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순식
1. 개요
후삼국시대의 명주(강릉)의 성주로서 현 강원도 속초에서 삼척에 이르는 태백산맥 동쪽의 광대한 봉토를 보유하고 있었던 호족. 전대 성주 허월이 일찌기 불가에 귀의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성주로 활동하였고 마침 신라 말의 혼란기에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장군을 자칭하며 거의 독립된 나라의 왕이나 다름 없는 세력을 구축하였던 당대의 네임드 대호족이었다.
아직 양길 휘하의 군사령관이던 궁예가 명주를 치러 왔을 때, 훨씬 우세한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그냥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헌데 궁예는 명주를 통째로 정복하고도 성주직과 재산과 봉토 등 원래 왕순식이 갖고 있던 것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고 왕순식 또한 이에 감복하여 양길이 아닌 궁예에게 충성을 바치며 궁예가 양길로부터 독립하는 가장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궁예가 태봉을 건국한 이후로도 가장 믿음직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로 살았다.
왕건이 918년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죽이고 왕이 되었을 때는 대노하며 패역한 찬탈자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왕건을 치려 했다. 왕순식 개인이 갖고 있던 세력이 워낙에 막강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반항해도 패서호족들의 대표인 왕건조차도 당장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나 922년 7월에 왕건이 보낸 아버지 허월의 설득으로 군을 물리고, 이후 왕건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개성 왕씨 성을 사성받아 왕순식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또한 대광을 역임했는데, 지방 세력 중에서는 유일하게 최고직인 대광을 하사받았다.
936년에는 기병 3천을 이끌고 일리천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1.1. 강릉 김씨 출신이 맞는가?
명주에서 세력을 가졌기 때문에 당연히 명주의 세력가 김주원의 후손일 것이라는 추측이 거의 정설처럼 되었고 따라서 아예 김씨로 가정해 김순식이라고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928년 왕씨 성을 하사받기 이전 기록에는 그가 김주원의 후손이라거나 나아가 '''김씨라는 언급 자체가 나와있지 않다.''' 삼국사기, 고려사에서도 그의 가족인 아버지 허월, 아들 장명 또한 왕씨 하사 이전에는 김씨로 기록된 바가 전혀 없다.
왕순식이 김씨로 기록된 것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강릉대도호부사 맹지대(孟至大)에 의해 저술된 임영지(臨瀛誌)에서부터다. 여기서는 김순식이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경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실제 기록상 등장하는 왕순식의 부하인 왕경[2] 과 혼동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강릉 김씨 족보 및 여타 신라계 김씨 족보에도 왕순식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어서 그의 성씨가 정말 김씨였는지는 알 수 없다.
940년 건립된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3] 에서도 당주군주사 태광 왕공 순식(當州軍州事太匡王公荀息)으로 언급된다.
2. 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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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박상규가 연기하였다. 극중에서 그리 큰 비중이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위의 사실이 드라마에서도 그대로 그려지고 있다. 주로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큰 세력권의 수장'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궁예가 명주를 공략할때 궁예의 됨됨이를 살펴 본 허월의 설득으로 궁예에게 명주를 바치자 비로소 궁예는 양길에게서 독립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아예 수도를 명주로 할지 논의까지 오갈 정도. 하지만 궁예는 김순식을 존중해주어 명주를 그대로 김순식이 다스리게 하였다.
궁예가 실정을 거듭하면서 민심을 잃을 때도, 김순식은 궁예의 후원자로 거론된다. 특히 120회 왕건의 군사정변이 일어나 피신하는 궁예가 은부와 행선지를 논의할 때, 은부가 명주(오늘날 강릉)로 갈 것을 제안하며 '명주 장군 김순식은 폐하(궁예)의 둘도 없는 충신이 아닙니까?"하는데, 궁예가 "그건 그렇지...허나 그 명주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종간이나 은부를 상당히 고깝게 보기도 하는 듯, 특히 북원부인의 사망 때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실 종간과는 별로 만난 적도 없는 사이이긴 하나, 북원부인의 사망 때 은부를 상당히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당시 종간과 연락하며, 북원부인의 처리를 논의 하고 있었으니... 궁예의 실정후에도 그의 후원자로 나서면서도 적어도 인간적인 면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종간, 은부보다는 궁예 휘하 시절의 왕건과 상당히 잘 맞는 모습을 보인다.[4]
궁예가 죽고 이후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대노하여 왕건이 보낸 사자의 목을 벤후 그 목과 왕건을 비난하는 편지를 함께 보내면서, 그에 맞서 저항해 군사를 일으키려 할 때, 동시기 반란을 일으키던 선장이나 환선길의 경우에는 놀라기는 해도 그렇게 심각하게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던 왕건이 상당히 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허월이 김순식을 설득하면서 군사를 물려서 이후 한동안 등장이 없다가 공산 전투 이후 왕건에게 직접 찾아가서 충성을 맹세하는데, 그러자 큰 패배를 겪어 의기소침해져 있던 왕건이 크게 반긴다.[5] 그 영향력이 얼마인지 알 수 있는 대목. 그 이후 한동안 등장이 없었다가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김순식의 군대가 참전하는 것을 거론하는 장면에서 한번 더 등장한다. 여담으로 배현경, 김락, 김언, 홍유는 이 드라마에서 처음에는 김순식 수하의 장수들이었다가, 명주성을 궁예에게 바치면서 궁예의 수하가 된다. 하지만 이들이 김순식의 부하 출신이라는건 이들이 궁예의 휘하로 다 들어가는 순간 그대로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것처럼 잊혀진다. 더구나 왕건에게 대항했던 김순식과는 달리 홍유, 배현경, 김락은 아예 왕건을 적극적으로 옹립한 1등, 2등 공신이 되어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기까지 한다. 실상 홍유, 배현경, 김락, 김언을 한꺼번에 등장시킬 개연성을 얻기 위해 임시로 사용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작중에 보면 은근 아버지인 허월대사 말을 잘듣는 모습을 보여준다.
궁예에게 충성할때도 그렇고, 왕건과 관련된 일도 결국은 허월대사의 설득끝에 이루어진 일이다.
[1] 귀순 이후 태조 왕건에게 하사받은 이름. 본명은 장명(長命)이라고 한다.[2] 본래 이름은 관경으로, 928년 함께 왕씨 성을 사성받았다.[3] 930년 사망한 낭원대사 개청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탑비이다.[4] 왕건에게 항복했을 때도, 아버지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닮았다.[5] 그 이전에 그의 아들을 왕건에게 보냈기는 했지만, 직접 찾아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는 나레이션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