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바 아츠노리
1. 개요
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 선수 경력
2.1. 프로 데뷔 이전
고등학교 3학년때 치른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 아이치 대회 준결승에서 스즈키 이치로를 내세운 아이치공대 부속 메이덴 고교 에 4-5로 석패하는 바람에 고시엔 무대는 고등학교 3년동안 밟아보질 못했다. 졸업 후에는 호세이대학 경영학부에 입학하며 야구를 계속했고 1993년 봄 대회에서 주전 1루수로 활약했다. 같은해 열린 제 22회 미일 대학야구 대표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4학년때는 팀의 4번타자로 활약. 호세이대학의 추계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 해에 도쿄 6대학 야구 춘계리그 베스트 나인, 2년 연속 미일 대학야구 대표팀에 선정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학 졸업 후 1994년 드래프트 회의에 참가하였고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3순위에 지명하였다.
2.2.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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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이후에는 외야수 훈련에 초점을 맞추었고 개막 엔트리에는 진입하지 못했으나 6월 21일 히로시마전에서 대망의 1군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 첫 타석에서 홈런을 쏘아 올렸다. 시즌 시작을 늦게 힌 탓에 규정타석을 채우진 못했지만 타율 .307 8홈런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1996년에는 주전 외야수로 도약하며 규정타석 3할을 기록해 2년차 징크스도 무색하게 할 활약을 보였다.
이후 부상 여파로 고생한 98~99년을 제외하면 기복이 있긴 했으나 나름대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특히 야쿠르트가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2001년에는 타율 .311 25홈런 90타점으로 활약하며 데뷔 첫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2004시즌 종료 후 FA권리를 행사하며 메이저리그 진출까지 모색하기도 했으나 그를 불러주는 곳은 없었고 한때 트라이아웃을 통해 입단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메이저 진출은 포기. 2005년 2월에 닛폰햄 파이터즈 입단에 협의하며 홋카이도로 떠났다.[1]
2.3.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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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첫해 125경기에 나서서 타율 .271 15홈런으로 2004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성적으로 시작했다. 2006년에는 야쿠르트 시절부터 사용했던 등번호인 41번을 달았고 2001년 이후 모처럼 3할타율에 복귀하는가 하면 커리어 최다인 26홈런을 때려내며 닛폰햄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 활약상은 가을야구에서도 이어져 일본시리즈 MVP까지 수상하는데 이르렀고 데뷔 첫 골든글러브까지 받게되었다.
2007년에는 .337의 타율로 수위타자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2009년까지 3할타율을 기록하며 4년 연속 3할을 기록했다.
2012년 개인 통산 250홈런과 2000안타, 1000타점, 2000경기 출전을 달성하였다.
2013년 시즌 전 40대의 몸으로 wbc 대표팀에 발탁되었고[2] 네덜란드전에서 홈런을 쏘아올리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리그에선 에이징 커브를 직격으로 맞으며 성적이 급락했고 2014년 왼 무릎 수술을 받고 7월 무렵 복귀하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해 9월에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릭스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선 대타로 나와 적재적소에 적시타를 쳐서 팀을 파이널 스테이지로 이끌었으나 결국 소프트뱅크에 막혀 일본시리즈 진출은 끝내 좌절되었다. 결과적으로 파이널 스테이지 일리미네이션 게임이 이나바의 은퇴경기가 된 셈.
3. 은퇴 이후
은퇴 직후인 2015년에는 TV아사히 홋카이도 테레비의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5년 초에 열린 평가전에서 대표팀의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경력도 쌓기 시작했다. 그해 말에 열린 제 1회 프리미어12에도 타격코치를 역임했다.
2016년에도 대만, 네덜란드, 멕시코와의 평가전에서도 코치로 발탁되었고 2017 wbc에서도 코치직을 역임하면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전임자였던 고쿠보 히로키가 2017 wbc를 끝으로 사임하자 차기 감독으로 물망에 올랐고 7월 31일에 일본 야구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4.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다
감독 취임 후 처음으로 나서게 된 대회인 2017 APBC에서 3전 전승을 거두며 초대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감독 취임 이후 첫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2018시즌이 끝나고 치러진 미일야구 올스타전에서도 도합 5승 1패를 거두는 등 그럭저럭 무난히 감독직을 수행하는 모습이다.
2019 프리미어12를 앞두고 선수 선발에서 의문점을 자아내기도 했다. 시즌내내 애니콜이었고 4점대로 다소 부진한 타구치 카즈토를 발탁하고 1할 9푼이라는 절망적인 타율임에도 단지 주루 능력만 믿고 소프트뱅크의 슈토 우쿄를 데려가는 등 뽑아 갔어야 했나? 싶은 선수 선발로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2회 대회를 우승하면서 우려를 불식시켰다.
아니 오히려 2017 APBC의 우승주역들인 속칭 '이나바의 아이들'이 대회에서 쏠쏠하게 활약했다. 타구치는 롱릴리버로 나서서 깔끔한 투구를 보여주었고 이마나가 쇼타는 예선에선 투구내용이 나빴으나 슈퍼라운드에서 호투하며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다. 야마사키 야스아키 역시 대회기간동안 대표팀의 9회를 원천봉쇄하며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다. 겐다 소스케도 호주전 결승 스퀴즈 득점과 안정적인 수비로 대표팀을 든든히 지탱하였다.
그리고 17년 '이나바의 아이들'의 멤버는 아니지만 발만 믿고 발탁한 슈토 우쿄는 신들린 주루 플레이로 호주전 역전승의 주역이 되며 단기전에서 대주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켰다.
어쨌든 현재까지의 감독 이나바는 대체적으로 평가가 좋은 편. 특히 일본이 국제대회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일전에서 아직까지 패배가 없다는 점이 고평가의 주요 원인이다. 그것도 하라보살처럼 빅볼로 조져대고 있어서 더더욱 고평가 받고 있다.
5. 플레이 스타일
거의 매년 10~20개의 홈런을 기록할 수 있는 장타력을 보유함과 동시에 규정타석 3할을 6번 기록하고 2007시즌 수위타자 타이틀에 오를 만큼 기본적인 컨택 능력은 좋은 편이다. 특히 왼팔을 몸에 딱 붙이면서 나오는 특유의 스윙 덕분에 몸쪽 공에 강한 타격을 선보인다. 한때 닛폰햄시절 한솥밥을 먹던 신조 츠요시가 "이나바는 몸쪽 공 치는데는 천재적이다."라며 감탄하기도. 야쿠르트 제적 시절에는 패스트볼 계열에 강점을 보인 반면 변화구에 약점을 노출했으나 닛폰햄 이적 이후에는 변화구 대처 능력도 많이 좋아졌다. 특히 커브볼 대처 능력이 무지막지하게 좋았다. 또한 야쿠르트 시절엔 좌투수 상대 타율이 .232로 좌상바 기질이 막연했으나 닛폰햄 이적 이후 2010년까지의 기준으로 좌투수 상대 타율이 .295를 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야쿠르트 시절 부족했던 점들이 닛폰햄 이적 후에 개선된 경향.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2006~2009년까지, 1루수 골든글러브를 2012년에 수상한 실적이 있는 만큼 수비력도 나쁘지 않았다. 외야 수비시 위치판단 능력이 좋으며 우익수로 출전한 2002년, 2006년에 리그 외야수 레인지 팩터 1위에 오르는 등 수비 범위도 넓은편이었다.
리그 외야수 보살 1위를 2차례 기록할만큼 송구 능력도 탁월하다. 멀리던지기 기록이 80미터에 그칠만큼 강견은 아니지만 송구동작이 상당히 민첩하고 송구 정확도가 좋아서 평범한 어깨를 가지고도 많은 보살을 기록할 수 있었다.
도루 시도 자체는 적지만 1루까지 3.96초, 3루까지 11.45초를 내달릴 만큼 느린 주자는 아니다. 평소 공수교대 때에도 전력질주를 하는 만큼 주루플레이에서도 전력을 다해 뛴다고.
6. 여담
- 오른쪽 뺨에는 마치 화상 자국과 같은 흉터가 있는데 이나바 본인이 저서에서 원인 불명의 자국이라고 밝혔다.
- 프로필 상에는 좌투좌타라고 명시되어있으나 젓가락질, 필기는 오른손으로 한다. 골프를 칠 때도 오른쪽으로 친다고...
- 한때 근시였던 탓에 시력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콘택트 렌즈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야쿠르트 입단 이후에 라식수술을 받으면서 시력을 회복했다.
- 통산 사구가 138개로 이는 좌타자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1위는 요미우리의 아베 신노스케.
- 유년 시절 조금이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쉽게 울음을 터뜨리는 유약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 탓에 학창시절 왕따를 많이 당했다고. 중학교 재학 당시 상급생에게 담배 셔틀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담배를 사러가는 이나바의 행동이 아버지에 알려졌고 아버지는 이나바를 엄하게 훈계했다. 이때 훈계를 당하면서 "강하게되어야한다"는 결심이 섰고. 이후 자신을 괴롭혔던 학교 선배와 담판 을 벌였고 이것을 계기로 더이상의 왕따는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 개인보다 팀 플레이를 중시하는 경향인데 2000안타를 달성했을때 코멘트를 보면 "딱히 마음먹고 노린 것은 아니었고, 득점 찬스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려는 마음 뿐이었다."며 2000안타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고 이어서 "2000개의 안타를 때리려고 시즌을 치르는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감독님을 헹가래하기 위해서(우승을 하기 위해서) 시즌을 치르는 것이다.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고 개인 성적은 뒷전이다."라는 코멘트로 답했다. 여담으로 2000안타를 때려낸 공은 잃어버렸다고...
- 현역시절 경기 전에 동료들과 캐치볼을 할 때 일부 좌투수들의 투구폼을 흉내내서 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 닛폰햄 이적 후 첫 시즌인 2005년을 제외하면 줄곧 등번호 41번을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41'이 자신의 이니셜 'AI'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 좋아하는 음식은 감자칩. 비시즌에는 하도 감자칩을 많이 먹어대는 탓에 체중조절이 안될때가 있다고 한다. 은퇴 시즌인 2014년 1월엔 감자칩을 엄청나게 먹어댄 탓에 본래 체중인 94kg에서 100kg 이상까지 늘어난 사례도 있다. 이러한 체중 변화를 억제하기 위해 저칼로리 감자칩을 먹으면서 체중조절을 한다고 한다.
[1] 현재까지 닛폰햄 구단의 유일한 타팀 출신 FA영입 사례다. 외부 영입으로만 따지면 츠루오카 신야라는 사례도 있지만 츠루오카는 닛폰햄에서 데뷔하고 타 팀으로 갔다가 다시 리턴한 케이스.[2] 그것도 소속팀에서는 플레잉코치신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