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나카 노부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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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다이에 시절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만 뛴 호크스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이다. 2020년 시점까지 일본 프로야구 최후의 타격 트리플 크라운 타이틀 보유자이며, 헤이세이 시대에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유일한[2] 선수이다. 또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3년 연속 120타점(2003 ~ 2005년)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2006년 NPB 일본인 선수로서는 사상 최장기간인 7년의 장기계약을 맺은 뒤로는 먹튀라 불러도 할말없을 극심한 기복을 보여줘 끝이 좋지 않게 호크스를 떠난 선수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야츠시로 제일고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야구팀인 신일본제철 키미츠에 입단하였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결승전에서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동점 만루 홈런을 기록했지만 팀이 패배하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을 마치고 드래프트에 참가해, 당시 존재하던 역지명제도를 통해 올림픽 대표팀 동료이던 이구치 타다히토와 함께 대형 야수 유망주 듀오로 다이에 호크스 유니폼을 입는다.[3]
1997년 신인 첫 해에는 나무배트 적응[4] 에 애를 먹으며, 1군 20경기 출장, 홈런 0, 타율 .209에 그친다. 1998년에는 1군 34경기 출장, 프로 데뷔 홈런을 포함해 3홈런을 기록했다.
1999년에는 본격적으로 1루수 주전으로 정착했다. 23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퍼시픽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5]
200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전성기에 돌입. 데뷔 첫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했고 2년 연속 리그 우승[6] 에 기여했다. 타율 .312, 33홈런, 106타점으로 시즌 MVP에 선정되었다.
2001년에는 타율 .334, 36홈런, 122타점을 기록. 44홈런을 친 4번 고쿠보 히로키, 30홈런 타자인 조지마 겐지와 이구치 타다히토 등과 함께 203개의 팀홈런을 합작했다. 하지만 리그 우승은 다이에보다도 더 막강한 클린업을 자랑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에 내주었다.
2002년에는 타율 .260, 28홈런, 83타점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시범경기에서 시즌 아웃 부상을 입은 고쿠보의 4번타자 자리를 차지하여 타율 .324, 30홈런, 123타점을 기록했다. 123타점은 본인의 첫 타격 타이틀이다. 팀은 이구치 타다히토-마쓰나카-조지마 겐지-페드로 발데스의 '100타점 4중주'가 고쿠보의 부상 공백이 무색하게 장타를 가동했으며 무라마츠 아리히토, 가와사키 무네노리, 시바하라 히로시 등의 똑딱이들과 시즌 도중 영입된 훌리오 줄레타도 불을 뿜으며 팀타율 기록을 세웠고, 여기에 기존의 불안 요소이던 선발진에도 사이토 카즈미-스기우치 토시야-와다 츠요시-아라카키 나기사 등의 영건들이 자리잡으며 파리그를 제패하고 2003년 일본시리즈에서도 옆 리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한신 타이거즈를 무찌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2004년은 커리어 하이를 달성. 오프시즌의 고쿠보 히로키 무상 트레이드와 시즌 도중 이루어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해체, 이에 반발한 선수회의 파업 등으로 폭발한 퍼시픽 리그 존속 위기 등이 불거지며 팀 안팎이 어수선해진 상황에서도 팀의 주장으로서 선수단의 중심을 잡으며 '''.358 .464 .715 (OPS 1.179) 44홈런 120타점 118득점 171안타''' 84볼넷(67삼진)이란 공포의 스탯을 찍었다. 트리플 크라운 + 최다안타왕, 최고출루율, 득점왕 등을 차지했으며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 MVP 등 도루왕 정도를 빼고 타자로 탈 수 있는 정규시즌 상은 죄다 수상하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다. 팀은 정규시즌 리그 1위를 차지했지만 이 해부터 도입된 플레이오프에서 이토 츠토무 감독이 이끄는 2위팀 세이부 라이온즈에 패배해 2004년 일본시리즈 도전은 실패했다.
소프트뱅크에 팀이 매각된 원년인 2005년에는 무릎부상 우려 때문에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했으며 46홈런을 치며 2년 연속 홈런왕, 3년 연속 타점왕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해 일본프로야구 최초가 되는 '''3년 연속 120타점'''을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에 2006년에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장 다년 계약인 7년짜리, 보장 연봉 5억에 옵션 포함 추정 총액 45억엔의 계약을 맺는다. 이는 2019년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 사상 가장 길고 총액이 큰 규모의 계약이다.
2006년 제1회 WBC에 출전해 준결승전에서 한국의 전병두를 상대로 2루타를 기록했다. 이 해 2년만에 타격왕 자리에 복귀하지만 홈런이 19개로 크게 감소하며 이후의 불안을 암시했다. 2007년에는 타율 0.266, 15홈런, 68타점으로 크게 부진했으나 2008년에는 3년만에 20홈런 이상을 기록했고 통산 300호 홈런도 기록했다. 2009년에는 통산 1,000타점과 1,500안타를 기록했으며 시즌 종료 후 무릎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2010년에는 무릎과 손목의 부상과 타격 부진이 겹쳐 12년만에 100경기 이하 출전했으며 규정타석도 채우질 못했다. 시즌 후 계약 갱신 시 무려 50%(2억엔)나 삭감된 연봉 제시를 받아들였다.
2011년 부상의 여파와 저반발 통일구 도입, 경쟁자 우치카와 세이이치의 등장으로 역시 부진했다. 그래도 팀의 주축 지명타자로 활약하며 8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함께한다.
2012년 1군 65경기 출장, 4홈런, 타율 .221을 기록했고 연봉은 1억 3000만엔이나 감소한 7000만엔으로 조정된다. 2013년에는 기용방법에 불만을 품고 수뇌진에 불만을 표시했다가 2군으로 강등되었다. 1군에선 불과 9경기 출장 그리고 데뷔 시즌 이후 최초 0홈런을 기록한다. 2014년은 타격폼 개조까지 하는 노력끝에 1군에 이름을 올렸으나, 1군 33경기 출장 타율 .111, 0홈런, 4타점으로 부진.
2015년은 1군 9경기 출장 타율 0.067, 1안타, 1타점. 3년 연속 시즌 0홈런을 기록했다. 소프트뱅크와 계약이 종료되면서 다른 구단들을 통해 현역 연장을 모색했지만 오퍼가 없었고 2016년 3월 1일,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팀 선배 고쿠보 히로키가 전형적인 어퍼스윙으로 홈런을 날리던 것과 달리, 마츠나카는 레벨 스윙에 가까우면서도 배트를 공 아래로 가게 함으로써 역회전 스핀을 주는 방법으로 장타를 날렸다. 몸쪽 공 대응 능력이 좋아 나카이 마사히로와 인터뷰 당시 몸에서 30cm 정도의 거리에 기둥을 세운 상태에서 거기에 전혀 건드리지 않고 풀 스윙을 해 보였다. 또한 좌타자임에도 좌투수에 약하지 않았고, 홈런 타자임에도 삼진이 적고 시즌 100 삼진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는 완성형 타자였다.
하지만 장기계약 이후에는 잦은 잔부상에 시달리며 기복 있는 모습을 보였고 빠르게 기량이 쇠했다.
4. 여담
괌에서 개인 훈련 당시, 선동렬 감독이 지휘봉을 잡던 삼성 라이온즈의 스프링캠프에 방문하여 오승환와 조우한적이 있다.
다이에 입단 당시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까지는 다소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으나 벌크업을 통해 체구가 커졌다.다이에 시절
[1] 일본에서 마쓰나카를 소개할 때 거의 항상 따라붙는 별칭이다.[2] 헤이세이가 시작된 1989년 ~ 2018년 시즌까지 마쓰나카 외에 타격3관왕을 달성한 선수는 없었고 2019년에는 연호가 바뀌기 때문에 타이틀 수상 시점에서는 이미 헤이세이가 아니게 된다.[3] 당시 다이에는 네모토 리쿠오 GM 주도 하에 매우 공격적인 스카우팅 전략으로 유망주들을 수집 중이었다.[4] 강혁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90년대에는 성인 무대의 아마추어/실업 야구라도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5] 다이에의 전신인 난카이 시절부터 이어오던 B클래스 비밀번호행진에 종지부를 찍었다.[6]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했다. 당시 나가시마 감독과 오 사다하루 감독의 맞대결로 화제를 모은 매치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