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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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1. 개요
2. 역사
3. 여담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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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어 : Huế
한자 : 化[1]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트어티엔후에 성(省)(Thừa Thiên-Huế, 承天順化)의 성도이다. 도시 홈페이지

2. 역사


옛 이름은 푸쑤언(Phú Xuân, 富春)이다. 이전부터 응우옌 가문의 주 본거지였고, 1802년부터 1945년까지 베트남(완조)의 수도였다. 프랑스의 식민지배 시기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중부(안남)의 수도였고[2] 이전에 수도 기능을 하던 구시가지 외에 신시가지가 생겨나는 등 발전했다.
베트남 공화국 시대에는 직할시이자 베트남 군사분계선에서 고작 100km 떨어져 있는 최북단 접경도시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MACV(주월미군사령부)와 남베트남군의 1사단 본부가 위치한 곳이었고, 1968년 구정 공세 때는 베트콩과 월맹군이 1개월간이나 시를 장악하여 저항했다. 주로 전투는 북쪽의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남베트남의 학자, 지식인, 정치인, 공무원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살해당했으며[3] 전투에 투입된 미 해병대가 시내 대부분을 탈환했을 때에도 겹겹으로 방어선을 만들면서 결사항전했기에 미 해군의 함포사격까지 동원해야 했다. 이때의 함포사격으로 황제가 머물던 서양식 궁전 건중루를 비롯한 후에 황궁의 여러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90년대부터 베트남 정부에서 복원 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결국 미 해병대의 치열한 혈전을 치른 끝에 월맹군이 물러나게 되고[4] 1973년 이후 미군이 철수하고 남베트남과의 휴전협정이 파기되면서 북베트남이 다시 점령하게 된다.

3. 여담


  • 북베트남군베트콩에 의해 후에 대학살이 일어난 도시다. 베트남 전쟁 최악의 학살로 불리는 후에 대학살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강간 당하고 학살 당한 사건이며 그 희생자는 수천명에 달한다.
  • 시내는 흐엉강(Sông Hương 또는 Hương Giang[5]/香江[6]/Perfume River)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펼쳐져 있으며, 서울처럼 북쪽이 구시가, 남쪽이 신시가이다. 구시가를 이루는 후에 성(Kinh thành Huế, 京城化)은 바둑판처럼 구획되어 있으며, 후에 성 안의 후에 황궁(Hoàng thành Huế, 皇城化)과 더불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그 외에도 많은 역사적 기념물과 건축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인구는 약 34만 명이다.
  • 왕궁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보니 외국인 관광객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다만 베트남 전쟁 때 여기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폭격에 의해 후에 황궁은 많은 피해를 입어 소실된 부분이 많다.
  • 후에에서 베트남 전통 황실건축을 보고 싶다면 황궁보다는 응우옌 왕조의 4대 황제인 뜨득 황제의 능을 구경하길 바란다. 보존이 잘되어 있으며, 뜨득 황제가 직접 건설을 지휘하고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웅장한 사원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가장 인근 대도시라고 할수 있는 다낭(100km 정도 거리)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다낭은 남부의 호치민 시와 비슷한 느낌이 나고 도시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후에는 수도인 북부 하노이의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감성이 물씬 풍겨난다.
  • 베트남 사람들에게 '훼'라고 해야 잘 알아듣는다.
  • 후에에 공항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출발하는 직항은 없으며, 다낭으로 갔다가 버스, 기차 등을 이용해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노이나 호치민 관광 후 베트남 국내선을 이용해 이동할 수도 있다. 황궁의 경우 반나절 정도면 웬만큼 둘러볼 수 있으며, 2018년 기준으로 우리 돈 7500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흐엉강을 따라 보트를 타고 내려가면서, 강 주위에 있는 황릉들과 사원들을 내려서 관람할 수 있으나 오후 5시 정도에 문을 닫는 곳이 있으므로 오전부터 나서야 웬만큼 볼 수 있다. 뜨득 황제의 능의 경우 위에서 기술한 대로 단순한 능을 떠나 생전에 황제의 궁전으로도 기능했기 때문에 여러 시설들이 있는 편이라 관람에 시간이 살짝 걸린다. 티엔 무 사원에는 후에의 상징 중 하나인 7층탑이 있으며, 틱꽝득 스님이 생전에 머물렀고, 사이공으로 소신공양[7]을 하러 갈 때의 차가 전시되어 있다. 후에만의 쌀국수인 분보훼가 유명하니 들를 일이 있으면 먹어보는 것도 좋다.

4. 관련 문서


[1] 중국인들은 順化라고 한다.[2] 북부(통킹)의 수도는 하노이였고 남부(코친차이나)의 수도는 사이공(현 호치민 시)이었다[3] 한국전쟁때의 북한군의 인민재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4] 이때 활약한 것이 M50 온토스 자주무반동포인데, M48 패튼 전차보다 차체가 작아 시가지에서 원활한 기동이 수월하였고 106mm 무반동포 6문의 화력으로 월맹군의 진지등을 파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원들이 많이 선호했다고 한다.[5] 이를테면 한가람한강의 차이.[6] 이걸로 검색하면 홍콩이 나온다.[7]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서였다. 틱꽝득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