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이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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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기
한국어 문헌에서 'Tây Sơn'을 '떠이썬'으로 표기하는 경우와 '떠이선'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공존하고 있다. 베트남어 자음자 's'는 북부 하노이 발음 기준으로는 무성 치경 마찰음 /s/이고, 중부나 남부(호찌민 시 등) 기준으로는 무성 권설 마찰음 /ʂ/이다. 한편 베트남어 자음자 'x'는 모든 지역에서 무성 치경 마찰음 /s/이다. 베트남어 외래어표기법에서는 이러한 's'와 'x'를 구별하여 전자를 'ㅅ', 후자를 'ㅆ'로 옮기도록 하므로,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떠이선'이 맞다.
2. 개요
바로 베트남 중부 떠이썬(西山, 현재의 빈딘 성(平定省))지방에서 일어난 떠이썬 3형제 응우옌반냑(阮文岳, Nguyễn Văn Nhạc), 응우옌반루(阮文呂, Nguyễn Văn Lữ), 응우옌반후에(阮文惠, Nguyễn Văn Huệ))가 세운 정권이다. 성이 응우옌씨이지만 원래 성은 호씨(胡氏)로써 남쪽 응우옌씨 정권과는 관계가 없다. 응우옌씨 3형제의 이 봉기가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운동인 떠이썬 당(西山黨)의 난이다. 떠이선 형제는 평민 출신의 인물[6] 로 그에 걸맞게 쯔놈을 공식문자로 지정하여 공문서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다수의 평민들과 재야의 선비들이 공직에 진출하고 땅없는 농민들에게 토지가 부여되는 등 많은 개혁정책이 단행되었고, 외세의 침탈을 거뜬히 이겨낸 개혁의 시대이자 영광의 시대라는 평가이나 중반에 응우옌반루가 죽으면서 잠깐동안 분열로 위기를 맞기도 했고, 이후로 막판에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응우옌반약과 응우옌반후에도 오래살지는 못했으며 이로 인해 어리거나 능력이 없는 후계자가 황위에 오른 뒤에 상층부들이 초심을 잃고 권력쟁탈전 등에 매달리며 통치력에 공백이 생기며 민심이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 응우옌 왕조에게 멸망당하며 비슷하게 농민반란으로 나라가 세워진 중국의 한나라와 명나라와는 다르게 오래가지 못하고 단명했다.[7]
3. 역사
반란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고통받는 농민을 구제한다는 목적을 밝힘으로써 농민의 지지를 대거 끌어내고 참족과 중국인 등 소수민족들의 협조도 같이 얻었으며[8] 한편으로, 찐씨 정권에 복종하는 척 하면서 응우옌씨 정권을 먼저 멸망시켰기 때문이었다.
1771년에 거병하면서 빠른 시간내에 세력을 다지는데 성공했고 1773년, 옛 참파의 수도 꾸이년(비자야)을 손에 넣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으며, 1774년에는 응우옌씨 정권의 수도인 푸쑤언을 함락시켰다. 1777년에는 남부 자딘(Gia Định, 嘉定, 지금의 호찌민 시)을 함락하면서 응우옌씨 정권의 일족을 모두 도륙했다. 이 때, 진주군 부사령관이 된 레귀돈이 저술한 「무변잡록」(撫邊雜錄)은 동시대 사료가 부족한 응우옌씨 정권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후 떠이썬 정권은 응우옌반냑이 1778년 중부 지역의 황제를 선언한 다음, 막내 응우옌반후에가 중흥 레 왕조에 대해 북벌을 개시하여 1786년에는 찐씨 정권마저 몰아냈다. 남부의 응우옌씨 정권과 북부의 찐씨 정권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남북국시대를 종식시킨 것이다. 이때 라오스 방면으로 세력 확장을 하던 떠이썬 왕조의 태조 응우옌반후에는 응에안에 있던 카이산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씨앙쿠앙에 침입하게 하여 그곳의 영주에게 떠이썬 입공을 요구했다. 이에 열받은 위앙짠 왕국(라오스의 란쌍 왕조의 후예이자, 라오스 3왕국 시대의 하나, 한글판 위백의 비엔티안) 국왕 차오 난타센은 씨앙쿠앙에 파병해서 카이산 군을 제압했다. 그러나 다음해인 1788년에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린 카이산이 다시 침입하여 결국 차오 난타센은 씨앙꾸앙의 떠이썬 입조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씨앙쿠앙은 위앙쨘 왕국의 영토이면서 베트남 왕조의 세력하에 놓인 반독립적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다. 위앙쨘 왕국이 멸망하면서 씨앙쿠앙은 시암 짜끄리 왕조의 영지가 되었지만, 1893년에 프랑스가 이전 루앙프라방 왕국의 종주권을 시암에서 획득하면서, 1899년에 씨앙쿠앙은 통킹과 루앙프라방으로 분할된 형태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양국 국경에 나뉘어져있는 동네다.
1788년, 떠이썬의 세력을 두려워한 중흥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 소통제(昭統帝)에 의해서 청나라 군이 들어오자 떠이썬 군은 '''청군 20만도 박살냈다.''' 일단 선봉군을 몰아낸 떠이썬 정권은 청에 사대하는 조건으로 베트남의 통치권을 확인받는다. 응우옌씨 3형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중흥 레 왕조마저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였다. 소통제는 청으로 도망갔고, 떠이썬은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맨처음 멸망시킨 응우옌씨에는 최후의 생존자이며 근성가이인 응우옌푹아인이 있었다.'''
3.1. 근성의 응우옌푹아인
- 응우옌푹아인은 떠이썬 정권이 중부로 물러나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일시적으로 응우옌씨 정권 시절의 일부 영토를 수복하기도 하지만 다시 떠이썬 정권에 밀려서 도주하게 된다. (1차 시도)
- 이후 시암 세력을 끌어들여서 떠이썬 군과 싸우게 하지만, 1785년 떠이썬 군과 시암 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가 떠이썬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실패한다. (2차 시도)
- 이후 응우옌푹아인은 당시 선교활동을 위해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아드랑의 주교인 피에르 피뇨 드 비엔((Pierre Pigneau de Behaine, 1741년 ~ 1799년)를 통하여 프랑스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응우옌푹아인의 부탁을 받아들인 아드랑 주교는 1787년 프랑스에 도착하여 루이 16세를 알현하고, 베르사유에서 대월과 프랑스의 공수 동맹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국왕이 군대를 대월에 파견하여 도와주면, 대월은 다낭과 뿔로 꼰도르(지금의 꼰 다오)섬의 영유권 및 주권을 양도하고, 대월 전역에 대해서 프랑스가 상업권을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원정군 편성을 위임받은 인도 주재 프랑스군 사령관이 원정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원정 자체를 취소하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3차 시도)
- 그러나 근성인 응우옌푹아인에 못지 않게 근성인이었던 아드랑 주교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며, 대월 원정군을 조직하였다. 응우옌 푹 아인도 포르투갈과 영국에 원조를 청하는 한편, 캄보디아 병력을 징병하여 기회를 노렸다. (이 정도 되면 다국적군이 따로 없다. 엮인 나라만 베트남,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캄보디아의 5개국이다.)
3.2. 떠이썬 왕조의 분열과 멸망
1787년 찐씨 정권 멸망 후, 떠이썬 3형제는 전국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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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로 응우옌반냑(阮文岳, Nguyễn Văn Nhạc), 응우옌반루(阮文呂, Nguyễn Văn Lữ), 응우옌반후에(阮文惠, Nguyễn Văn Huệ)
- 구 광남의 영토는 첫째이자 황제인 응우옌반냑이 통치하며, 중앙 황제를 칭했고,
- 가정성 일대는 동정왕(東定王) 응우옌반루에게,
- 구 찐씨 정권이 다스리던 북부는 북벌을 완수한 셋째 북평왕(北平王) 응우옌반후에가 접수했다.
참고로 1787년 청이 침입하자 완혜는 황제를 칭했다. 이른바 푸쑤언 조정(富春朝廷)의 등장이다. 남쪽의 중앙 황제의 조정은 꾸이년 조정(歸仁朝廷)이라고 불렀다. 떠이썬 왕조에서 푸쑤언 조정이랑 꾸이년 조정이 공존했지만 푸쑤언 조정이 더 힘이 쎘기에, 이후의 연호는 꾸이년 조정의 태덕(泰德)에서 푸쑤언 조정의 광중(光中, Quang Trung, 광쭝)으로 옮겨가게 된다. 응우옌반후에는 전 베트남의 통일에서 더 나아가 옛 베트남의 고토인 광동, 광서를 수복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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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반후에
1788년, 남부의 요충지인 자딘이 도로 광남 응우옌씨에게 넘어가면서, 광중제 응우옌반후에는 응우옌푹아인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계획했지만, 1792년에 3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부춘조에선 광중의 뒤를 이어 응우옌꽝또안(Nguyễn Quang Toản, 阮光纉)이 뒤를 이었다. 응우옌꽝또안은 완복영의 침략으로 멸망 직전에 처한 태덕제의 귀인조를 지원하는 척 하다 그 영토를 몰수했고 다시 서산을 통일했으나 힘을 잃은 뒤였으며 조카에게 뒤통수 당했던 형 태덕제 응우옌반냑 역시 이듬해(1793) 죽었다.
완주의 응우옌푹아인은 차례로 싸 덱, 빈 롱, 미 토, 사이공을 점령하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802년, 임시수도 탕롱이 떨어지면서 떠이썬 왕조는 멸망했다. (마지막 4차시도) '''응우옌푹아인이 세운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 전국을 통일하여 지배하게 된다. '''
그리하여 남북분열의 기나긴 역사가 끝이 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열리게 된다.
4. 역대 군주
5. 둘러보기
[1] 청색은 광중제의 부춘조, 노란색은 태덕제의 귀인조이며 초록색은 완복영의 영역이다.[2] 1차수도이자 공식적인 수도.[3] 남북분열 시기[4] 응우옌 왕조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임시수도[5] 외왕내제.[6] 단, 단순히 평민출신은 아니고 일정부분 기반은 있었다.[7] 사실 한나라도 한 고제 사후로 여후를 비롯한 여씨일가가 한 동안 국정을 좌지우지했었고, 명나라도 홍무제가 공신들을 너무 많이 숙청하는 바람에 건문제가 삼촌들을 견제, 숙청하려다가 역으로 영락제에 의해 정권이 뒤엎어지는 혼란상을 겪었지만 어쨌거나 황실내의 내분이었기 때문에 왕조는 유지된데 반해서 떠이선 왕조는 유지되지 못했다.[8] 다만 나중에 와서는 중국인들과 등을 들리는 모습을 보인다.[9] 부춘의 경성이 귀인을 점령하여 완광보를 제후로 임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