었기에, 코 앞의 완성에 유방을 몰아넣은 항우는 어쩔 수 없이 종공(終公)으로 하여금 성고를 지키게 하고 팽월을 막기 위하여 자신은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로 인하여 완성의 포위는 삽시간에 풀리게 된다.
완에서 우주방어를 하며 사태를 유심히 살피던 유방은, 항우가 동쪽으로 이동하기가 무섭게 다시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진군, 성고를 지키고 있는 종공을 무찌르고 성고에 진을 쳤다. 결과적으로, 이 시점에서 항우는 '''형양도, 성고도 함락시키지 못한 것.'''
3.3.3. 형양 함락
하지만 이와 같은 형세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항우는 빠른 시일 내에 팽월을 무찌른 후 다시 귀환 했던 것이다. 돌아온 항우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은 성고로부터 동쪽에 있는 형양이었다.
유방이 처음 기신의 희생을 통해 형양을 탈출했을 때 형양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어사대부(御史大夫) 주가(周苛), 종공(樅公), 위표, 한왕 신 등이었다. 헌데 주가와 종공은 '''"위표 같은 배신자와는 같이 성을 지킬 수 없다."''' 라는 생각으로 위표를 살해해버리고 만다. 이후 형양은 주가와 종공, 한왕 신만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유방이 주둔하고 있을 때도 방법이 없었던 형양에서 일부 병력만으로 항우를 막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형양은 함락되었고, 주가는 항우 앞에 끌려나오게 된다. 항우는 주가에게 '''"나의 장수가 되어주면 공을 상장군으로 삼고 3만 호의 후(侯)에 봉하리라."''' 라고 회유 작업을 벌였지만, 이에 대해 주가가 '''"너 빨리 한나라에 항복 안하면 한나라의 포로나 될 거다!"''' 라는 식으로 욕설을 퍼붓자, 열받은 항우는 '''주가를 삶아 죽였다.''' 또한 종공도 참살되었으며, 한왕 신은 항복하여 목숨은 건졌지만 포로가 되었다.[33]
3.3.4. 성고 포위와 유방의 재탈출
성고에 있어 방벽이 될 수 있는 형양이 무너지게 되자, 이제 성고 역시 곧바로 위협에 노출되었다. 형양을 함락한 항우는 곧바로 군사를 몰아 서진하여 유방이 달아날 틈도 없이 성고를 포위했고, 유방은 형양에서 죽을 뻔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다시 위기에 처해지고 만다.
하지만 기신의 희생과 여자들을 제물로 써먹은 진평의 계략이 아니었다면 도주조차 불가능했던 형양에서와 달리, 성고에서 유방은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유방은 하후영(夏侯嬰)의 마차에 타서 성고의 옥문(玉門)을 나서 도주하고, 북쪽으로 이동해서 황하를 건너 소수무(小修武)[34] 에서 묵을 수 있었다. 이후 유방과 하후영은 새벽에 "우리는 한나라의 사자다." 라고 말하면서 조나라의 성벽에 들어왔고, 조나라를 평정한 '''한신과 장이가 잠을 자는 사이에 군권을 탈취했다.'''[35] 이후 유방은 장이는 조나라 땅을 지키게 하고, 한신을 시켜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고는, 자신은 따로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성고는 결국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되자 마침내 항우는 '''형양과 성고, 두 방벽을 모조리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이제 항우가 서쪽으로 진군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북방에 있는 한신의 병력은 대단히 신경쓰였지만, 최소한 이 시점에서는 제나라가 건재했기에 한신은 하북을 모조리 평정한 것은 아니었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항우의 분봉과 학살 때문에 사이가 최악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로 이 시점이 항우가 초한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적기였던 것이다.
이제 항우의 서쪽으로는 유방의 본거지인 관중으로 가는 길만 뻥 뚫려 있었다. 한나라는 성고의 서쪽인 공(鞏)[36] 에서 군사를 주둔시켜 단기간 동안 초나라군을 저지하게 했지만, 형양과 성고도 함락시킨 항우가 이 정도 저항에 오래 쩔쩔 맬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일단 공만 뚫고 가면 낙양은 그냥 먹고 관중의 마지막 방어선인 함곡관까지 단번에 향할 수 있었다. 초나라군이 함곡관을 뚫고 관중에 입성하는 순간 과거 항우가 함양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재현은 뻔한 일이었다.
한나라군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에 유방은 히든카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팽월이었다.'''
3.3.5. 팽월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당초에 유방은 새로 얻은 한신의 부대를 이용해 소수무 남쪽으로 이동, 항우와 한판 싸워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유방이 항우를 회전(會戰)에서 이길 만한 전력이었는지는 확실치 않고, 만일 그 싸움에서 유방이 지기라도 한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끝장나는 일이었다.
이때 낭중(郎中) 정충(鄭忠)은 싸우러 나가는 유방을 말리면서, 그 대신 오히려 '''누벽(壘壁)을 높이 하고 참호를 깊게 해 수비를 견고히 하여 초나라군과 교전을 피하도록 했고''' 유방은 그 충고를 받아들여 항우와 맞짱 뜨는것은 그만두었다. 대신 유방은 자신의 종형인 유가(劉賈)와 절친 노관(盧綰)에게 2만명의 부대와 수백가량의 기병 부대를 주고, 백마진(白馬津)[37] 을 거쳐 교묘하게 초나라 지역으로 침투시켰다.
이렇게 초나라군의 후방으로 들어간 유가 등은 이미 그곳에 있던 팽월과 연계하여 항우의 군량미와 군수물 등을 불태웠고, 후방의 보급로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당연히 초나라군도 어떻게든 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때마다 유가는 일부러 교전은 피하고 성에 들어가 성벽을 통해 수비만 했고, 팽월과 기각지세를 이루면서 서로 구원해주니 후방의 초나라군으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유방의 지원을 받은 팽월은 '''한층 더 심하게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초나라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을 괴롭히던 팽월은 급기야 양나라 지역을 돌면서 연현(燕縣)의 성곽 서쪽에서 초나라군을 대파했으며, '''수양(睢陽)[38] , 외황(外黃)[39] 등 17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항우가 서쪽에 신경을 쓰는 사이 팽월은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3.3.6. 동진하는 항우
팽월의 이러한 움직임은 도저히 놔둘 수 없었기에, 항우는 '''서쪽으로 진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진군하게 되는 극도의 모순적인 상황에 빠지고 만다.''' 대신 항우는 자신이 없을 동안 성고를 맡을 대사마 조구(曹咎)에서 '''"딱 15일만 기다려라. 내가 팽월 박살내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유방이 싸움 걸어도 절대로 어울려 주지 말아라."''' 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다. 조구 외에도 사마흔, 동예 등도 성고에 남아 수비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후 항우는 바쁜 만큼 즉시 이동하여 진류(陳留)[40] 와 외황에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공성전이라는 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라서 항우도 꽤 고생을 하고 며칠 걸려서야 외황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바빠 죽을 지경인데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게 되자 항우는 분노하여 '''"열 다섯 이상 먹은 사내는 모두 성 동쪽에 묻어 버려라!"''' 라는 환장할 명령을 내렸다.
꼼짝없이 신안대학살이 재현될 상황에서 외황성 현령의 가신의 아들인, 13살 나이였던 한 소년은 서초패왕의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이 말을 듣고 항우는 학살을 그만두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항우가 제나라 등에서 대학살을 자행할 때는 일치단결하여 항우에게 저항하던 백성들이, 항우가 자비를 보이자 '''이내 항복을 하기 시작하여 외황 동쪽의 수양(睢陽)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쁘게 항우에게 항복하였다.''' 인덕이 무력을 이겨버린 사례."팽월이 강압적으로 외황을 위협하니 외황 사람들은 두려워 짐짓 우선 항복하고는 대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오셔서는 또 모두 생매장시키려고 하시니 백성들이 어찌 기탁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여기로부터 동쪽으로 양(梁) 지역의 10여 성이 모두 두려워서 항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항우가 이를 통해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항우가 없는 동안 성고에서는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3.7. 사수전투의 승리와 성고를 재탈환하는 유방
이 시점에서 유방은 성고의 동쪽 지역, 즉 형양을 포함한 지역 등은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하고, 대신 현재 초나라군의 서진을 막는 아슬아슬한 거점인 공 지역과 낙양을 중심으로 병력을 주둔시켜 저지선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이기는 이에 반발했는데, 그는 '''"하늘 위의 하늘(知天之天)을 아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있다. 왕자(王者)는 백성을 하늘로 생각하고(以民爲天),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생각한다(以食爲天)."'''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며 항우는 어리석게도 성고에는 고작 죄수부대를 남겨두고 오창을 굳게 지키지는 않고 동쪽으로 나아갔으니 [41] 이런 하늘이 준 기회를 버리고 오창의 양식을 포기하는것은 절대로 하면 안되는 일이며, 형양과 성고를 수복하고 오창을 다시 회복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마냥 밀리기만 하면서 전쟁이 길어지면 지금은 유방을 받쳐주는 백성들도 지쳐서 나가 떨어질테니 한번은 제대로 이겨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이에 유방은 공과 낙양을 기점으로 수비를 하는 대신 오히려 성고를 탈환하여 오창의 양식을 확보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우의 당부를 듣고 성고에 틀어박혀 있는 조구를 끌어낼 필요가 있었는데, 한나라군은 성고에 다가가 자주 군대를 과시하며 싸움을 유도했지만 조구는 항우에게 들은 소리도 있어 한동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나 그 군주부터가 욕설의 프로페셔널(...)인[42] 한나라 병사들이 마구 욕설을 내뱉으며 며칠 동안 도발을 일삼자, 결국 조구는 참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뛰쳐 나오고 만다. 조구의 병사들은 사수(汜水)를 건너 한나라군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조구의 병력이 사수를 반쯤 건넜을 때 한나라군이 갑작스럽게 공격해 오자 결국 대패하고 만다.
항우와의 약속을 어기고 나섰다가 최악의 상태에 놓인 조구와 사마흔, 동예는 결국 절망하여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유방의 군대는 마침내 성고를 또다시 탈환했고, 이후 형양 동쪽에서 종리말의 군대를 포위하게 되었다. 이 말은 성고에 이어 형양도 유방에게 넘어갔다는 소리.
3.3.8. 돌아오는 항우, 하지만……
외황등을 평정하던 항우는 조구의 충격적인 패전 소식 등을 듣자 아직 팽월을 끝장내지 못했음에도[43] 곧바로 말을 달려 귀환하였다. 종리말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던 한나라군은 분노한 항우의 귀환을 보고 모두 혼비백산하여 험한 지대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종리말을 구원한 항우였지만, 이미 전황은 항우가 동진하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가 되어버렸다. 사수전투에서 초나라군은 대패하고 여러 대장들도 잃은 데다, 한나라군은 오창의 양식을 확보하여 이제 배부르게 되는 일만 남았지만 이미 유가, 노관, 팽월의 유격전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초나라군의 보급으로서는 참담한 괴로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무 대치에서 이런 악조건을 견디며 유방과 대치하고 있던 항우에게 결정타를 찍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제나라에서 용저가 이끄는 20만 대군이 유수 전투에서 한신에게 괴멸당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중국의 북방은 한신의 한나라군이 완전히 장악했지만, 중원의 전역에서 항우는 '''형양과 성고를 지키고 있는 한나라군과 대치하는 처음의 전황에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우는 한신의 북벌을 저지하지도, 유방의 수비라인을 돌파하지도, 팽월의 유격전을 분쇄하지도 못하였다. 결국 항우의 패배는 이 시점에서 확정되었다. 이후 양군은 광무 대치에 접어든다.
4. 결과와 영향
"옛날, 고조께선 훌륭한 말을 들으면 따라잡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으며, 간언을 좇아서 돌리듯 하였고, 말을 들으면 그 능력을 찾지 아니하고, 공로를 거론하면서 그의 평소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셨으니, 이로써 진평은 망명하는 중에 일으켜 세워서 책모(策謀)를 주관하게 하였고, 한신은 행군하는 진지 속에서 끄집어내어 상장(上將)으로 삼으셨으니, 그러므로 천하의 선비들은 구름같이 한나라로 모여 왔으며, 서로가 다투어 기이한 일을 올렸으며,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 계책을 내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어리석은 사람조차도 그의 가진 생각을 다 꺼내놓았으며, 용사는 그의 힘을 극도로 발휘하였고, 겁먹은 지아비들조차 그들이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일하였습니다. 천하의 지혜를 합치고 천하의 위업을 아울렀으며 이리하여서 진나라를 들어 올리는 것이 마치 새털같이 하였고, 초나라를 빼앗는것을 마치 줍듯이 하였는데, 이것이 고조를 천하에서 대적할 자가 없도록 하게 만든 이유입니다.[44]
팽성대전 직후 유방은 지극히 불리한 상태에 놓여져 있었다. 군대는 부족하고, 제후들은 배반했으며, 관중에는 대기근이 들고, 항우의 군대는 지극히 강력했다. 한나라군의 세력으로서는 항우를 직접적으로 싸워서 이기는것은 거의 불가능했는데, 세력에서 차이가 나는 상태에서 더욱이 상대는 최강의 야전 사령관, 무적의 명장 항우였다. 일대일 교전으로서 유방의 군대가 항우와 싸워 이기는 것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방은 팽성에서 대패한 직후부터 초한전쟁을 단순히 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이 아닌, 중국 전역의 세력이 얽히고 섥히는 대전 중의 대전으로 만들면서 형세 역전에 성공하게 된다. 팽성의 참극 직후 재빨리 경포를 끌어들이고, 앞선에서 항우의 세력을 막기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과감하게 한신을 파견해서 항우와 자신이 맞서는 전역 외에 또다른 전역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항우의 서진을 막기도 힘든 상황에서 역으로 2만이나 되는 병력을 팽월의 유격전에 투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병력을 수비병력으로 투입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난 수비를 선보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모두 유방의 능력으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경포를 설득하고 단독으로 파견할 장수로 한신을 추천한 장량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수하가 자신의 언변을 살려 영포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유격전을 벌이던 팽월이 별다른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지리멸렬 해졌다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진평의 계략과 기신의 희생이 없었다면, 무엇보다 정형 전투에서 수배의 전력차에도 승리를 거두고 불가능해보이던 임무를 성공시키던 한신이 없었다면 유방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유방은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고 그들이 활약할 수 있게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유방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전략과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유방은 수하들이 더 나은 의견을 내자 기꺼이 이에 따랐다. 관중으로 가서 병력을 규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원생의 의견을 존중하여 완으로 항우를 끌어내었으며, 항우와 결전하여 초나라군의 서진을 막을 생각이 있었지만 정충의 제안을 듣고 싸움을 피하여 결국 항우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항우가 동진하여 생긴 시간을 공과 낙양의 수비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소모할 수도 있었으나, 역이기의 주장에 따라 반격을 개시, 성고를 재탈환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러한 유방의 포용력과 여기서 힘을 발휘한 수많은 장수, 책사, 유세가들의 활약 등이 절망적으로 보이던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에 반면에 초나라군은 항우가 있지 않은 모든 전선에서 실패만을 거듭했다. 엄밀히 말해 항우는 해하 전투 이전까지 유방과 싸우며 단 한번도 제대로 된 패배를 당하지 않았으며, 형양에서든 성고에서든 완에서든 외황에서든 팽월이나 유방은 항우가 직접 뜨면 수비만 하며 버티거나 도망을 치며 제대로 싸우려고 들지도 않았다.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군은 무적이었지만, 유방과 팽월은 항우가 자리를 비운 틈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조구, 사마흔, 동예, 설공 등 초나라 군의 주요 장수들이 사망하거나 패전한 싸움은 모두 항우가 없었던 자리에서 벌어졌다. 흡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피하고 그 부하들만 죽어라 팬다는 트라헨베르크 계획(Trachenberg-Plan)처럼 움직이며 승리를 거둔 것.
이 전역에서 최대의 활약을 하며 유방의 승리를 이끈 사람은 분명 팽월이다. 헌데 이 팽월은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제후왕은 커녕, 어느정도 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꼽만큼의 보상도 받지 못하던, 항우가 세운 천하관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에게 물려버렸으니, 결국 항우의 패배는 항우 자신이 자초한 셈.
이 전역은 그 자체로도 성공적이었지만, 가장 큰 중요 포인트는 한신의 북벌이 완료될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것이다. 유방이 항우를 붙잡는 사이 한신은 중국 최대의 적수를 피해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으며, 결국 완벽하게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항우를 몰아넣는 데 성공하게 된다.
여담으로 형양·성고 전역 한나라 측 주역들의 활약상을 정리해보면 흡사 MMORPG의 공격대마냥 역할 분담이 확실하게 되어있는 걸 볼 수 있다.
- 유방은 전방에서 탱커 노릇을 하며 계속되는 항우의 공세를 버텨내 한신의 북벌 시간을 벌어주었다.
- 한신은 대미지 딜러로서 별동대를 이끌고 진격을 감행해 항우의 세력을 크게 깎아내렸다.
- 팽월은 정석적인 치고 빠지기 신공으로 항우의 어그로를 분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