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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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대 성 바오로 6세

'''제263대 가경자 요한 바오로 1세'''

제264대 성 요한 바오로 2세
'''제263대 교황
Sanctus Ioannes Paulus I
요한 바오로 1세
'''
<colbgcolor=#EFBC00><colcolor=white> '''교황명'''
요한 바오로 1세 (Ioannes Paulus I)
'''본명'''
알비노 루치아니 (Albino Luciani)
'''출생'''
1912년 10월 17일
[image] 이탈리아 왕국 포르노 디 카날레
'''사망'''
1978년 9월 28일 (향년 65세)

'''재위기간'''
1978년 8월 26일 ~ 1978년 9월 28일 ('''33일''')
'''즉위미사'''
1978년 8월 26일
'''장례미사'''
1978년 9월 28일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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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교황 선출과 즉위
3. 인간적인 교황
4. 선종
5. 미디어
6. 죽음을 둘러싼 의혹


1. 개요



교황 선출 이후 첫 번째 강복 영상.

'''하느님은 어머니이시면서 아버지이시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보다는 어머니이시다.''' - 요한 바오로 1세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가까이서 느껴본 경험이 좀처럼 없었다. --- 내게는 성령의 지시가 자명하지 않다. 그것에 조금 무감각한 편이다. ... 그러나 내게 그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후보였다.''' - 베이질 흄 추기경

'''바오로 6세가 사람들을 위해 혼자 운 교황이셨다면 요한 바오로 1세는 사람들을 많이 울린 교황이셨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가톨릭의 제263대 교황. 사목표어는 'Humilitas(겸손)'.
가난한 농부 집안 출신으로 평생을 겸손함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회법과 강론으로도 많은 신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분 사진은 대부분 웃는 표정의 온화한 인상을 주는 것들이 많은데 그래서 별명이 '''미소 짓는 교황(Il Papa del Sorriso)''', '''하느님의 미소(Il Sorriso di Dio)'''였다.

2. 교황 선출과 즉위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참고로 요한 바오로 1세가 선출된 콘클라베1978년 8월 25일부터 8월 26일 사이에 진행되었는데 무더운 여름에 열린 데다가 투표 용지를 태울 때 연기가 틈새로 새어나와 시스티나 경당 내부에 차는 바람에 추기경들이 질식할 뻔하기도 했다(…). 전임 교황인 바오로 6세 시절에 80살 이상의 고령 추기경에게 콘클라베 투표권을 주지 않고 추기경 수를 138명까지 늘려 많은 非이탈리아인 추기경을 임명해 이탈리아인 교황보다는 다른 나라 출신의 교황이 선출되도록 개혁 조치를 취했지만,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의 인망이 높았기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바오로 6세의 추기경과 콘클라베 개혁 조치는 이후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요한 바오로 1세도 선임자의 개혁 조치가 갖는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 교황으로 선출된 후 측근에게 '콘클라베 때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추기경처럼 바오로 6세께서 생전에 후계자로 꼽은 사람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나란 말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3. 인간적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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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선한 인상이다. 일부에서는 더스틴 호프먼과 비슷하다고도 한다.
재위기간이 매우 짧은데도 교회사에 3가지의 의미있는 행적을 남겼다. 첫째는 최초로 2가지 교황명을 채택한 것, 둘째는 교황관 대관을 거절한 첫 교황이라는 것, 셋째는 교황 본인이 자기 교황명에 '1세'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덧붙였다는 것이다.[1] 2가지 이름을 선택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의 현대화를 이끈 요한 23세바오로 6세를 본받겠다는 의미이고, 대관을 거절함은 “‘종들의 종’이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 무겁다.”는 이유를 들어 세속과 종교 양쪽의 권위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교황의 본질적인 목표인 영성 활동에 주력하겠노라 천명한 것이다. 그래서 어부의 반지와 팔리움만을 받았다.
요한 바오로 1세의 이러한 상징적인 행적들로 가톨릭 교회의 탈세속화는 가속화되었고, 교황은 영적 목자의 우두머리로만 남게 되었다. 또한 교황이 스스로를 ''이라고 칭하던 관례를 깨고 ''로 칭하기도 했다. 1979년에 출간된 교황의 연설집 <희망의 서광이 누리를 비춥니다>에는 즉위 후 선종하기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쓴 연설문 19편이 실렸는데, 그동안 교황들이 사용해 오던 외교문서 같은 투의 글은 없다. 예화를 들어가며 다정하게 무르팍 앞에 놓인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말을 건넨다. 이를 더욱 확고하게 만든 인물이 후임자인 요한 바오로 2세.

4.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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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1세의 시신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있는 요한 바오로 1세의 무덤
온화한 미소와 자비심 넘치는 활동으로 많은 지지를 받은 인물이었지만, 즉위한 지 불과 한달만에 세상을 떠났다.[2]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상당히 많은 의혹이 있었으나, 즉위 전부터 이미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고령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발표되었다. 사람들이 교황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안경을 쓰고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침대에 앉아 책을 든 모습이었다고. 가톨릭 역사상 9번째로 짧은 33일간 재위했지만 큰 인상을 남긴 교황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내용이 정착하도록 기본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 영상. 연로하시다는 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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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1세의 장례미사 모습. 당일 비가 와서 참석자들이 우산을 쓰고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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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추기경
교황과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시성 청원서가 2002년 접수됨에 따라 관련 절차가 개시되었고 2017년 11월 9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요한 바오로 1세의 덕성을 인정하는 시성성의 교령을 승인함에 따라 가경자선포되었다.

5. 미디어


요한 바오로 1세의 일생을 다룬 이탈리아 영화가 있다. 제목은 〈Papa Luciani - Il sorriso di Dio(루치아니 교황 - 하느님의 미소)〉. 평화방송에서도 간간히 틀어주곤 한다.[3] (보기 : 1편·2편)
영화 대부 시리즈 3편에서는 람베르토 추기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바티칸 은행 책임자로 부패한 성직자인 길데이 대주교와 사이가 틀어진 주인공 마이클 콜레오네가 찾아와 고해성사를 하자 마이클을 위로해준다. 이에 감복한 마이클은 길데이 대주교의 비리(무려 7억 7천만 달러를 해먹었다!)를 람베르토 추기경에게 제보하고, 바오로 6세의 선종 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로 선출된 람베르토 추기경은 길데이를 해임하고 바티칸을 개혁하려고 하나 선수를 친 길데이가 교황을 독살한다. 길데이 또한 마이클이 보낸 알버트 네리에 의해 살해된다.

6. 죽음을 둘러싼 의혹


요한 바오로 1세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급성심근경색이었지만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다.
요한 바오로 1세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것은 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수녀였고, 그녀가 교황의 개인비서인 마기 몬시뇰에게 이를 알렸다. 곧 이어 당시 바티칸의 국무장관 비요에게도 통보되었으나 이 이후에 일어난 일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선종사실을 접한 비요 국무장관은 교황의 전속 의사들을 부르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그 중 한 명을 지명하여 육안에 따른 검시만 하고 부검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공식적인 발표는 육안으로 심근경색을 사인으로 단정했을 뿐 아니라 사망시각을 오전 5시 30분이라고 하였는데 비요 국무장관이 교황의 선종을 통보받은 시각이 오전 5시였다(...). 여기에 최초 발견자가 수녀가 아니라 마기 몬시뇰이라고 발표하면서 실제 시신 발견정황을 감춘데 더해 요한 바오로 1세가 사망 당시 읽고 있었던 서적이 교회 개혁과 관련되어 파면할 대상자 명단이었으나 다른 서적이라고 발표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또한 의사들이 선종을 통보받기도 전에 시신 발견 십 수분만에 이미 교황의 장례절차가 개시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교황이 생전에 준비해둔 유언장과 각종 서류를 비요 국무장관이 독단으로 가져간 뒤, 그대로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채 서류의 행방이 묘연해져버렸다.
한편 이 비요 국무장관은 바티칸 개혁과 관련하여 요한 바오로 1세가 선종 직전에 파면하기로 결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정계는 물론 언론과 신자들로부터도 비난이 잇따랐으며 이탈리아의 유력지에서도 교황의 부검을 실시하지 않은 사실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부검은 결국 뒤늦게야 실시되었지만 이미 시신이 방부처리된 상태에다가 비공개로 진행하여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이러한 상황 때문에 교황의 죽음에 대해서 논란과 의혹이 그치지 않았고 그에 따른 음모론도 제기되었다. 이를 다룬 서적과 영화(대표적으로 위에 나온 대부 3)도 나오고 있으며 실제로 요한 바오로 1세가 바티칸 내의 검은 커넥션과 부패를 척결하려다가 그들에게 독살당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러한 음모론이 나오게 만든 교황의 사망확인 절차는 그 정도로 엉터리였고 의혹을 초래할만한 수준이었다. 또한 실제로 요한 바오로 1세는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에도 바티칸이 연루된 금융범죄에 대해서 항의하는 등, 바티칸 내의 부패척결에 관심이 많았고 교황 착좌 이후에도 실제로 개혁에 착수하여 많은 이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갖게 했다. 이러한 교황의 행보가 바티칸 내 부패 세력에게 위기감을 초래하여 독살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교황 독살의 범인은 비요 국무장관, 마르친쿠스 대주교, 암브로시아노 은행의 회장 칼비[4]등이라고 하며, 이후 '''요한 바오로 2세가 후임 교황이 되었을 때 외국인 출신으로 바티칸 내부 사정에 어두웠던 그가 반공주의와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 교회 일치 운동 등에 열성을 쏟은 대신 바티칸 내부 개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바티칸의 부패가 가속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모두 어디까지나 음모론일 뿐, 확인된 바는 없다. 오히려 요한 바오로 1세는 이미 자신의 병세가 위중하여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요한 바오로 1세의 개인 비서였던 몬시뇰 존 마기는 교황이 건강이 너무 나빠 오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실제로 측근에게 암시한 바 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주간지 젠테와의 인터뷰에서 즉위후 며칠 뒤 요한 바오로 1세에게 중요한 종교 행사가 있는 멕시코행 비행기표를 보여주었으나 "로마를 떠나지 않겠네. 곧 가게 될 것이야"라고 말하며 이를 후임자에게 줄 것을 당부했다고 말했다. 몬시뇰 존 마기는 요한 바오로 1세가 선종 전날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흉부 통증을 호소하면서 수녀에게 평소 복용하던 알약을 준비해줄 것을 부탁한 적이 있다면서 그의 죽음은 자연사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또 요한 바오로 1세가 생전에 교황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을 자주했으며 폴란드 출신의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5]을 적격 인물로 꼽기도 했다는 것. 몬시뇰 존 마기는 젠티와의 인터뷰에서 요한 바오로 1세가 "왜 나지, 내 맞은 편에 앉아있던 추기경 처럼 다른 좋은 후보들이 많은데, 그 사람은 바오로 6세가 후계자로 꼽았지 않아?"라고 말하곤 했다고 소개했다.
한편 교황 독살설에 연루된 인물들은 대체로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하여 암살당하는 등 파멸당하였으나, 마르친쿠스 대주교는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으로 망명하여[6](독살설 이외에도 부정부패에도 연루됨) 잘 먹고 잘 살다가 갔다.혹자는 비요 국무장관이나 마르친쿠스 대주교 등의 배후가 자신들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또다른 공모자들을 죽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하였다.
[1] 그로 인해 35년 후에 선출된 후대 교황의 명칭을 놓고 매체간에 한때 혼란을 빚기도 했다.[2]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1세의 선종 소식을 처음 전해듣고서는 앞서 세상을 떠난 바오로 6세와 혼동하는 줄 알고 "어느 교황이 돌아가셨다는 거냐?"라며 되묻기도 했다.[3] 극중에 파티마의 성모 발현에서 예언된 '교황의 죽음'에 관한 언급이 계속 등장하는데, 요한 바오로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연계시켜 설명하려는 듯.[4] 요한 바오로 1세가 베네치아 대주교 시절에 항의한 금융범죄에 연루된 인물들이다.[5] 그가 바로 후임자인 요한 바오로 2세다[6] 그는 교황 선종 직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