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웅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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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대전 대덕구)
선거구 개편
이인구[26]
윤성한[27]

제14대
김원웅


제15대
이인구
제15대
이인구

제16·17대
김원웅


제18대
김창수

대한민국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
제17대 전반기
임채정

제17대 후반기
김원웅


제18대 전반기
박진


대한민국 제14,16~17대 국회의원
광복회장
김원웅
金元雄 | Kim Won Ung

출생
1944년 3월 8일 (80세)
중화민국 충칭시
가족
김근수 | 모 전월순
학력
대전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 / 학사)
본관
의성 김씨
소속 정당

병역
병역면제(사유 불명)
가족
부인 진옥선, 슬하 1남 2녀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4, 16, 17[1]
현직
광복회
1. 개요
2. 생애
3. 비판
3.1. 종북 및 반미 행위
3.1.1. 2018년 12월 8일 반미종북 발언 논란
3.2. 군사 정권 부역 논란
3.3.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 허위 사실
3.4. 백선엽 비하
3.5. 문재인 정부 이명박근혜 비유 논란
3.6. 광복회장 정치중립 위배 논란
3.7. 생계형 당료 및 "백선엽 장군은 사형감" 막말 논란
3.8. 애국가 변경 주장
3.9. 국회 난입 논란
3.10. 광복회 예산 부당집행 논란
3.11. 부친 독립운동 허위 논란
3.13. 차기 대통령은 빨갱이가 되어야 발언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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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이며, 2019년 6월 1일부터 현재 광복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민주공화당 당료 공채로 1971년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정치입문은 민주정의당에서 했다. 90년대와 2000년대를 걸쳐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왔다갔다하여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의로운 종북'[2] 언급[3]과 여러 가지 구설수와 행보로 종북 인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20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역대 국군 참모총장과 건국인사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국립묘지 파묘 등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었으며, 6.25 전쟁이 민족해방전쟁임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과거 속기록도 공개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2. 생애


1944년 중화민국 충칭 시에서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열단의 연락원이었던 김근수와 광복군에서 정보 수집 등을 했던 전월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8.15 광복 후 그의 가족들은 중국을 떠나 귀국하여 충청남도 대전부로 이주하였다. 이후 대전고등학교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행적과 졸업까지 과정은 본인과 지인, 남아있는 자료, 본인의 프로필 등에 따르면 몇 가지 상충되는 내용이 있으나 언론 등을 통해 정리되는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김원웅은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재학했으나,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6.3 항쟁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었다.[5] 6.3 항쟁 당시 같이 투옥던 인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다. 이명박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본인을 제외하면 함께 투옥된 동료들이 전부 나중에 정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했는데, 김원웅 역시 그런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 투옥으로 연세대에서 제적되었다고 하는데, 김원웅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자퇴서를 쓰는 대신 선고 유예로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후 약 2년간 다시 입시를 공부하여 1968년경 다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과에 입학했다. 이후 졸업과 관련하여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국문과 입학 후 정치학과로 전과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1972년에 국문과를 졸업한 뒤에 정치학과로 학사편입하여 1974년 졸업했다는 것이다. 언론 기사에 따르면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
군대는 면제되었는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투옥 경력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선고유예되면서 실형은 살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다른 사유로 면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신 헌법이 발표된 1972년에 김원웅은 민주공화당 사무처 직원 공채에 응시, 합격하여 공화당 공채 7기 당료로서 근무를 시작했다. 김원웅은 훗날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 시절인 2001년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김원웅은 자신이 한일협정에 반대하긴 했어도 박정희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유진산이나 윤보선보다는 박정희가 비전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공화당을 선택했다고 술회했다. 1974년에 민주공화당 새세대문제연구회 조직부 차장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민주공화당 해외국 간사가 되었다. 1980년에는 민주공화당 청년국 국장이 되었다. 김원웅은 유신 정권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공화당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공화당이 해산할 때까지 당에 남아 당직자로 근무했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후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준비위원이 되어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했다.[6] 1981년 1월 민주정의당이 창당된 후 사무국을 거쳐, 1982년부터 민주정의당 정책국 부국장을 역임했으며, 1985년부터 민주정의당 조직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6년에는 민주정의당 헌법특별위원회 행정국장과 청년국장을 겸임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58번으로 출마하지만 낙선하였다.월간조선 2020년 10월호민정당, 62명의 전국구 후보자 명단 확정 발표[김성우]民正(민정) 全國區(전국구)공천 62명 발표 같은해 민주정의당 국책연구소 상근연구위원과 민주정의당 대전 동구 (을) 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이 전격 성사된 후 김원웅은 그간 20년 가까이 커리어를 쌓아왔던 당을 돌연 탈당하여 꼬마민주당에 입당했다. 김원웅이 갑자기 탈당한 이유는 당시 김원웅이 대전 동구 (을) 지구당 위원장이었는데, 3당 합당으로 자신의 지역구를 내주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대전 동구 을 지역구에서 전현직 국회의원을 번갈아 역임해오던 민주계(김영삼계) 송천영과 공화계(김종필계) 윤성한이 3당 합당으로 동시에 민자당 소속이 되면서 김원웅은 대전 동구 (을) 지역구에서 졸지에 3인자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합당 후 송천영과 윤성한 중 누가 공천을 따내게 될 것인가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 김원웅이 동구 을에서 공천을 따낼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려워 보였다.
이후 꼬마민주당은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개편, 신설된 대전 대덕구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자유당 이인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의원 뱃지를 단 김원웅은 국민학교 명칭이 일제강점기의 잔재라며 초등학교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에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대다수의 당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였으나, 김원웅은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잔류한 이기택, 노무현 등은 통합민주당을 창당했으며, 김원웅도 여기에 잔류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원웅은 통합민주당 후보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이인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4월 총선 패배 이후 통합민주당은 주류(이기택계)와 비주류 간에 계파 갈등이 극심해졌고, 결국 1996년 11월 비주류파인 김원기, 김정길, 노무현 등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조직했고, 김원웅도 통추에 합류했다. 통추는 통합민주당 당내 정당으로 불리면서 당 지도부와 사사건건 대립을 이어갔다. 당 지도부와 통추의 대립으로 민주당은 존립이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1997년 낙선한 박계동, 노무현 등 통추 멤버들과 함께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공동 창업하였다. 김원웅이 하로동선의 대표를 맡아 경영하였다. 김원웅은 훗날 인터뷰에서 1990년 꼬마 민주당 창당 시절부터 이기택이 당권을 장악했고 자신과 노무현 등은 비주류여서 이기택에 저항했고 결국 자신은 한나라당으로 입당하게 되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해명을 한 바 있다. #
하지만 이 인터뷰 내용과 달리 김원웅은 원래 꼬마민주당 초기부터 당내 이기택 계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이기택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었다. # 1995년 11월 민주당과 개혁신당과 합당 협상 때도 김원웅은 민주당 측 대표가 되어 이기택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의 대리자 역할을 했었다. 당시 민주당과 개혁신당간의 가장 큰 쟁점은 이기택이 새로운 통합민주당의 대표가 될 것이냐 여부였다. 김원웅은 이렇게 오랫동안 주류 이기택의 측근 역할을 해왔지만 1996년 총선 이후 이기택의 리더쉽이 당내에서 크게 도전을 받게 되자 낙선한 김원웅은 이기택 반대 세력(통추)에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 11월 IMF 사태 등으로 집권 신한국당이 사실상 와해되고 한나라당으로 재창당하자 김원웅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핵심 멤버들과 결별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김원웅을 제외하고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 등 통추의 핵심 멤버들은 대부분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다. 훗날 김원웅은 3김 정치 청산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한나라당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신한국당 내에서 그간 김원웅과 껄끄러웠던 김영삼계가 몰락하고, 김종필계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여 딴 살림 차리고 나가면서 대전 대덕 현직 의원 이인구도 함께 자민련 소속으로 당적을 옮기게 되어 신한국당-한나라당의 대전 대덕 지역구가 비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김원웅은 원래 자신의 친정이었던 한나라당에 대전 대덕구 지역구를 요구, 이를 보장받자 신속히 통추를 버리고 한나라당에 합류했다는 관측이 많다. 실제로 그는 한나라당 입당과 동시에 대전 대덕구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얼마 후 하로동선을 폐업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전 대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의원에 당선된 김원웅은 이후 반미, 친북 발언을 이어가며 당 지도부를 지속적으로 비난하여 당내외에 충격을 주었다. 한나라당 김원웅의원 반미발언 파문. 김원웅은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친미사대주의'로 규정하고, 주한미군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한나라당 지도부가 남북문제를 너무 대결구도로 몰아간다고 주장하면서 이회창 총재최병렬 의원 등 당 지도부를 '수구'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2001년는 TV 토론회에 출연하여 미국이 911테러의 보복을 하기로 결정한 것을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김원웅 의원의 이같은 돌출 행동을 이어가자 2001년 6월 국회 본회의 도중 같은 당 김용갑 의원과 설전을 벌이기까지 했다.[7]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던 시절인 2002년 7월에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대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불과 한달도 남지 않았던 2002년 11월 24일 오후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여론조사가 사실상 노무현의 승리로 결정되어 노무현 후보의 대선 승리 가능성이 급상승하자, 바로 당일인 11월 24일 오후 김원웅은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하여[8] 유시민이 창당한 개혁국민정당[9]에 입당을 선언했다. 국회의원이 한명도 없었던 개혁당은 김원웅의 입당으로 소속 현직 국회의원 1인을 보유하게 되었다. 11월 25일 개혁당 당사에서 김원웅은 입당기자회견을 가졌고, 입당과 동시에 개혁당 당대표 및 원내대표가 되어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지원하였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당선자 신분인 시절에 김원웅은 비공개 특사로 북한에 파견되어 민족평화축전 개최를 합의하고 돌아왔다. 이후에도 노무현 임기 중에 특사로 북한에 파견되었다.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하자 유시민 등 대다수의 당원들과 함께 개혁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전 대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 의지를 밝혔으나 실제로 출마하지는 못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했다.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4개 정당의 범야권 단일후보로 대전시장에 출마했으나 염홍철, 박성효에 밀려 3위로 광탈했다. 선거 참패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재야에서 계속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015년 NL계 통일운동가 등과 함께 '민주통일정치포럼'을 창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3월 13일 '민주통일연합 창당추진위'를 발족시켜 상임대표로 활동 중이다.
2019년 3월 국가보훈처 산하 단체인 광복회 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친북반미적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꺾고 광복회장에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원웅 신임 광복회장이 이념 전쟁을 주도하자 광복회 내부에서 반발이 나오고 있다. 결국 2019년, 김원웅 현직 광복회 회장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을 찬양하고 자유한국당을 폄훼하는 등 정치적 중립을 어긴 이유로 내부 상벌위원회에 제소되었다.
국회에서 애국가 제창을 거부하여 애국가 논란을 일으킨 이석기처럼, 2020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통해 민족 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뿐이라고 성토하여 애국가 논란이 화두로 떠올랐다. 이어 8월 24일에는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의 섭외로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을 찾아 "미래통합당은 토착 왜구와 한 몸" "원희룡 제주지사는 패역의 무리" 등의 막말을 내뱉는 회견을 진행했다. 문제는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것.

3. 비판



3.1. 종북 및 반미 행위


국회의원 활동 시절에도 논란이 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정계은퇴 이후만큼 극단적인 수준이 아닌 대북 유화정책을 주장했으나, 정치 활동을 접은 후에는 친북을 넘어서 거의 종북주의자같은 주장을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을 옹호하며## 문재인 정부까지도 북한에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있다. 문재인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 참배를 경박하다고 비난하면서 심지어 6.25 전쟁 당시 월남한 국민들을 친일파 청산을 피하려 온 사람들로 비하하고 있다.문재인 대통령도 친일? 김정은 맞이 세미나 “박근혜보다 金 좋아하는 게 개념 있어”
한국을 나치부역자와 같은 친일세력이 장악했으니 '6·25 민족해방 전쟁' 부인 못한다고 밝혔는데, 정작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재단의 토르 할보르센 대표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을 독일 나치에 가까운 국가로 본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북한을 옹호하고 한국을 부정하는 김원웅이야말로 해외의 시각으로는 나치의 만행을 정당화하고 연합군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식민지에 빌붙어서 동족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집권한 나라가 딱 두 나라라며, 하나는 패망한 월남(남베트남), 또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며 이게 나라냐고 일갈했다. 하지만 미제 식민지 한국을 '해방'시키겠다며 자칭 '해방전쟁'을 일으키고, 외세로부터 해방됐다고 주장하는 북한은 어째 세계 최악의 '현대판 노예 국가'로 선정되었다. 북한보다 훨씬 '살기좋은 나라'인 카자흐스탄은 물론, G2라 불리는 중국 국적을 지닌 조선족조차 불법체류라는 수모를 감수해가면서 한국에서 살고 있다. 실제 불법체류 신분의 카자흐스탄 노동자가 화재 현장에서 한국인들을 구해 '포상'으로 대한민국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
국회의원 활동 당시에도 반미 성향을 드러냈는데 한나라당 의원 시절에도 미군 철수를 주장했고# 열린우리당 입당 이후에는 노무현 정부나 여당 사람들에게도 한미동맹을 강조하거나 이라크 파병을 지지하면 숭미사대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과 인권을 비판하자 한반도를 평화 위해서라면 한미동맹을 포기할 수도 있다며 선택하라면 한미동맹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을 외세라고 부르며 한미동맹을 부정하고 있다. '한미동맹의 강화는 대미종속의 강화'라고 주장했고 '착한 동맹은 없다'며 한미동맹을 반대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사실 대한민국을 동맹국가로 생각 안한다. 졸개로 생각하지'라고 말하며 한미동맹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3.1.1. 2018년 12월 8일 반미종북 발언 논란


김정은을 ‘위인’이라고 부르는 ‘위인맞이 환영단’은 8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 향린교회에서 ‘왜 위인인가’를 주제로 공개세미나를 열었다. 김원웅 전 통합민주당 의원(현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회장)은 이날 세미나에서 “박근혜를 좋아한다는 사람보다 김정은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훨씬 개념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14, 16, 17대 국회에서 3선을 지냈다. 20여명이 참석한 이날 세미나에서 그는 축사를 했다. 김 전 의원은 “일본에 충성을 다 하겠다고 하고 혈서를 쓴, 독립군 토벌에 앞장 선 집안에서 큰 박근혜보다 일제강점기에 항일 무장 투쟁한 독립운동가의 가문에서 자란 김정은이 더 낫다”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은 히틀러 후손이 독일에서 대통령이 된 것과 진배없다”고 했다. 그는 “한미동맹은 거짓말이다. 미일동맹에 남한을 종속시킨 것이 한미동맹의 핵심”이라며 “친일의, 친일에 의한, 친일을 위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게 나라냐. 이런 나라를 지킨다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느냐”고 했다. 김 전 의원은 또한 ‘김정은 찬양’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은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을 상당히 갖추고 있다고 알고 있다’는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고, ‘김정은이 솔직담백하고 예의 바르다’는 게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위대한 이상가다’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도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지 왜 하지 않느냐”고 했다.

3.2. 군사 정권 부역 논란


일단 김원웅은 본인부터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던 민주공화당에서 당료 생활을 시작했고,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했던 인생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본인은 대학 졸업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애시당초 본인의 신념에 반하는 정치 생활을 생계형으로 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이는 백선엽 등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친일반민족행위자 대부분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조국이 일본 제국이라고 교육받아왔고, 생계 유지와 어느 정도의 입신을 위해서는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들이 철없던 20대 몇 년간 가담한 일부 친일반민족행위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이고, 김원웅이 20대부터 장장 20년 가까이 군사독재 정권의 집권 여당에 부역한 행위는 생계형으로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란 말인가? 결국 김원웅의 논리를 한마디로 하면 내가 한 독재정권 부역은 생계형, 니가 한 일제 부역은 친일파

3.3.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 허위 사실


2020년 8월 15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이승만이 친일파와 결탁하여 대한민국은 민족 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는 논조의 기념사를 발표했다. #
해당 기념사는 전국 시도 광복절 기념식에서도 대독(代讀)되었는데, 이 대독 연설문 가운데에는 "이승만이 집권해 국군을 창설하던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무려 21대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고인에 대한 명예 훼손의 소지가 있다. 건국 초기 육군참모총장 가운데서는 일본군 복무는 했으되 독립군 토벌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학병이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 않은 사람도 다수 있으며, 아예 일본군 복무를 하지도 않은 사람도 1명(노재현)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 발언에 대해 "역사적 사실에 관한 발언일 뿐", "광복회장의 발언에 국방부가 나서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등의 익명 발언만 내보냈을 뿐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대통령 및 집권 세력이 친일 청산을 강하게 주장해왔고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세력들을 그간 적폐청산 명분으로 계속 척결해왔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는 것이 합당한 해석이다. 김원웅의 연설문을 미리 보고도 광복절 축사를 시켜주었던 청와대는 이 같은 행보에 영향을 받았는지 김원웅의 발언은 청와대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 국방부는 25일에 가서야 정경두 국방장관이 "역대 육군참모총장 중 일본군에 복무한 사람이 있기는 있으나, 6.25에서 나라를 구한 것도 있으니 종합적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공식 반응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당대표 후보는 광복회장으로서 그정도 말할 수 있다며 차분하게 따져보지 않고 호들갑을 떤다면서 김원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또 김원웅이 주장한 파묘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기에 여권이 하고 싶은 말을 총대 메고 김원웅이 대신 해줬다는 평가도 있다. 정의당 원내대표는 김원웅의 광복절 기념사에 대해 무엇 하나 틀린 말 없는 기념사라며 안익태와 박정희, 백선엽은 모두 명백한 친일 행위가 확인된 반민족행위자들이므로 '무덤 파내자'고 주장하며 어떤 국민이 반대하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원웅의 이 기념사는 명백하게 틀린점이 또 있다. 한국이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라는 말도 명백하게 거짓이다. 일단 김원웅이 전세계 200개 국가들을 다 뒤져봤는지는 차치하고서 북한만 보더라도 김일성 초대 내각 중 16명이 친일파였다. 심지어 북한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도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 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텔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주시었다."라고 적혀있을 정도다. 당장 김일성의 친동생이자 부주석이었던 김영주도 일제시대 관동군 출신이며, 북한 초기 정권 서열 10위권의 여러 인사들(장헌근, 김정제, 조일명)등이 친일파 출신이었다. 그와 달리 한국의 초기 내각은 이승만 본인부터가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대통령 출신이었고 부통령 이시영도 임시정부 내무총장 출신이며 초대 국방장관 이범석은 광복군 참모장 출신이고 지청천 무임소장관도 광복군 총사령관 출신이다. 사실 이승만 초기 내각에서 친일파 출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후에 반민특위 등이 무산되면서 한국 사회내에 제대로된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건 사실이나 마치 한국은 청산을 못했지만 북한은 친일파를 청산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명백한 거짓이다.
민족반역자라는 단어의 의미대로라면 동족간 대량학살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그 자손이야말로 민족반역자에 가장 부합되는 대상이다. 광복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게 된 사건이다.

3.4. 백선엽 비하


백선엽은 사형감이라며 업적이 과장됐다고 폄하했다. 김원웅이 평가절하한 백선엽에 대해서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이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선엽 장군을 영웅이고 보물이라고 하자 격노하여 오만방자한 에이브럼스, 조선 총독 연상시킨다며 공식 항의를 추진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원웅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공식인정'하며 추켜세운 김일성은 정작 김원웅이 찬양해 마지않은 김원봉에 대해 8월종파사건으로 숙청하면서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열단의 업적이 과장됐다는 평가도 있으며, 중국에 빌붙어 중국 공산당 자금으로 조직되어 오직 중공의 이익을 위한 조선족 꼭두각시는 아니냐는 비판이 있고 김원웅에게 인증받은 '항일영웅' 김일성이 '중국 간첩' 명목으로 김원봉을 숙청했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하는데, 대개 독재자가 그렇듯 '누명'을 씌워 제거했다는 평가이나 김원웅이 김정은을 추켜세웠던 이유가 '김일성 가문'에서 자랐다는 이유 때문이다. 헌데 박헌영을 '미 제국주의의 고용 간첩'이란 혐의를 씌워 저세상으로 보내고 김원봉도 마찬가지라면, 그런 곳에서 배우고 자란 김정은은 '위험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고모부 장성택을 중국 간첩 혐의를 씌워 제거했다.

3.5. 문재인 정부 이명박근혜 비유 논란


2017년 9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약 4개월이 지난 상황에서 본인 트위터에 우리 군이 ‘김정은 참수부대’ 창설에 착수했다는 내용의 인터넷 기사를 공유했다. 그러면서 “북에서도 문재인 참수부대 창설하면 어떻게 하나?”라며 “완전히 이명박근혜의 길로 가네. 다시는 김대중·노무현 팔지 마라”고 친북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문재인 정부까지 강력하게 비난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부가 유사시 김정은 등 북한 지휘부를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육군 특수임무여단을 창설한 것을 강하게 비난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발족하면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뒤를 잇는 제3기 민주 정부라고 자처한 점, 그리고 실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역시 대북 화해 정책과 동반해 국방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인 점을 감안한다면 김원웅의 친북적 색채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3.6. 광복회장 정치중립 위배 논란


친북 반미적 행적에도 광복회장에 당선되어 논란이 되었다.[10] 광복회 내부적으로 선거로 인해 소란을 겪고 있다.[11] 그 중심에 선 인물이다. 정치에 관해 그동안 개입하지 않았던 광복회의 신임 광복회장이 이념 전쟁을 주도하자 후손 중 내부의 정치성에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총선을 계기로 하여 김원봉의 서훈을 위해 보훈법을 개정을 주도한다는 소식을 언론에 전했다.
2019년 10월 18일, 이석기를 찬양하고 자유한국당을 폄훼하는 등 정치적 중립을 어기고 있다는 이유로 광복회 내부 상벌위원회에 제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회 정관#s-1에는 정치적 중립이 명시돼 있다. 국가보훈처도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제14조에 따라 각 단체는 특정 정당의 정강을 지지, 반대하거나 특정 공직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등의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다"며 "이에 따라 정치 중립 위반 여부를 검토해보고 그 결과에 따라 상응한 관리·감독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 [12] [13]

3.7. 생계형 당료 및 "백선엽 장군은 사형감" 막말 논란


2020년 8월 15일 광복절 75주년 기념사에서 그는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를 민족반역자로 지칭하고 백선엽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것을 비판했다. 이어 "친일반민족세력이 민족 자주적 역량의 결집을 방해하며… 미래로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현충원에 매장된 친일 행위가 있는 사람들을 파묘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되었다. 이들의 친일 행위가 문제가 되는건 사실이나 동시에 이들로 인해 한국이 여기까지 성장한 것도 맞으니 파묘는 보류해야 한다는 여론과 아무리 공적이 있다고 해도 친일의 원죄는 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뉘고 있다.
이어 8월 17일에도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KBS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백선엽 장군은 사형감[14]”,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를 베꼈다”고 거듭 주장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 친일 미청산의 중심에는 이승만이 있다고 하며 "갈등의 원흉"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관계를 도외시한 일방적인 주장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이 문제이다.
  • 백선엽의 제1사단은 6월 27일까지 격전을 벌이면서 개성특별시-문산읍에서 퇴각해 봉일천 일대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김홍일 소장은 민기식 대령 등 육군본부 작전지도반과 함께 사단을 방문했는데, 이때 백선엽김홍일에게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한강 방어선으로의 퇴각을 건의해줄 것을 요청했고 김홍일도 이에 동의하며 육군본부 복귀 후 해당 사항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 주공이 미아리 전선을 돌파해 서울 함락이 임박했기 때문에 육군본부는 제1사단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수원으로 퇴각해버렸다. 곧이어 28일 새벽에는 한강 인도교 폭파가 이뤄지면서 제1사단이 그대로 위치를 고수하다가는 한강 북안에서 퇴로가 막혀 사단이 전멸할 위기에 봉착했다. 김원웅의 주장은 이런 혼란 상황에서 그대로 명령을 기다리고 앉아있다 부대가 전멸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군사학의 기본도 모르는 소리이다. 그나마 제1, 5, 7사단을 비롯한 한국군의 잔존 병력들이 행주, 이산포, 한남동, 서빙고, 뚝섬, 광나루 등지에서 나룻배로 한강 남안으로 퇴각하고 이들이 김홍일시흥지구전투사령부 하에서 방어태세를 정비함으로써 국군은 한강 방어선에서의 귀중한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 애국가가 불가리아 곡 〈도브루자의 땅이여(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를 표절했다는 이야기는 불가리아계 미국인 니콜로프의 주장이었으나, 이후 연구를 통해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판명났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이에 대해 각종 소셜 미디어에서는 정작 김원웅 자신이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공채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유신 시대를 보내고 이후 제5공화국 시절에는 전두환민주정의당에서도 일하며 사실상 '군사독재에 부역'을 했는데도 이에 대한 해명은 없이 과거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만 공격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1 이 문제가 이슈화되자 그는 이런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세상을 모르고 역사도 잘 모르던 시절에 벌인 “생계형” 활동이라고 강변했다. 미래통합당 김은혜 대변인은 “(민정당 근무 등) 부역의 역사가 들통나자 ‘생계형’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의 벅찬 광복의 역사를 이끌어야 할 자리에 ‘생계형’은 맞지 않다”고 꼬집었다.
참고로 이렇게 친일이라면 학을 때는 사람이 정작 친노시절부터 신기남이나 김희선 등과는 잘만 어울려 지냈다. 심지어 신기남부친 친일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결국 본인이 그 문제를 부끄럽게 생각하느냐 자랑스럽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거취문제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며 직접적인 사퇴를 권하지 않고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백선엽에 대해서는 온갖 비판을 다 했던 사람이 단순한 친일파가 아닌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한 악질적인 케이스에 대해서는 강하게 질타하긴커녕 애써 외면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편 친일은 착한 친일, 남의 편 친일은 나쁜 친일이라는 것.

3.8. 애국가 변경 주장


2020년 8월 20일에는 애국가가 친일, 친나치 성향의 인물 안익태가 작곡한 곡이라는 이유로 국가(國歌)를 바꾸자는 발언을 하여 다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 결국 11월 9일 안익태의 유족에 의해 법정행이 예정되었다.[15][16]

3.9. 국회 난입 논란


김원웅 광복회장은 2020년 8월 24일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미래통합당은 토착왜구', '원희룡 지사는 패역의 무리' 등의 궤변을 쏟아내 논란이 되었다.[17] 더 큰 문제는 김원웅은 기자회견을 신청한 적이 없었다는 것. 기자회견을 신청한 사람은 최강욱[18]이었다. 참고로 최강욱은 김원웅의 회견장을 나갈 때 동행하였는데 최강욱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

3.10. 광복회 예산 부당집행 논란


국가보훈처에서 준 2억원을 김원웅 광복회장이 부당하게 예산집행했다면 징계조치 당하는 것이 국회를 통해서 밝혀졌다.#

3.11. 부친 독립운동 허위 논란


김원웅 예산 부당집행과 맞물려 부친 김근수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련 기록이 전무하다고 광복회 대의원들이 해명을 요구했다. # 권준 장군의 후손인 권영혁 씨, 김상윤의 후손인 김기봉 씨, 전기홍의 후손인 전영복 씨는 "김근수 지사의 의열단 입단 근거를 제시하고, 광복군 활동 기록에 김원웅 회장 부모의 기록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권영혁 광복회 대의원 등은 김 회장에게 여러 차례 직·간접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진위를 밝히라고 얘기했고, '9월 말까지 답변하라'는 내용증명까지 보냈지만 묵묵부답"이라며 "그래서 결국 청원을 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청원은 광복회의 명예를 위해 제기한 것으로, 한 개인을 음해하거나 모욕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근수는 1912년 9월 27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고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중국으로 건너간 뒤 1935년에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40년 대한광복군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했다고 알려져 있다. # 그러나 의열단은 1927년에 난창 폭동에 참여한 여파로 와해되었다. 그 때 의열단에 가입하였다고 주장했다는건 시간의 앞뒤가 안 맞는다. 또한 김근수 지사가 광복군에서 참가했다고 스스로 밝힌 사실조차 사학계 고증이나 검증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논란이 깊어지고 있다. 독립운동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는 "김원웅 회장의 부모 이름이 나오는 사료들은 근거 자료가 아닌 구전에 의한 것으로 불명확하다"며 "두 사람이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직접적인 근거라고 볼 순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임시정부 직원권속 교포명책'(임시정부 직원 및 가족, 현지 교민 명단)을 "김 회장의 부모가 광복군이 아니라는 증거"라며 제시되기도 했다. 이 책에는 여기엔 왕석(김근수의 이명), 김희(전월선의 이명), 왕원웅(김원웅의 이명) 등 김 회장 일가의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명단은 임시정부 직원 및 현지 교민의 명단을 기록한 것인데 광복군은 적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원웅 회장 일가는 더군다나 임시정부 직원도 아닌 현지 교민이었기 때문에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권영혁 광복회 대의원은 "김원웅 회장 측은 그동안 부모가 임시정부 직원이 아닌 광복군이라고 주장해왔다"며 "광복군은 당시 중국군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명부에는 등재돼 있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한시준 교수 역시도 "임시정부가 광복 이후 귀국행 비행기를 마련하기 위해 그곳에 살던 교포들 명단을 작성해 중국 정부에 제출한 것"이라며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적은 게 아니다"고 말했다. #

3.12. 연평도 해역 공무원 피격 사건 관련 발언 논란


북한이 우리 국민을 피격한 사건을 두고 친일 세력의 행태가 이번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주장한 것도 모자라 피살된 공무원이 월북자라고 단언하였다. 김 회장은 이날 성명에서 "그간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하여 존재해온 세력이 끊임없이 민족을 이간시키고, 외세에 동조하면서 쌓아온 불신이 이번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밝혔다. #

3.13. 차기 대통령은 빨갱이가 되어야 발언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에서 열린 특강에서 민족주의를 거론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매도하는데,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한다, 따라서 태극기 부대로부터 빨갱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다음에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의 망언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미국은 한국을 졸개로 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8번)


낙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대전 대덕)

33,393 (42.41%)
당선 (1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대전 대덕)

26,090 (32.25%)
낙선 (2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대전 대덕)

29,034 (34.19%)
당선 (1위)
[19]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전 대덕)

47,062 (50.75%)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대전 대덕)

21,331 (30.05%)
낙선 (3위)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전광역시장)

137,751 (23.28%)
낙선 (3위)

상당히 당적 변경이 많다. 제2의 피닉제가 될뻔했지만 18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패배하여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광복회 회장에 취임하며 상기된 대로 과격한 종북 발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
박정희의 정당인 민주공화당에서 정계에 입문하였고, 전두환의 정당인 민주정의당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이후로는 민주당계 정당에 몸을 담았으나, 군사정권에 부역한 이력 탓에 민주당계 정당에서 중용되지 못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72 - 1980
정계 입문

1980 - 1981
정당 해산

1981 - 1990
창당

1990
합당[20]

1990
탈당

1990 - 1991
입당

1991 - 1995
합당[21]

1995 - 1997
합당[22]

1997 - 2002
합당[23]

2002
탈당

2002 - 2003
입당

2003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

2003 - 2007
창당

2007 - 2008
합당[24]

2008
합당[25]

2008 - 2010
당명 변경

2010 -
탈당
정계 은퇴

6. 둘러보기






[1] 당시 지역구는 대전광역시 대덕구.[2] "일제 식민지와 독재를 비판하면 그것이 종북이고, 분단극복을 하고 민족통일을 지향하면 그것이 종북이라면 저는 서슴치 않고 종북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이런 종북은 정의로운 종북이다" 발언[3] 서울의 소리 기사http://www.amn.kr/11984[4] 다만 김근수와 전월순의 광복군 활동 행적이 전무하다며 광복회 회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상황이다.[5] 201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일협정반대운동 구술사료수집사업.[6] 알려진 바와 같이 신군부는 기존 공화당 당직자들을 대거 데려와 민정당을 창당했다.[7] 2001년 6월 남북 관계를 놓고 당이 너무 대결구도로 몰아간다는 김원웅의 발언에 김용갑이 "당에 왜 찬물을 끼얹느냐? 그러려면 나가!"라고 일갈하자 이에 발끈한 김원웅이 "내가 왜 나가! 낡은 사람들이 나가야지!"라고 맞받아쳤다.[8] 여담으로 이 당시 조선일보 만평을 보면 이회창 당시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한나라당 주요 인사들이 "앓던 이가 빠졌다!"면서 김원웅 의원 탈당식을 성대하게 열어주는 것으로 나온다.[9] 개혁국민정당은 노무현이 유시민에게 난파선(새천년민주당)에서 피신할 배를 만들어달라는 유청을 한 후 유시민의 주도로 창당되었다.[10] 사실 김원웅이 열린우리당 의원 출신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인 친북 반미 성향으로 문재인 정부에서도 김원웅이 아닌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광복회장 선거에서 밀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다.[11] 광복회장 선거에서 김원웅 지지자들은 이종찬을 전두환 정권 부역자라고 비난했는데 사실 김원웅도 민정당 출신이다.[12] 박삼득 보훈처장이 1차로 구두 경고했다고 발표하자 경고받은적 없다며 광복회는 보훈처에 떠나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13] 게다가 김원웅은 예비역 장성 출신인 박삼득 처장이 임명되자 임명을 철회해달라고 청와대에 요구한적이 있었다[14] 혼동의 여지가 있는데, 인터뷰 원문을 보면 친일파라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6.25 개전 초기에 상부에서 철수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무단으로 1사단을 거느리고 한강 남쪽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그때 사형에 처했어야 한다는 게 김원웅의 주장이다.[15] 그러나 여론이 안익태의 유족에게 호의적이지는 않다. 애국가를 바꾸자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개인 의견으로 찬반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안익태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위는 명백한 팩트인 데다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족들의 주장대로 안익태가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김원웅이 아니라 친일인명사전 편찬자들을 상대로 먼저 소송을 해서 승소해야 할 것이다. 다만 친일인명사전 자체가 객관적이기 보다는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편향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유족의 대응이 일반 대중들에게 친일 청산 실패의 부작용을 어필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유족의 주장을 들어보면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도 상당부분 일리가 있기에 판결이 그렇게 나온 것이다.[16]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안익태가 아니라 윤치호가 작사에 크게 도움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물론, 윤치호가 친일민족반역자라는 것 때문에 애국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지만 애시당초 3.1운동 당시에 애국가를 따라서 불렀고, 김구조차도 그 당시 임시정부 시절에 애국가 논란을 겪었지만 본인이 "우리가 3·1운동을 무엇으로 했는가.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했는데 그 작사자가 왜 문제인가?"라고 일갈했었기에 친일청산을 외치는 김원웅에게 다소 논란거리가 있는 발언이다.[17] 게다가 마스크도 쓰지 않아 더욱 논란이 커졌다.[18] 정작 최강욱 본인은 기자회견장에서 회견을 진행하거나 심지어 기자회견장에 서 있지도 않았다. 사실상 최강욱 이름으로 김원웅이 대리 회견을 진행한 셈.[19] 2002년 탈당
개혁국민정당 입당
[20]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과의 합당[21] 신민주연합당과의 합당[22] 개혁신당과의 합당[23] 신한국당과의 합당[24] 열린우리당의 흡수 합당[25] 민주당(2007년)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