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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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윤경신(尹京信, Yoon Kyungshin)
'''국적'''
대한민국[image]
'''출생'''
1973년 7월 7일, 서울특별시
'''학력'''
숭덕초등학교
광운중학교
고려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종목'''
핸드볼
'''포지션'''
라이트백
'''소속'''
VfL 굼머스바흐(1996~2006)
HSV 함부르크(2006~2008)
두산 핸드볼선수단(2008~2011)
'''지도자'''
두산 핸드볼선수단(2013~)
대한민국 핸드볼 국가대표팀(2015~2016)
'''신체'''
203cm, 95kg
1. 소개
2. 선수 경력
3. 은퇴
4. 수상 기록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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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前 핸드볼 선수이며, 역대 구기종목 운동선수를 통틀어 '''올타임 넘버원'''을 뽑으라면 당당히 최우선 순위로 꼽히는 레전드다. 특히 '''해외 무대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했던 선수'''이다.[2][3]

2. 선수 경력


1996년 독일의 핸드볼 1부 리그인 핸드볼-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 윤경신이 2001/02 시즌까지 5번의 득점왕을 차지하며 역대 최고의 골 스코어러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의 팀 VfL 굼머스바흐는 매번 중하위권에만 머물렀다. 그런데 그 다음 시즌부터 중상위권으로 순위가 오르더니 2005/06 시즌엔 3위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때 윤경신은 득점 10위에 그치며 다소 폼이 떨어졌고 시즌이 끝난 뒤 HSV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새 팀 소속으로 완전히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분데스리가 우승은 득실차로 아깝게 놓쳤지만[4] 유럽의 컵 대회 챔피언들이 참가하는 EHF 컵위너스컵에서 우승했고, 윤경신은 두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한다. 2007/08 시즌이 끝나고 2008년 7월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2011년 6월까지 실업 팀인 두산 핸드볼선수단에서 활동했다. 2008년 두산 베어스 야구단 시구를 맡기도 했다.
독일에서 활약하는 동안 '''분데스리가 통산 최다 득점(2905골)'''[5], '''분데르리가 최다 득점왕'''(7회)을 기록했으며[6], 독일 핸드볼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골 스코어러로 자리매김했다. 그뿐 아니라 약체 팀인 대한민국 대표 소속으로 '''올림픽 단일 대회 최다 득점'''(2004년 58골), '''세계선수권 3연속 득점왕'''(1993, 1995, 1997)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활약들을 바탕으로 2001년에는 세계 핸드볼 협회 IHF에서 선정하는 '''세계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참고로 한국에선 남자는 1989년 강재원, 2001년 윤경신, 여자는 1989년에 김현미, 1996년에 임오경이 받았다.
득점 기록만 본다면 핸드볼계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볼 수 있지만 의외로 저평가를 받은 선수이기도 하다. 중하위권 팀 소속으로 여러 차례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했음에도 독일 올해의 선수에 단 한 차례도 뽑히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세계 대회에서도 여러 번 득점왕을 기록했음에도 MVP에 선정되지 못했고 올스타엔 단 한번 선정되었다.[7]
축구에서 비슷한 업적을 올린 선수를 찾자면 게르트 뮐러라고 볼 수 있다. 뮐러 또한 분데스리가 득점왕 7회에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4회, 월드컵 득점왕 1회 및 발롱도르 수상 1회라는 기록을 갖고 있고 그에 맞는 여러 기록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나 기록에 비해서 저평가 받기도 하는 모습이 윤경신과 상당히 일치한다.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현지인도 따기 어렵다는 독일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굼머스바흐 5년차에는 주장까지 맡게 된다. 함부르크 SV를 떠나 대한민국으로 복귀할 때는 함부르크 팬들이 윤경신을 꼭 잡아야 한다고 집회를 열었으며 상당한 아쉬움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3. 은퇴


2011년 6월 두산과 계약이 만료된 후 계약 조건에 이견을 보여 재계약하지 않았고, 2012 런던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할 때까지 올림픽 국가대표팀의 플레잉 코치로 일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여,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단의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는 기수를 맡기도 했다. 아마도 세계적으로 명성이 가장 높은 한국의 운동선수인데다 올림픽 출전 경력도 길어서 기수를 맡은 듯 하다.
선수 겸 플레잉 코치로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예선에서 대한민국은 전패를 당해 아쉬움 속에 은퇴하게 되었다. 올림픽 이후 2012년 9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2013년부터 두산 핸드볼 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그리고 2015년 2월 6일 핸드볼 국가대표팀 감독에 공식적으로 선임되어 두산 핸드볼 팀 감독직과 겸임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남자 핸드볼이 리우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실패하고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6위에 그치자, 2016년 2월에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사임했다. 그럼에도 "나라가 부르면 가야 한다. 대한민국 핸드볼에 힘이 될 수 있다면 국제위원 등 행정 분야를 맡겨도 피하지 않겠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국대 감독을 맡을 때 대표팀 선수들이 체육관에 도착하면 국민의례부터 하도록 했다고 한다.

4. 수상 기록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0 베이징
단체전
금메달
1994 히로시마
단체전
금메달
1998 방콕
단체전
금메달
2002 부산
단체전
금메달
2010 광저우
단체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93 마나마
단체전
금메달
2000 구마모토
단체전
금메달
2010 베이루트
단체전
금메달
2012 지다
단체전
은메달
1995 쿠웨이트
단체전

5. 기타


  • 유재석이 '천하제일 외인구단'을 진행하던 시절, 윤경신과 6:1로 매치를 가진 적이 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 심지어 골대 앞에서 골 넣기를 시전해 외인구단팀을 벙찌게 만들기도 했다.
  • 모 영화감독이 방황하던 중학생 시절, 골목에서 친구들과 몰래 담배를 피다가 선배인 윤경신에게 걸려서 귀뺨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고 한다. 감독의 회술로는 정신을 잃을 뻔한 충격이었다고 언급했다.
  • 혹자는 윤경신이 야구, 배구, 농구를 했어도 대성했을 선수라고 평하기도 했다.
  • 아시안 게임 5회 금메달로 5차례나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병역 문제를 해결해 준 점 때문에 스포츠 팬들 사이에선 합법적 병역 브로커라고 불리기도 했다.
  • 대학시절 대학농구동아리 소속으로 경희대학교 농구부와의 농구시합에서 시합을 승리로 이끌 정도의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경희대학교 농구감독이던 최부영 감독이 "왜 저 친구가 핸드볼을 하고 있냐"고 땅을 치며 아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 뭉쳐야 찬다 66화에 용병으로 출연했으며 용병을 포함한 역대 출연진중 최장신이다.
[1] 오른쪽 인물이며, 왼쪽 인물은 동생 윤경민이다.[2] 그와 비벼볼 만한 업적을 가지고 있는 선수로는 여자 배구김연경 정도가 꼽힌다. 두 선수의 공통점은 한 종목에서 포지션을 불문하고 세계 최고의 자리를 경험한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축구차범근손흥민, 야구박찬호, 그리고 류현진 또한 오랫동안 해외 무대에서 인정 받은 선수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한 종목에서 최고에 오른 적은 없으며, 냉정하게 따지면 종목의 특정 포지션에서도 1인자였던 적이 없었다. 이 중 류현진이 사이영상 2위에 오르며 투수 부문에서 최고에 근접하기는 했다.[3] 그래도 언급한 선수들은 최고가 아니었을 뿐 축구와 야구에서 월드 클래스로 인정 받을 위치는 되었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키커 시즌 베스트 11에 두 차례 선정된 적이 있었으며, 5년 간의 키커 평균 평점에서 공격수 부문 3위에 올랐다. 손흥민은 월드 베스트 공격수 부문 후보에 두 차례 올랐으며, 발롱도르 후보에도 선정되었다. 추신수와 박찬호 또한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이러한 비교는 이 선수들의 위상이 별로라서 비교 대상으로 놓은 것이 아니라 핸드볼이라는 종목에서 윤경신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하기 위한 비교인 것이다.[4] 전적은 우승 팀과 동일했다. 득실차에서 밀려 준우승으로 마무리했다.[5] 통산 득점 2위 선수는 2875골을 득점한 덴마크의 라스 크리스티안센(Lars Christiansen)이다. 이 선수의 경우 윤경신과는 달리 비교적 단신에 가까운 182cm이었다. 때문에 몇몇 이들은 라스를 인간승리의 표상으로 치켜세우기도 한다.[6] 1996-97, 1998-99, 1999-00, 2000-01, 2001-02, 2003-04, 2006-07[7] 1995년 세계선수권에서 올스타 팀의 라이트백으로 선정된 것이 국제대회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이었다. 팀 성적을 고려해도 의문인 것이 1997년 세계선수권의 MVP는 한국과 똑같이 8강에서 탈락한 스페인의 탈란트 두이셰바예프다. 윤경신은 이 대회에서도 최다 득점을 기록하고 8강 상대도 최종 우승 팀인 러시아였으나 올스타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참고로 저 스페인 선수는 IHF 20세기 선수 순위에서 2위에 랭크되는 등 역대 최고의 핸드볼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04년 올림픽에서는 단일 대회 최다 득점 신기록을 썼음에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때 올스타에 선정된 라이트백은 아이슬란드의 Ólafur Stefánsson이다.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8강에 진출한 한국보다 먼저 떨어진 아이슬란드에서 올스타 선수가 나온 것이다. 이 선수가 윤경신보다 나은 점이라면 슈팅 성공률이 11% 더 높긴 했다. 하지만 슈팅 성공률을 본다면 더 좋은 선수들이 따로 있었고 결국 기록과 성적만 본다면 어중간한 선수가 뽑힌 것이므로 두 쪽 모두 비중이 생각보다 낮으며 다른 요소들이 심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