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프로옉트

 


1. 개요
2. 상세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


Uranprojekt
나치 독일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우란프로옉트'는 우라늄(Uran)과 계획(Projekt)의 합성어이다.

2. 상세


1938년핵분열 현상이 발견되자, 과학자들은 "저 핵분열로 일어나는 엄청난 에너지를 무기로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그 중에는 당시 전쟁의 여론이 매우 강해진 나치 독일도 있었다. 당시 나치 독일은 전쟁을 준비하면서 핵분열 현상이 무기로 쓰일 수 있음을 알아채고 물리학자들을 초빙해 우란페어라인(Uranverein/우라늄 클럽)을 조직하고 핵분열의 무기 이용 가능성을 연구해왔지만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이들을 군에 동원하는 바람에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렇게 일시 중단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1939년 9월 1일에 다시 시작된다. 나치 독일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 당시 독일의 저명한 핵물리학자들을 다시 모아 핵무기 개발을 요청한다.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에서 우라늄계획의 일환으로 원자로 연구와 핵무기 제조 가능여부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와 오토 한과 같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6월 4일 나치 수뇌부 앞에서 원자력의 군사적 의미를 밝힐 때, 그들은 핵무기 제조를 위해서 우라늄 235가 필요하며, 자연계에서 이를 정제하여 농축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우며,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들이 연구 중에 발견한 플루토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이젠베르크와 그가 책임지고 있던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핵무기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나치 독일은 벨기에에서 4천 톤의 우라늄 광석도 득템했고, 점령한 노르웨이에 수력발전소에서 추출하는 중수 탱크도 있었건만... 이 중수탱크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측에서 특공대를 보내 폭파했으며 중수를 이동하는 배도 같이 수장하는 바람에 연구에 큰 차질이 생겼다.베르모크 수력발전소 폭파 작전
또한 독일 과학자들은 감속재중수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는 흑연도 사용할 수 있었으나, 흑연은 일부 과학자들의 잘못된 실험 결과 때문에 조기에 배제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국력 문제 때문에 실제 핵무기 개발에 이르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미국이 우려하고 있던 바와는 달리 히틀러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핵물리학을 연구하던 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계에서 추방되었고 결과적으로 핵물리학에 대한 투자 자체가 매우 빈약해진 상태였다. 심지어 '''190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필립 레나르트가 '''유대인의 학문인 핵물리학 따위를 어떻게 믿느냐'''는 황당한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핵물리학 연구의 기본 장비랄 수 있는 사이클로트론조차 없어서, 1942년에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가 세계 최대급 사이클로트론 건설 예산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연구팀은 오히려 아직은 제대로 만들 수 없을 테니 제발 조그만 것부터 시작하자며 당황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종전 때까지 독일이 사용할 수 있었던 사이클로트론은 프랑스 점령지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단 1개 뿐이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비효율적인 반응로 설계 문제였다. 이 반응로는 하이젠베르크의 작품이었는데, 그는 이 설계도를 고의로 연합국에 노출시킴으로서 독일의 핵개발 계획을 세계에 알린 장본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반응로가 매우 비효율적이라 임계 상태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사실보다는 독일이 핵분열 에너지를 이용하려 한다는 우려가 절대적으로 고평가되었다. 이 문제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의 핵개발 능력이 생각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연합국에 알리려 했다가 역효과만 부른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그 결과 독일이 벨기에에서 손에 넣었던 천연우라늄 및 광석 전량이 '''처음 독일 손에 들어갔을 때 상태 그대로 미국의 수중에 떨어질 정도'''로 독일은 핵무기 또는 핵에너지 개발에 기초적인 접근조차 달성하지 못했다. 여기에 독일의 핵무장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기 위한 영국의 특수작전으로 독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수를 수 톤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등 외부적인 요인 덕분에 설사 전폭적인 지원과 독일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 해도 실제 역사에서 벌어졌던 수준 이상의 연구 성과는 거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독일이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링크 당시 전황이 독일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는 핵무기 개발에 큰 관심이 없었고, 또한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대다수의 연구진들이 실험이나 엔지니어링에는 무지(혹은 무관심)한 이론물리학자였다. 심지어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로의 필요성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핵반응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질량을 계산하려면 원자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하이젠베르크 등의 독일 과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연구를 사보타주했다는 의혹이 있다. 오토 한처럼 명백히 강제로 연구에 참여하는 바람에 사보타주를 행한 사람도 있었고, 연구의 총책임자였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연구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이는 1992년 영국이 보관 중이던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팜홀에서 포로로 억류되었던 독일 과학자들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후 인터뷰에서 원자로 연구비를 타먹으면서 핵무기 개발에는 기술상이나 비용상의 이유로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끌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가 핵무기에 너무 관심을 갖지 않도록 보고도 되도록 늦게, 되도록 사소한 방식으로 했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핵개발이 이루어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나치 독일의 핵무기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과학사학자들도 있었다. 해당 녹취록은 도청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 나치 독일의 중요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도청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청을 알고 일부러 연기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닐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에게 열정적으로 독소전쟁을 찬양하며 핵무기 연구와 그 위력을 상세히 말해 분노한 적도 있다. 다만 여기서의 반론은 닐스 보어는 워낙 인물이 인물인지라 게슈타포의 집중감시를 받았고 도청까지 당하고 있던 터라 하이젠베르크가 나치에 우호적 발언을 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기밀인 핵무기연구를 굳이 발설한 것 자체도 연합국에 고의로 정보를 발설한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단 전후 네이처 지에 기고한 독일의 핵개발 역사 관련 기사에서 '''우리는 폭탄을 만들 능력 자체가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사보타주와 능력 부족 모두 사실일 수도 있다. 은밀히 사보타주를 감행하면서 원자폭탄 개발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면 원자폭탄 개발에 어떤 난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 난관을 돌파할 능력이 있었는지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둘다 반반 사실로 인정하는 부분.
아무튼 그렇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1945년에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종결된다.

3. 기타


미국의 핵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도 독일이 먼저 핵을 개발하면 연합국 측이 크게 밀릴 것을 예상하고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독일은 핵무기 개발에서 거의 진행된 것이 없었고, 맨해튼 계획에서 개발된 핵무기는 일본 제국히로시마나가사키먼저 투하되었다.
나치 독일이 무너지고 세워진 서독은 프랑스와 손잡고 비밀리에 핵개발을 하려 한 바 있다. 이는 프랑스에서 샤를 드골이 대통령이 되면서 무산되었다.
높은 성의 사나이울펜슈타인 시리즈 같이 대체역사물에서는 독일이 핵개발에 성공했다는 설정이 들어가기도 한다.

4.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