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언이

 

<purple> '''칭체건원 찬성자
윤언이
'''
<purple> ''''''시호''' '''
'''문강공(文康公)'''
<purple> '''본관'''
파평 윤씨
<purple> '''이름'''
언이(彦頤)
<purple> ''''''
원로(元老)
<purple> ''''''
금강거사(金剛居士)
<purple> '''사망지'''
개경 개성부 자택
<purple> '''묘지'''
임강현(臨江縣) 용봉산(龍鳳山) 숭복사(崇福寺) 동쪽 언덕(東麓)[1]
<purple> ''''''생몰연도''' '''
음력 1090년 ~ 1149년 9월 3일
1. 소개
2. 역임 관작
3. 생애
3.1. 초년기
3.2. 김부식과의 대립
3.4. 말년과 후일담


1. 소개


"여진은 본래 아조(我朝) 사람의 자손이기에 신복(臣僕)이 되어 누차 조천(朝天)해왔습니다. 그 호적이 모두 아조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거꾸로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 금의 칭신 요구에 반발하는 윤언이. 본인 묘지명에서 발췌.

고려 중기의 문신, 정치가.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으로 유명한 윤관의 6남이다.
흔히 김부식라이벌로는 묘청이나 정지상이 꼽히지만, 사실 진짜 중앙정치판에서 김부식과 대립한 인물은 바로 이 사람으로 젊은 시절부터 말년까지 김부식과 '''거의 평생을 대립한 숙적 관계'''였다.[2]

2. 역임 관작


<purple> '''윤언이 사후 추증된 관작'''
<purple> '''문산계 품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정 3품 문산계 품계.
<purple> '''수직'''
수사공(守司空)
사공은 삼공 직 중 하나다.
<purple> '''직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중서시랑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4등급 차관[3], 판상서형부사는 상서성 형부의 장관이다.
<purple> '''훈위'''
주국(柱國)
2등급 훈위.
<purple> '''시호'''
문강공(文康公)
김부식과의 대립 때문에 배향공신이 되지 못했다.

3. 생애



3.1. 초년기


<purple> '''윤언이의 가족관계[4]'''
<purple> '''5대조'''
윤신달(尹辛達)[5]
<purple> '''고조부'''
미상[6]
<purple> '''증조부'''
윤선지(尹先之)[7]
<purple> '''조부'''
윤집형(尹執衡)
<purple> ''''''
윤관(尹瓘)
<purple> '''형제'''
윤언인(尹彦仁)
윤언순(尹彦純)
윤언식(尹彦植)
윤언민(尹彦旼)
윤언영(尹彦榮)[8]
윤대원(尹大原)[9]
[출가.]
[출가.]
<purple> '''아내'''
광양군대부인(光陽郡大夫人) 김씨
<purple> '''자식'''
장남 윤인첨[10]
차남 윤자양
삼남 윤자고[11]
사남 효돈[12]
오남 윤돈신
육남 윤돈의
칠남 윤
장녀 윤
차녀 윤
삼녀 윤
사녀 윤[13]
윤관은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당시 고려 지배층이 대부분 그랬듯이 두 명은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아들들 중 윤언이는 어려서부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벼슬길에 오른 후 여진 정벌 때도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고 윤관이 여진족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을 때 아버지를 모시고 분전하여 척준경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내기도 했다.
여진 정벌이 끝난 후 승진 코스를 밟으며 승승장구했는데, 인종, 정지상, 권적 등과 함께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기를 즐겼다고도 한다.
정치적 성향이 중도라고 할 수 있는데, 행동으로만 보았을 때에는 김부식과 함께 묘청의 난을 진압했기에 개경파라고 할 수 있으나 칭제건원을 주장한 것을 보면 서경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서경파와 같이 금을 정벌한다 같은 급진적인 정책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3.2. 김부식과의 대립


하지만 그의 불행은 당시 최고실세였던 김부식과 척을 졌다는 것에 있었다. 예종 시절, 예종은 개경 영통사에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윤관으로 하여금 짓게 했는데 그 비문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영통사의 승려들이 예종에게 수정할 것을 건의했다. 이 때 예종은 당시 이미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당시에는 신참 관리였던 김부식에게 그 비문을 고치게 했다. 이는 윤관의 명예와 관련이 있던 일이었는데, 당시 윤관은 최고위 재상에 있었고, 김부식은 하급 관리였기 때문에 상급자인 윤관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김부식이 이를 사양해야 했으나,[14] 김부식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이를 받아들여 윤관의 비문을 수정해 버린다. 윤언이는 아버지의 체면을 구겨버린 이 행동에 김부식에게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뒷날 국자감에 왕이 행차하여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론하게 하고 윤언이로 하여금 김부식 강의의 검토관 역을 맡겼는데, 윤언이는 주역에 매우 정통했기 때문에 고려사에 김부식이 진땀을 흘렸다고 기록되었을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과 반론을 통해 김부식을 어전에서 상당한 망신을 주었다.

3.3. 묘청의 난


1135년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이 출정을 하고 여기에 윤언이가 막료로 참가하게 되는데 김부식이 이전에 그가 정지상 등과 어울려지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반발한 탓에 결국 양주방어사로 좌천되고 말았다. 광주목사가 된 이후에는 어마어마하게 긴 사죄문 (고려사 윤언이 열전 참고)을 올리고 나서야 1140년 개경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당시 고려의 유명한 정치가들이 대개 그랬지만 문인이었음에도 무장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 윤언이의 무용담이 상당하다. 특히 화공이 특기였고 공성병기의 활용법을 매우 잘 알고 있어서 서경성 공성전 때 화공과 공성병기를 적극 활용해서 서경성 성문을 불태우거나 건물에 타격을 입히는 등 막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적이자 당시 토벌군 총사령관 김부식의 견제로 인해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전쟁 중 김부식은 윤언이의 작전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였고, 이후 휘하 장수들의 찬성으로 결국 윤언이의 작전을 채택하게 되자 이번에는 작전 방향과 상관이 없는 엉뚱한 곳으로 윤언이 부대를 옮겨버리기도 했다. 공을 세울 기회를 아예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윤언이가 끝내 중앙 정계로 복귀하면서 졸지에 정적을 마주하게 된 김부식은 수 차례 은퇴를 청했다고 한다. 이 때 인종의 명으로 편찬한 것이 바로 삼국사기.

3.4. 말년과 후일담


문장이 매우 뛰어나 주역의 해설서인 역해를 지었으나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자호를 금강거사라 하였다. 묘지명에 따르면 외직 중군 병마판사(中軍 兵馬判事) 겸 동북면 행영병마판사(東北面 行營兵馬判事) 및 삼군훈련사(三軍訓鍊士)[15]를 수여 받고 계속 군부에 나아가 군사훈련을 주도했는데, 1149년 9월 3일 출근하다 몸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죽었다고 한다.
반면 고려사 및 보한집에 기록된 윤언이의 마지막은 많이 다르다. 은퇴한 윤언이는 자기 고향인 영평현에 금강재(金剛齋)란 집을 짓고 거주했다. 거기서 불교에 심취해 한 고승과 친하게 지냈는데, 작은 의자(포암)를 만들고 먼저 죽는 사람이 이 의자에 앉아 죽기로 약속했다. 어느날 윤언이가 갑자기 고승을 찾아와 밥을 먹고는 말하길 자신이 곧 죽을 것이니 미리 언질을 주려고 왔다고 했다. 이에 고승은 의자를 건네주었고 윤언이는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며 웃으며 사세구를 짓고 의자에 앉아 죽었다고 한다.
기록의 진실성이나 현실을 따지면 묘지명 기록이 더욱 실제일 가능성이 높지만 고려사에도 포암 설화가 실제 역사로 기록되있는 걸 보면 윤언이의 최후가 어땠는지 알기 어렵다.
후 윤언이가 죽고 2년 뒤에 김부식도 세상을 뜬다.
한편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 중 윤인첨은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신집권기에도 재상의 직책에 오르고 상장군까지 되어서 중방에 참여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윤관이 무신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고, 윤언이는 무신들의 경멸 대상이었던 김부식과 척을 지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윤언이의 아들 윤인첨이 무신정권기에도 꽤나 잘나가던 것에 반해,[16]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정중부를 건드린 사건이 화근이 되어 무신정변 때 정중부의 손에 죽음을 맞았던 것도 대비가 되는 점이다. 그러나 윤언이의 아들 윤돈신(尹惇信)과 윤인첨의 맏아들 윤종악(尹宗諤)이 정중부의 난 당시에 죽는 등 집안의 화를 아주 면하진 못했다.
[1] 윤언이 묘지명에 따르면 아버지 윤관의 묘지도 이 곳에 있었다고 한다.[2] 묘청은 현대에 와서 '사대'와 '자주' 프레임으로 라이벌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지만 묘청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김부식과는 급수 자체가 상대가 안 되는 인물이었고, 정지상과의 대립은 문학적인 라이벌로 조명되지만 주로 야사에 그 일화가 전하는 편이다.[3] 고려 중서문하성 평장사 직위는 네가지가 있었는데, 각각 1등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2등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3등 문하시랑평장사, 4등 '''중서시랑평장사'''이다.[4] 고려사 및 윤언이 묘지명 기준.[5]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삼한공신이다.[6] 파평 윤씨 족보엔 윤선지가 고조부라고 한다.[7] 파평 윤씨 족보엔 윤금강이 증조부라고 한다.[8] 유홍(고려)의 딸 하원군군의 남편. 윤언식 묘지명으로 보면 윤언영에서 윤언식으로 개명한 것으로 봐야한다. [9] 동인지문사륙에 수록된 윤관의 표문에서 등장하는 아들.[출가.] A B [10] 배향공신이다.[11] 문공유의 딸과 결혼했다. 문공유는 문공원의 형제다.[12] 출가했다. 효돈은 법명.[13] 칠남부터 사녀까지 모두 일찍 죽어 이름을 붙이지도 못했다. 윤언이 묘지명 기록.[14] 이대로 하면 일개 하급 관리가 재상의 허물을 드러내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15] 천자는 6군, 제후는 3군 진영을 만들 수 있다. 고려는 독자적으로 5군을 구성했지만 묘청의 난 이후 반란을 무서워한 의종은 3군으로 줄여버린다.[16] 특히 윤인첨은 후에 조부 윤관에 이어 가문에서 두 번째로 배향공신에 오르는 영예를 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