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관
* 라틴어: Tiara/Triregnum
가톨릭의 교황이 1963년까지 썼던 관으로 금과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를 비롯한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타원형의 3층관. 그 유래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쓰였던 '프리기아 모자'로 추정된다. 높이는 38cm 정도로 전체적으로 금빛이 돌지만 본래 재질은 도금이 된 은이라고 한다. 또한 관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다.
'삼중관'이라고도 하고 어부의 반지, 세디아 제스타토리아와 함께 교황을 상징하는 물건중 하나이자 천국의 열쇠와 함께 교황의 직권을 상징하며 이 열쇠와 교황관은 문장은 물론이고 바티칸 국기, 교황청의 문장에도 그려져 있다.
교황을 상징한다 하여 언제나 쓰고 다니는 건 아니었고, 전례시에는 모양이 비슷한 주교관을 쓰며 즉위할 때 대관식 같은 성대한 의식에서만 쓴다. 관이 세 부분으로 나뉜 의미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대표적으로 '(사제의) 통치권·교도권·사목권'이나 '투쟁의 교회, 정화의 교회, 승리의 교회' 등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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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삼중관이 교황 대관미사 때 쓰였을 때에는 수석 추기경이 교황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읊으며 머리에 삼중관을 씌웠다.
초기에는 굳이 3중으로 나뉘지 않고 모양만 원통인, 보통의 주교관과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형태의 교황관은 8세기 혹은 9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교황권이 절정에 이르던 1295년 보니파시오 8세가 이중관으로, 베네딕토 6세 혹은 클레멘스 5세가 삼중관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된 것은 한참 세속 군주와의 기 싸움을 하고 있을 때 황제보다 우위에 서기 위함이었다.
삼중 교황관은 교황 바오로 6세 때 역사의 뒷편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바오로 6세는 즉위식 때는 교황관을 썼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의식에서 교황관을 쓰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려 했는데, 1968년에 미국 워싱턴 D.C.의 성모무염시태 국립 대성당(Basilica of the National Shrine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이 성금을 모아 대신 교황관을 매입해 전시했다.
바오로 6세는 교황관의 사용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고 그 후는 후임자의 재량에 맡겼는데, 겸손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차기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아예 '''즉위식 때 교황관을 쓰는 전통을 폐지하고 주교관으로 대체했다'''. 그는 즉위식 자체를 간소화하고 1달 남짓한 짧은 재위기간 동안에 교황관을 만들지도 않았다. 뒤이어 즉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그의 유지를 이어 긴 재위기간 동안 교황관을 쓴 적이 없었다. 1981년에 기증받은 일명 '헝가리 티아라'가 있지만 그것도 쓰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바오로 1세가 차마 물리지 못한 세디아 제스타토리아도 타지 않았다. 다만 이 두 교황은 문장에 교황관이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두 전임자의 전례를 착실히 따르는 것은 물론, '''자신의 문장에도 교황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얼추 교황관처럼 생긴 주교관을 박았다'''. 비록 2011년 5월 25일에 그의 고향인 독일 가톨릭교회로부터 아연, 은, 황동 및 여러 준보석으로 만들어진 불가리아제 교황관을 선물받긴 했지만 끝끝내 쓰지 않았다. 간혹 인터넷상에 베네딕토 16세의 머리에 교황관이 씌워져 있는 사진이 돌아다니지만 모두 합성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전임 교황의 선례를 따라 문장에 주교관을 넣었다.
현재는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에 있는 베드로 청동상의 머리에 교황관을 씌우는 의식을 거행할 때만 사용하며, 그 외에는 대성당 옆의 성물실에 보관한다.
1798년 프랑스군이 바티칸을 약탈하면서 교황관에 장식된 보석들을 뜯어낸 결과, 1143년부터 1798년까지 재위했던 교황 숫자만큼인 최소 86개 이상의 교황관 중 그레고리오 13세의 교황관 하나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파괴되어 사라졌다. 현존하는 교황관들은 약탈의 참화를 벗어난 후인 1800년에 제작된 것부터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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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10대 술탄인 쉴레이만 1세는 동맹국 프랑스에게서 선물받은, 교황의 삼중관을 능가하는 '사중관'을 착용하기도 했다. 사중관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11만 5천 두카트에 달했다고 한다.[8] 터키 사극 드라마 위대한 세기에서도 쉴레이만 1세가 쓰고 나온다.
1. 의미와 상징
가톨릭의 교황이 1963년까지 썼던 관으로 금과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를 비롯한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타원형의 3층관. 그 유래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쓰였던 '프리기아 모자'로 추정된다. 높이는 38cm 정도로 전체적으로 금빛이 돌지만 본래 재질은 도금이 된 은이라고 한다. 또한 관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다.
'삼중관'이라고도 하고 어부의 반지, 세디아 제스타토리아와 함께 교황을 상징하는 물건중 하나이자 천국의 열쇠와 함께 교황의 직권을 상징하며 이 열쇠와 교황관은 문장은 물론이고 바티칸 국기, 교황청의 문장에도 그려져 있다.
교황을 상징한다 하여 언제나 쓰고 다니는 건 아니었고, 전례시에는 모양이 비슷한 주교관을 쓰며 즉위할 때 대관식 같은 성대한 의식에서만 쓴다. 관이 세 부분으로 나뉜 의미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대표적으로 '(사제의) 통치권·교도권·사목권'이나 '투쟁의 교회, 정화의 교회, 승리의 교회' 등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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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삼중관이 교황 대관미사 때 쓰였을 때에는 수석 추기경이 교황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읊으며 머리에 삼중관을 씌웠다.
Accipe tiaram tribus coronis ornatam, et scias te esse Patrem Principum et Regum, Rectorem Orbis, in terra Vicarium Salvatoris Nostri Jesu Christi, cui est honor et gloria in sæcula sæculorum.
(세 왕관으로 장식된 관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대가 군주와 왕들의 아버지, 세상의 영도자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임을 아십시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예와 영광이 영원히 계시나이다.)
2. 역사: 유물이 된 교황관
초기에는 굳이 3중으로 나뉘지 않고 모양만 원통인, 보통의 주교관과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형태의 교황관은 8세기 혹은 9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교황권이 절정에 이르던 1295년 보니파시오 8세가 이중관으로, 베네딕토 6세 혹은 클레멘스 5세가 삼중관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된 것은 한참 세속 군주와의 기 싸움을 하고 있을 때 황제보다 우위에 서기 위함이었다.
삼중 교황관은 교황 바오로 6세 때 역사의 뒷편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바오로 6세는 즉위식 때는 교황관을 썼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의식에서 교황관을 쓰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려 했는데, 1968년에 미국 워싱턴 D.C.의 성모무염시태 국립 대성당(Basilica of the National Shrine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이 성금을 모아 대신 교황관을 매입해 전시했다.
바오로 6세는 교황관의 사용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고 그 후는 후임자의 재량에 맡겼는데, 겸손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차기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아예 '''즉위식 때 교황관을 쓰는 전통을 폐지하고 주교관으로 대체했다'''. 그는 즉위식 자체를 간소화하고 1달 남짓한 짧은 재위기간 동안에 교황관을 만들지도 않았다. 뒤이어 즉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그의 유지를 이어 긴 재위기간 동안 교황관을 쓴 적이 없었다. 1981년에 기증받은 일명 '헝가리 티아라'가 있지만 그것도 쓰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바오로 1세가 차마 물리지 못한 세디아 제스타토리아도 타지 않았다. 다만 이 두 교황은 문장에 교황관이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두 전임자의 전례를 착실히 따르는 것은 물론, '''자신의 문장에도 교황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얼추 교황관처럼 생긴 주교관을 박았다'''. 비록 2011년 5월 25일에 그의 고향인 독일 가톨릭교회로부터 아연, 은, 황동 및 여러 준보석으로 만들어진 불가리아제 교황관을 선물받긴 했지만 끝끝내 쓰지 않았다. 간혹 인터넷상에 베네딕토 16세의 머리에 교황관이 씌워져 있는 사진이 돌아다니지만 모두 합성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전임 교황의 선례를 따라 문장에 주교관을 넣었다.
현재는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에 있는 베드로 청동상의 머리에 교황관을 씌우는 의식을 거행할 때만 사용하며, 그 외에는 대성당 옆의 성물실에 보관한다.
3. 현존하는 교황관
1798년 프랑스군이 바티칸을 약탈하면서 교황관에 장식된 보석들을 뜯어낸 결과, 1143년부터 1798년까지 재위했던 교황 숫자만큼인 최소 86개 이상의 교황관 중 그레고리오 13세의 교황관 하나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파괴되어 사라졌다. 현존하는 교황관들은 약탈의 참화를 벗어난 후인 1800년에 제작된 것부터 남아 있다.
4. 자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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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10대 술탄인 쉴레이만 1세는 동맹국 프랑스에게서 선물받은, 교황의 삼중관을 능가하는 '사중관'을 착용하기도 했다. 사중관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11만 5천 두카트에 달했다고 한다.[8] 터키 사극 드라마 위대한 세기에서도 쉴레이만 1세가 쓰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