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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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명나라의 제12대 황제.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계천융도연의관인현문광무순덕홍효장황제(契天隆道淵懿寬仁顯文光武純德弘孝莊皇帝). 휘는 재후(載垕). 가정제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비 두씨(康妃 杜氏)이다.[1]
2. 생애
융경제 주재후는 유왕(裕王)에 책봉되었다. 융경제가 즉위할 당시에는 융경제의 두 형 주재기, 주재예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장자로 간주되어 자연스럽게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경제는 가정제 생전에 태자로 책봉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가정제가 도사 도중문의 주장인 이룡불상견(二龍不相見)[2] 을 맹신했기 때문이다. 가정제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으나 차남인 주재예가 죽자 이룡불상견을 맹신했다. 대례의 의로 인해 고초를 겪었던 가정제로서는 후사를 두는 것이 중요했으며, 태자를 다시 세우면 그 또한 요절할까봐 아예 태자를 책봉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융경제는 태자 수업을 받지 못한 채 즉위하게 되었다.
가정제 말기에 파면된 해서[3] 와 같은 신하를 다시 부르고, 양정화 등 가정제에 대항하다가 관직이 삭탈된 사람들의 관직을 복구시켜 주었다. 또한 융경제 시기에 유명한 신하들이 많은데 서계, 고공, 장거정 등이 재상으로 있었고, 유명한 장수로는 담륜, 척계광이나 이성량 등이 있었다.
가정제 시기를 괴롭혔던 문제점을 파악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왜구를 강력하게 진압함과 동시에 융경원년 복건순무어사 도택민이 바다의 신 마조의 고향, 미주도를 동서 해양 무역의 요충지로 삼아 개방정책을 펴야한다고 주장했다. 목종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어 조종이 제정한 법률을 과감하게 고쳐 국외 무역을 허가하였다.[4] 국외 무역을 허가함과 동시에 명의 무역량은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 당시 포르투갈 상인과 같은 외국 상인들이 중국에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한 연구에 따르면 융경제가 국외 무역을 개방한 이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입된 은의 양이 3억냥을 넘는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전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1/3에 해당하는 양이다.
또한 가정제 시기를 괴롭혔던 몽골의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당시 몽골의 왕 엄답은 조공무역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는 몽골족의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조공을 통해 얻고자 했다. 가정 33년 백련교의 지역 교주 조전이 명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몽골로 집단 망명했다. 그는 명나라 침략을 수시로 종용했으며 침략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몽골군의 무기 개량에 큰 공적을 세워 엄답이 변방을 침입할 때는 사전에 조전의 거처로 찾아가 조언을 구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조전은 아예 엄답을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다. 명나라에서 도망오거나 포로로 잡아온 한족을 활용하여 문자는 아는 자는 군사와 행정업무를 맡기고 그렇지 않은자는 토지를 주고 농사를 짓게했다. 또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여 다판승성(지금의 내몽고 호화호특)을 건설했다. 그 동안 유목 생활을 하며 지냈던 엄답은 이곳에 정주하며 자못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시작했다.
엄답의 손자 파한나길이 명나라에 투항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엄답은 황제로 등극하여 명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전을 희대의 매국노이자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조부 엄답와의 갈등으로 명나라로 망명을 선택한 파한나길은 일족을 거느리고 대동 패호보에서 투항을 윈했다. 대동총병 왕숭고와 순무 방봉시는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즉시 조정에 보고 했다.
조정의 일부 대신들은 파한나길을 죽여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목종은 우리 대명국을 흠모하여 왔으므로 거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몽골에서는 엄답의 아내가 명나라 조정에서 자기 손자를 죽이지 않을 까 우려하여 날마다 엄답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손자를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답도 자기때문에 손자가 명나라로 달아난 것을 후회했다. 무력으로 명나라 변방을 공격하면 명나라 조정에서 손자를 풀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동으로 진격했다. 왕숭고는 몽골 기병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업답을 설득하는 게 유리하다 판단하여 백호 포숭덕을 엄답 진영으로 보내 파한나길을 죽이지않고 예우해 주고 있다고 알렸다. 엄답은 왕숭고의 호의에 감동하여 조전 등 그 동안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한족 출신 관리들을 명나라로 압송했다. 왕숭고도 파한나길을 돌려보내서 엄답의 성의를 화답했다. 조전은 북경으로 끌려가 능지처참 당했다. 융경5년 목종은 엄답을 순의왕으로 책봉했다. 엄답은 명나라 황제에게 신하국의 예의를 갖춤으로서 몽골족의 생존과 안정에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있는 실리를 챙겼다. 목종은 황제로서 위엄을 갖추고 북방을 안정시키는 통치력을 발휘했다.
왜구 문제가 잠잠해진 뒤 남쪽에서 활약하던 척계광을 북쪽으로 불러들여 국경을 방어하게 했다. 그 결과, 명나라의 서쪽과 북쪽 국경에서 쏠쏠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그 덕분에 타타르와의 평화 협상을 체결하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대체로 유능한 신하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활용했다는 점, 근검절약하고 비교적 부지런한 편에 속했다는 점에서 좋은 황제의 자질이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황제가 늘 그렇듯이 취약점이 있었다. 지나치게 여색을 밝혀 수명을 단축한 호색한이었다.
그가 황위를 계승할 때의 나이는 30세였다. 이때가 남자의 성적 능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매일 궁녀들과 난잡한 성행위를 즐겼다. 후궁과 동침을 할 때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궁녀들이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원래 건강했던 목종은 과도한 방사로 몸이 피폐해지자 부친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최음제를 복용하고 하룻밤에 10여명의 궁녀를 품는 쾌락을 즐겼다.
이러한 호색과 최음제의 남용은 급기야 그의 몸을 망가트렸다. 결국 36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재위 기간은 겨우 6년. 일설에 따르면 '''명나라에서 신하가 가장 대하기 쉬웠던 황제'''라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황제 다음에 나타난 황제가...
황후 셋, 후궁 열일곱을 두었으며, 그 사이에서 4남 7녀를 뒀지만, 장남, 차남, 장녀, 차녀, 막내가 요절. 후대는 셋째인 주익균이 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막장 짓이 워낙 쟁쟁한 탓(?)에 별로 유명하지 않다.[5]
3. 둘러보기
[1] 융경제가 즉위하자 효각태후(孝恪太后)로 추존되었다.[2] 두 용(황제와 태자)은 서로 상극이므로 가능하면 접촉을 피해야 태자가 요절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3] 가정제 항목에서도 언급되는데, 가정제의 연호를 이용해서 언어 유희의 상소문을 올렸다가 사형당할 뻔했던 인물.[4] 완전한 자유 무역은 아니어서 무역항은 미주도 즉 지금은 푸젠 성의 포전시로, 출입 가능한 무역선은 허가 당시에는 1년에 50척으로 제한되었다.[5] 청나라의 강희와 건륭 사이의 옹정제와 같은 포지션이다. 다만 청나라는 앞뒤 황제가 청나라 전성기를 만든 인물로 중국 전체에서도 명군으로 꼽는 강희제와 할아버지 만큼은 아니지만 기나긴 치세를 유지했던 건륭제 사이의 황제가 옹정제이다. 최근엔 건륭제에 대한 평가가 갈리고 낮아지면서 근면하게 제국을 통치했던 옹정제의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옹정제의 평가에 변화를 만든 인물이 그의 평전을 쓴 미야자키 이치사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