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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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비제(Johannes Wiese : 1915. 3. 7~1991. 8. 16)'''

1. 독소전의 활약
2. 슈톨모빅 킬러
3. 하마터면 추락사
4. 포로 생활과 귀환
5. 서훈


1. 독소전의 활약


제2차 세계 대전에서 480회 출격하면서 133기를 격추한 기록을 보유한 수퍼 에이스 '''요하네스 비제'''는 제52전투항공단(JG 52)를 첫 자대로 배정받아 제I비행단 예하의 제2비행중대장이 되었다. 특히 독소전에서 대활약을 펼친 엑스페아텐 에이스로 유명한 그는 1943년 7월 5일에는 하루에 12대를 격추하는 대단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로부터 십여일 후인 7월 17일에는 100기 격추를 달성했는데, 이것은 독일 공군에서 45번째였다.

2. 슈톨모빅 킬러


여러 에이스들이 그렇듯이, 요하네스 비제 또한 133대라는 공인 격추 외에도 비공인이지만 25대를 더 주장하고 있다. 그의 모든 전과 중에서 70대가 소련 공군의 지상 공격기 IL-2였는데, 이 때문에 요하네스 비제는 소련의 항공요원들 사이에서 '''쿠반의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1944년 12월 1일, 비제는 JG 52를 떠나 제77전투항공단 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주 후에, 윙맨 한쉬 상사를 거느리고 훈련 비행을 나섰다가 아주 뛰어난 솜씨를 지닌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1기를 마주쳐 교전을 벌였는데, 둘 모두 격추되었다. 한쉬 상사의 탑승기가 공중 폭발하는 것을 목격한 비제는 즉시 Bf 109의 장기인 상승 능력을 이용하려고 고도를 높여 공중전에서 이탈하려고 했지만, 그 영국 전투기는 계속 추적해왔다. 후방을 확인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상승하는 실수를 범한 그의 탑승기 뒤에는 스핏파이어가 딱 달라붙게 된다.
요하네스 비제는 조종간을 더 당겨 상승각을 더 올렸으나 이미 그가 탄 전투기에는 20mm 기관포탄이 날아와 명중하기 시작했다. 기체가 불을 뿜으며 속도를 잃고 추락하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달은 비제는 곧바로 캐노피를 투기하고 뛰어내렸다. 하지만 이때의 고도는 무려 상공 9,000 미터였다. 비제는 수백 km/h의 엄청난 스피드로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면서 필사적으로 낙하산의 립코드를 여러 번 당겼지만, 어쩐 일인지 펼쳐지지 않았다.

3. 하마터면 추락사


그러나 여기서 비제의 운이 다하지는 않았다. 지면에 충돌하기 2초도 채 남지 않은 고도 80 미터에서 갑자기 낙하산이 펼쳐진 것이다. 그렇지만 충분히 감속되지 못한 상태로 지상에 떨어진 그는 두개골 골절상을 비롯해 전신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사령관 직을 지그프리트 프라이탁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치료를 위해 패전을 맞을 때까지 후방의 병원에서 지내게 된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날 혼자서 독일 공군의 두 에이스 파일럿을 상대하여 모두 격추시킨 조종사는 캐나다 공군의 제401비행대대(No. 401 Squadron RCAF) 소속의 조종사였던 존 맥케이(John "Johnny" MacKay)였다고 한다.

4. 포로 생활과 귀환


종전 후 미군에 의하여 병원에서 신병이 확보된 그는 완치를 기다렸다가 몇 달 후인 1945년 9월에 소련군에게 넘겨졌고, 49년 11월까지 러시아의 수용소에서 전쟁 포로로 구금되어 있었다. 서독 연방군이 재건되자 1956년에 공군에 다시 입대한 요하네스 비제는 부상으로 인하여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전투기를 다시 몰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포츠담에 있는 군사 연구소(Militärgeschichtliches Forschungsamt)에서 연구직으로 근무하다가 1970년중령 계급으로 예편하였다.

5.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941년 9월 27일)
공군 최전선 비행 은장 (1941년 10월 11일)
1급 철십자 훈장 (1942년 5월 1일)
공군 최전선 비행 금장 (1942년 7월 13일)
공군 명예컵 (1942년 11월 6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12월 5일)
기사 철십자 훈장 (1943년 1월 5일)
곡엽기사철십자 훈장 (1944년 3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