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나 여왕
1. 소개
네덜란드 제5대 국왕.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유산을 두 번이나 하고 오빠를 사산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1937년 2살 연하의 귀족 출신 리페의 베른하르트와 결혼하여 4명의 딸을 낳았다. 다만 베른하르트는 결혼 생활 도중에 외도를 하여 사생아 2명을 두었다. 독일이 침공하자 율리아나 공주 일가는 만일을 위해 영국에 있던 빌헬미나 여왕과 떨어져 캐나다로 피난했다.
2. 치세
1948년 9월 4일 어머니 빌헬미나에게 양위받아 네덜란드의 여왕이 되었고, 1949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1953년 1월 31일 북해에서 대홍수가 일어나 1,836명이 사망하는 재앙이 일어나자 사태 수습에 진력했다.
본인도 1980년 4월 30일 큰딸 베아트릭스에게 양위했다. 2004년 사망하였고 남편 베른하르트도 같은 해 12월에 사망하였다.
장례식 거행 영상.
2.1. 가족 관련 사건사고
재위중에 가족과 관련된 사건사고가 많았다. 먼저 막내딸 크리스티나 공주의 시력 문제 때문에 베른하르트 공이 1948년 궁정에 소개한 '신앙치료사' '흐레이트 호프만스(Greet Hofmans)'(1894-1968)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여왕의 최측근으로 되면서 부부 문제에 간섭하거나 평화주의 사상을 여왕에게 주입시키려 하는 등[1] 여왕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8년 후에는 궁정이 두 파벌(여왕+호프만스 vs 베른하르트 공+자녀들)로 나뉘다시피 했다. (호프만스를 처음에 소개하긴 했지만 반대로 틀어진 베른하르트 공이 흘린 듯한) 슈피겔지의 보도(1956.6.13)가 파문을 일으키고, 이에 빌럼 드레이스(Willem Drees) 내각이 위원회를 결성, 호프만스를 궁정에서 추방함으로써 8년간의 위기가 일단락된다.
그리고 1963년~1964년 둘째딸 이레네 공주의 부르봉-파르마 공 카를로스 우고와의 결혼 문제 때문에 홍역을 치렀고[2] , 1965년에는 후계자 베아트릭스 공주의 결혼 문제(독일 출신의 신랑감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의 나치 소년단 가입 의혹) 때문에 또 한번 여론이 험악해졌다가 빌럼 알렉산더르가 태어나고 나서 겨우 진정되었다.
1970년대에는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록히드 사건 연루 의혹을 받기도 했다.
3. 여담
- 셋째 딸 마르가레트의 출생이 파란만장했다. 율리아나는 공주 시절에 셋째를 임신했는데, 이 때가 2차 대전 중이어서 캐나다로 망명을 가야 했고 임신 중이던 아이는 캐나다에서 태어날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당시 캐나다에 적용되던 영국 국적법(캐나다 국적법은 1947년에 도입된다. 그 전까지 캐나다인은 영국 국적)은 출생지주의가 원칙이었던 반면, 네덜란드는 혈통주의를 원칙으로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캐나다에서 태어날 율리아나의 셋째 아이는 네덜란드-영국 이중국적자가 될 예정이었는데, 네덜란드 왕위계승법은 이중국적자의 계승을 금지한다. 태어날 아이가 딸이면 이미 언니가 둘이나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들이면 당시 아들을 우선하던 네덜란드 왕위계승법에 의해 두 누나보다 계승서열이 앞서는 동시에 이중국적자라서 계승권을 상실하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상황이었다. 이에 캐나다 의회는 '율리아나 공주가 입원한 오타와 시민병원 산부인과병동의 병실 4칸에 캐나다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특별법을 가결했다. 이렇게 되면 해당 병실에 캐나다 법률이 미치지 못해 네덜란드의 속인주의가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1943년 1월 19일에 태어난 아이가 마르가레트 공주다. 그녀의 탄생 이후 해당 특별법은 철폐되었다. 종전 후 네덜란드는 이 때의 보답으로 오타와에 튤립 구근 10만 개를 선물했고, 그 다음 해 다시 2만 개, 또 그 후로도 매년 1만 개의 튤립 구근을 계속해서 선물했다. 이후 오타와에서는 이걸 밑천 삼아서 1953년부터 튤립 축제를 열고 있다.
- 항공기 동호인들에게 유명한 신트마르턴의 프린세스 줄리아나 국제공항은 공주 시절에 신트마르턴을 방문한 율리아나 여왕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