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 츠요시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은퇴 후에는 탤런트, 크리에이터, 경마마주 등을 겸업한다. 준수한 외모, 강한 개성과 특유의 쇼맨십으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당대 일본프로야구계의 슈퍼스타 중 한 명이었다. 통산 성적에서 특출난 부분은 없지만 빠른 발과 강견을 살려 1990년대 ~ 2000년대 일본 최고로 평가될 정도의 중견수 수비를 했고, 출루율 3할 초반대를 쉬이 넘기지 못할 정도로 공갈성은 짙었지만 한 시즌 20홈런 가까이를 때릴 수 있는 파워를 지녔었다. 베스트나인 3회, 골든글러브(NPB) 10회, 올스타전 MVP 2회 등 수상 실적도 화려한 편.
한신 타이거스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는 유니폼의 영어명 표기를 SHINJYO로 썼으나,[4]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에는 등록명까지 포함하여 SHINJO가 되었고, 이 등록명은 일본에 다시 돌아온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선수시절 등번호는 63(1990~1992년, 2006년 9월 27일), 5(1993~2003년), 1(2004~2006년 9월 26일, 2006년 9월 28일~2006년 10월 26일).
2. 유년기
신조의 아버지의 어릴 적 꿈은 야구 선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갖가지 혹독한 훈련으로 신조를 단련시켰고, 신조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몇 시간씩 팔굽혀펴기를 하며 자신을 단련시켰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남에게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소프트볼 대회에서 끝내기 패배를 당했는데 울면서 판정에 항의했고 위로하는 감독에게도 오심이라고 매달렸는데, 감독은 이런 지기 싫어하는 근성을 대단히 여겨, 자기가 감독을 맡아줄테니 연식야구팀을 만들어 분함을 풀어보자고 했다. 신조는 이 말을 듣고 이틀만에 멤버를 모아 나가오카 파이터즈(長丘ファイターズ)를 결성했다. 주장이자 에이스, 4번타자로 공수주 모두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노스텝으로 점핑스로도 곧잘 했다고 한다. 이때 신조의 아버지가 코치로 지근거리에서 노크 연습을 혹독하게 시켰는데, 감독이 "애들이 불쌍할 정도로 엄격해, 보고 있기 힘들 때도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연습의 효과는 확실히 있었는지 팀은 결성 1개월만에 후쿠오카현 대회에서 3위를 했다.
부자 지간의 정이 깊었고, 말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라는 교육 방침에 맞게 신조도 아버지를 보면 무슨 뜻인지 알았다고 한다. 또 신조의 집은 어릴 적 무척 빈곤하여 뭘 사달라고 보챈 적이 없으나, 고등학생 때 겨울철 연습으로 손이 곱아 견딜 수 없을 때 가죽장갑을 사달라고 부친께 부탁드리자, 자신의 작업용 장갑을 살 돈으로 사주었다고 한다.
3. 고교 시절
1989년, 니시닛폰단기대학부속고교 3학년 재학 때, 제71회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후쿠오카 지역 예선 4회전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쳤다. 후쿠오카 결승전에서도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으나 팀은 져서 코시엔 진출은 실패했다. 고교 시절 전국대회 출장은 못했으며, 같은 해 드래프트[5] 에서 5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지명순위가 낮아 프로 진입을 망설이다가, 아버지가 "네가 갈 수 없었던 코시엔에서 플레이할 수 있잖냐."고 하는 말을 듣고 입단. 이때 등번호는 63번이었다.
이 때 요코미조 카츠라(横溝桂) 스카우트의 평가는 타력:B, 주력:A, 어깨:특A였다. 참고로 스즈키 이치로는 세 항목 모두 A, 마쓰이 히데키는 타력:특A, 주력A, 어깨A로 평가했다고 하며, 어깨 부문 특A는 고교 선수 중에 신조 이외에 준 적이 없다고.
덧붙여 이 시절은 신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으로 한신에는 관심이 없었다.
4. 한신 시절
1990년, 프로 1년차는 2군에서 보내며, 9월부터 11월에 플로리다에서 개최하는 가을 교육 리그에 참가했다.
1991년 시즌도 가을까지 2군에서 보냈지만, 침체된 1군의 상황 아래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6] 등 수뇌진에 발견돼 첫 1군 승격을 했다. 9월 10일 도쿄 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경기에서 대타로 첫 출장. 코우다 이사오(香田勲男) 투수한테 첫타석 첫안타 첫타점을 기록. 16일에는 유격수-7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1992년 3월에 예정된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장행시합[7] 멤버로 유럽에 가기로 했으나, 대표팀 사정상 무산됐다. 시즌 개막은 2군으로 했으나, 4월 하순 부상자와 교체되어 1군 진입. 이때도 유격수로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5월 팀의 주축 타자였던 3루수 토마스 오말리[8] 가 부상 이탈하며 다시 1군에 승격된다. 5월 26일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전에서 7번 타자(3루수)로 첫출장. 우도우 카츠야(有働克也) 투수에게 첫타석 초구를 좌측 담장으로 넘겨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 홈런은 강렬한 인상을 남겨, 이틀 뒤 초대 미스터 타이거스 후지무라 후미오가 죽은 것과 연관지어 매스컴에선 신조를 타이거스를 이을 재목으로 기대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수비는 유격수를 거쳐 중견수로 정착했다. 9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좋은 수비를 보이며, 오노 유타카(大野豊) 투수에게 프로첫 끝내기 홈런을 쳤다.
이 해는 침체된 전년도와 달리 팀이 우승 쟁탈에 나섰고 최종순위는 2위였다. 이때 카메야마 츠토무(亀山努)와 같이 활약을 하여 카메신 피버(亀新フィーバー)[9] 라고 하며, 신조가 가는 곳이나 기숙사에는 연일 여성팬들이 들끓어 '신조걸'이라고 보도됐다. 규정타석에는 약간의 차로 미달됐고 신인왕 선정에서도 동료인 쿠지 테루요시(久慈照嘉)[10] 에게 근소한 차로 져 놓쳤다.[11] 연봉의 상승율은 323%로 사쿠라이 코다이가 2008년이 되며 346%를 기록할 때까지 구단 최고였다.
1993년부터 등번호를 5로 바꿨다. 2월 하순 시범경기에서 헤드슬라이딩을 하다 왼쪽어깨를 다쳐 5월 중순이 돼서야 시즌 첫 출장을 했다. 10월 주니치 드래곤즈와 경기에서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고 나서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21세 8개월 3일째에 4번타자 선발 출장은 현재까지 한신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해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했고,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12] 를 첫 수상했다.[13]
1994년, 팬투표에서 센트럴 리그 최다득표를 얻어 올스타전 첫 출장을 했다. 이 해에도 골든글러브 수상.[14]
1995년 6월 20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원정경기 때 3- 4 로 한신이 1점 열세에 9회 초 무사 1, 3루 상황에서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친 홈런성 타구가 자기 이름이 적힌 응원기에 맞고 떨어져 2루타가 됐다. 그래서 이 판정에 격분한 한신 타이거스 팬들이 쓰레기를 던지고 그라운드에 난입해 심판에게 폭언, 폭행을 행사하는 등의 난동을 부려 8분간 경기가 중단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문제는 이 홈런성 타구가 정말 홈런이었다면 3타점으로 6 - 4 가 되어 경기를 역전시킬 수도 있었지만 결국 2루타로 판정이 되는 바람에 동점이 되지 못했고, 그 뒤 사사키가 남은 3명의 타자를 전부 아웃시키면서 결국 이날 경기는 한신이 패배하고 말았다. 신조 본인은 "열심히 응원해 주셨으니까 어쩔 수 없죠."라고 했다.
이 해는 부상도 있고 해서 규정타석에 미치지 못하고, 11월 19일엔 "센스가 없으니까 은퇴하겠습니다."고 갑작스런 선언을 했다. 감독인 후지타 타이라(藤田平) 감독과 불화설이 있었는데, 당월 21일에 발언을 철회했다. 은퇴발언의 진상은 그 당시 오른쪽 팔꿈치와 오른쪽 다리가 아파 치료에 전념하려 했는데 후지타 감독이 교육리그에 출장시키려 했던 것과, 신조가 따르던 카시와바라 타격코치가 퇴단한 것에 대해 구단에 불신감을 가져 요코하마에 트레이드를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은퇴발언 뒤 부친의 병이 악화되자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아버지께 드리는 최고의 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이 어떻든 간에, 목숨과는 바꿀 수 없으니까요. 오늘은 재계약할 생각입니다."고 하며 부친에게 힘을 내게 하기 위해 현역생활을 계속할 것을 결단했다. 또 이때 은퇴를 하면 MLB에 도전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이유였다. 후일 "1995년의 소동은 노모 히데오처럼 메이저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 생겼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할 땐 포스팅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을 때라, 신조의 말은 농담으로 받아져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1996년 10월 9일, 시즌 최종전에서 주니치를 상대로 1회 카나모리 타카히로(金森隆浩) 투수한테 만루홈런을 쳤다. 같은 이닝에 시오타니 가즈히코(塩谷和彦)가 똑같이 카나모리 투수에게 만루홈런을 쳐, 1이닝 만루홈런 2개라는 진기록을 세웠다.[15] 골든글러브 수상.[16] 오프 시즌에는 하와이 윈터 리그에 참가해서 히어로 스타즈에서 플레이했다. 히어로 스타즈의 감독은 후일 닛폰햄에서 다시 감독으로 만난 트레이 힐만이었고, 동료로는 뉴욕 메츠에서 같이 플레이할 베니 아그바야니(Benny Agbayani)가 있었다. 힐만은 닛폰햄에 신조가 들어왔을 때, 스타즈 시절의 기억은 없다고 했는데, 아그바야니는 다시 만난 신조에게 그때 체격이나 머리 모양도 기억한다고 말했다.
1997년, 타율 2할1푼의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팬투표 2위로 올스타전에 출장해 센트럴 리그 응원단에게 집단 응원 보이콧을 당했으며, 관객석으로부터는 "신조 꺼져라" 라는 야유와 함께 페트병이 날아왔다. 응원 현수막에는 "신조 츠요시, 그딴 성적으로 나오지 마라. 부끄러운 줄 알아라"는 메세지가 적혔다. 은퇴 회견 때 이 사건에 관해선 "그건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 하지만 레귤러로 모든 시합을 출장하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17]
1998년 9월 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2점 차로 좇는 상황에서 7회말 카와사키 켄지로(川崎憲次郎) 투수에게 솔로 홈런을 쳤다. 이 전날인 8월 31일 신조를 스카우트한 와타나베 쇼죠(渡辺省三) 스카우트가 고베 시 내의 빌딩 옥상에서 이유 불명으로 떨어져 죽었다. 역시 와타나베가 발굴한 카메야마 츠토무에게 이 일을 알게 된 신조는 시합이 끝난 뒤, "오늘날 제가 있는 건 와타나베 씨 덕분이라,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습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에는 패배. 이 해엔 극도의 타격부진을 겪으며, 시즌 타율, 홈런, 타점 전부가 규정타석 도달 시즌 가운데 최악이었다. 하지만 이 해에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18]
1999년 3월 5일, 같은 해 취임한 노무라 카츠야감독의 아이디어로 시범 경기에서 '''투수'''로 등판~, 구속 143km/h를 기록하며 한 회를 3자 범퇴로 막았다. 또 후쿠오카 돔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상대로는 145km/h를 기록했다. 그러나 투구 와중에 왼쪽 무릎에 통증이 왔기 때문에 투수로서 공식전 출장은 단념했다. 이 투수 도전에 대해서 노무라 감독은 "투수의 심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저 정도 어깨를 가진 녀석이 어떤 공을 뿌릴까 포수 출신으로 흥미가 있었다.", "저 송구를 본다면, 누구라도 투수를 시켜보고 싶잖냐 , 하반신을 이용할 줄 안다면 150km/h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99년 6월 12일 경기의 하이라이트. 2루 수비를 보는 장면과 고의사구 끝내기 안타 장면이 들어있다.
6월 1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경기에서 12회말 마키하라 히로미(槙原寛己)[19] 의 고의사구를 쳐내며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 첫 구는 외각을 살짝 벗어나는 완만한 투구였는데, 이 정도라면 칠 수 있겠다고 생각해, 2구째 똑같은 공을 삼유간 빠지는 안타로 만들었다. "유격수가 2루 베이스를 지키고 있는 걸 보고 삼유간으로 굴리면 빠지겠다 확신했다. 쉬운 공이 오도록 타석 바깥쪽에 섰다. 칠 때는 평소 발을 딛는 부분으로 내딛었다." 고 했다. 요미우리 쪽에서는 신조가 방망이를 휘두를 때 내딛은 왼발이 배터 박스를 벗어났으니 규정 위반이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구심인 타나카 토시유키(田中俊幸)는 "배터박스 안에 발이 일부분이라도 걸쳐 있으면 위반이 아니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송에서 신조는 "카시와바라 쥰이치(柏原純一)[20] 코치와 미리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이 일이 있기 3일 전에 히로시마전에서 고의사구를 받았는데, 휘두르면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타격 투수에게 부탁을 해 크게 벗어나는 공을 치는 연습을 했다고 나중에 보도됐다. 또 실행 전날의 스포츠신문에도 신조가 크게 벗어나는 공을 치고 있는 사진이 게재됐다. 게다가 TV방송 "언제 봐도 파란만장"에서 신조는 "미리 카시와바라 코치를 통해서 노무라 감독에게 고의사구를 칠 걸 허가를 받았고, 상황에 따라 Go사인을 내기로 맞춰놨다. 그리고 (연장 12말 동점 한신 1사2루 상태에서 3번 이마오카 마코토(今岡誠)가 타석에 선 와중에 배터리 미스로 츠보이 토모치카(坪井智哉)가 3루로 진루했고, 이 때문에 이마오카와 신조가 고의사구로 걸러질 것이 예상된 가운데) 카시와바라 코치가 노무라 감독에게 허락을 받고 초구를 보낸 뒤 사인이 나왔다. 그때 카시와바라 코치가 낸 사인이 정해놓은 것보다 오버액션이라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고 풀어놨다. 노무라 감독에게 "저 녀석은 우주인"이라고 말하게 한 플레이였지만, 나중에 방송에서 노무라는 고의사구를 치라고 허가를 낸 뒤에, 고의사구를 치는 게 상대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망설였다고 말했다. 이 시합에서 신조는 8회말 솔로 홈런을 포함해 6타수 4안타 2타점을 올렸으며 12회초 수비에서는 전회 공격에서 대타 기용으로 내야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2루 수비를 맡아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땅볼 타구를 처리했다. 이 때는 글러브는 동료인 히라오 히로시(平尾博嗣)[21] 의 것을 빌려썼다. 시합 뒤, 히어로 인터뷰에서 『월간 토라토라 타이거스』의 취재등으로 잘 알던 요미우리TV 아나운서 오야마 켄이치(尾山憲一)가 인터뷰를 맡았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선 "내일도 이긴다!"고 선언하며, 그대로 단상에서 내려가 인터뷰를 끝냈다. 그러나 다음날인 6월 13일 경기에선 패배. 신조 자신도 전날과 다르게 선발 우에하라 코지한테 3타석 연속삼진을 당하는 등, 5타수 무안타에 머물렀다. 신조는 고의사구를 치는 건 한 번으로 끝이라고 말한 것과 달리, 이 시합 전 타격연습에서도 멀리 벗어난 공을 치는 연습을 했다고 보도됐다. 이후 한동안은 신조를 고의사구로 내보낼 때, 상대포수가 투수를 향해 멀리 벗어나게 하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한 뒤, 한신과 교류전에서 고의사구를 당했는데, 상대포수인 옛 동료 야노 아키히로(矢野燿大)에게 "쳐도 됩니까?" 묻자 "안돼안돼"하고 거절당했다는 에피소드가 보도됐다.
7월 올스타 2차전에서 쿠로키 토모히로(黒木知宏)에게 친 안타가 센트럴 리그 1000번째 안타가 됐다.[22] 3차전에서는 첫 MVP를 받으며, 2년 전 굴욕을 실력으로 씻어냈다. 9월10일 요미우리 전에서 결승타가 되는 홈런을 치며, 다시 단상에 올라가 "내일도 이긴다!"고 선언하지만, 다음날부터 '''구단 타이기록이 되는 12연패'''를 맛본다.
이 해는 팀에 복귀한 은사 카시와바라 타격코치의 지도 아래 전년도의 부진을 만회했다. 병살타도 5월 후반까지 없었는데, 시즌 첫 병살타를 삼중살로 기록한다. 시즌 종료 후 병살타수는 21개로 양 리그 최대를 기록했다. 골든글러브 수상. [23]
2000년은 최초로 개막전 4번 타자로 출장했다. 7월 20일, 1000시합 출장 달성. 9월 30일 코시엔에서 히로시마를 상대로 9회말 키토우 마코토(紀藤真琴)에게 한신 시대 마지막 홈런을 끝내기 홈런으로 쳤다.
이 해의 시즌 홈런, 타점이 커리어 하이. 홈런에 대해선 '<선제, 동점, 결승, 역전> 의 수훈 홈런이 28개 중 20개로 눈에 띄었고, 시즌 전반에는 수훈 홈런수가 양 리그 중 최다'라고 닛칸스포츠가 특집기사로 다뤘다. 11월 미일야구에 출장해서 20타수 이상에 .409를 기록했다. 베스트나인 수상[24] , 골든글러브를 외야수 부문 최다득표로 수상.[25]
시즌 종료 후, FA선언을 하고 미국과 일본의 여러 구단과 교섭. 2000년의 빼어난 성적도 있고 인기선수의 방출을 막고자 한신이 5년 12억엔을 제시했지만, 12월 19일 기자회견에서 "겨우 저랑 맞는 야구환경을 찾았습니다. 그 구단은 뉴욕 메츠입니다." 발표하며, 연봉 50만 달러로 이적했다.[26][27] 등번호는 한신 때와 마찬가지로 「5」로 결정됐다. 12월 27일, 탤런트 오코치 시호(大河内志保)과 결혼. 1992년부터 결혼 때까지 8년간 동거했다는 걸 공표했다.[28]
5.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2001년 4월 4일 개막전에서 8회초 대주자로 첫 출장. 1루주자로선 드문 센터 플라이 때 태그업을 들어가 2루로 진루. 후속 타자인 로빈 벤추라의 홈런으로 첫 득점을 기록했다. 직후 좌익수를 맡아 다이빙캐치를 보였으며, 동점으로 따라잡혀 돌입한 10초 첫타석에서 첫안타를 기록했다. 6월 22일 베터런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경기에서 6회, 센터쪽 큰 타구를 좇아 펜스 바로 앞에서 포켓 캐치를 해 「윌리 메이즈의 더 캐치급 수비였다」고 보도됐다. 팀이 졌기 때문에 신조는 이 수비에 관해 말을 하지 않았다. 8월 3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MLB에 진출한 일본인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았다. 랜디 존슨이 상대였던 이 경기에서 성적은 4타수 무안타.
이 해에는 좌익수로 46경기, 중견수로 53경기, 우익수로 39경기를 출장했는데, 외야 전 포지션을 맡으며 보살을 기록했다. 시즌 보살수는 12[29] 타격에선 만루에서 12타수 7안타, 타율 0.584를 기록하여 승부에서 강한 면모로 보여 마이크 피아자와 함께 승리타점 11로 구단 최다를 기록했다. 최종 성적은 123경기 출장에 타율 0.268, 출루율 0.320, 장타율 0.405, OPS 0.725에 10홈런 4도루로 완전 붙박이 주전급은 아니지만 백업 외야수 성적으로는 꽤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 수비력이 좋아 외야 3포지션을 커버하는 전천후 외야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 해 루키 올스타에 뽑혔다. 시즌 종료 후 재계약 때 135만 달러에 계약하여 신조 개인 최초로 연봉 1억 엔을 넘겼다. 그러나 며칠 뒤, 내야수 대시 란포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통보를 받고 이적했다. 등번호는 5. 또 야구와 별개로 베스트 드레서 상을 받았다.
2002년 성적은 118경기 타율 0.238, 출루율 0.294, 장타율 0.370에 OPS .664 9홈런 5도루로 전년도보다 다운그레이드됐다. 2002년 월드 시리즈에 출장하였고, 1차전에서 9번 지명타자로 출장해 3타수 1안타를 기록하면서 동양인(일본인 포함) 선수로서는 최초로 월드시리즈에서 안타를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시즌이 끝난 후 자이언츠는 신조와 재계약을 맺지 않았고, 신조는 2003년에는 다시 친정팀 뉴욕 메츠에서 뛰게 되었다.
2003년 메이저 3년차 캠프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젊은 선수를 보고 "내 대신에 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수뇌진에 제안을 한 것이 「소극적인 선수」로 인상을 남겼다. 시범 경기에서 리그 최고 타율을 남겼지만, 시즌 최종적으론 은퇴의 이유가 된 왼쪽 넓적다리 이상으로 출장 경기 수가 줄었고 타격성적도 저조했다. 6월에는 부상 외의 이유로 최초로 마이너로 떨어졌다. 7월에는 40인 로스터에서도 제외된 뒤 AAA 노포크 타이즈(Norfolk Tides)에서 타율 3할을 유지하며 시즌을 마쳤다. 마이너 생활에서 장거리 버스 이동을 비롯한 여러가지 메이저와 차별을 겪었지만, 메이저를 꿈꾸며 노력하는 젊은 선수들과 교류로 "지금껏 야구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뒷날 말했다.
다음해 메츠와 계약을 맺지 못하자 NPB 복귀를 결심하여 2004년 시즌부터 홋카이도로 이전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했다. 추정 연봉은 8000만 엔에 2년 계약. 먼저 교섭을 해온 구단에 가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게 닛폰햄이었다고 한다. 이전 몸을 담았던 한신에서는 카네모토 토모아키, 아카호시 노리히로 등 외야수가 충분했기에 신조와 교섭하지 않았다. 한신의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은 "(신조가) 온다고 해도 포지션이 없다" 했다.
공식발표 전날, 영화 나쁜 녀석들 2의 특별 시사회에서 비공식으로 관객에서 알렸다. 공식발표의 회견 때에는 신조의 입단을 원하는 팬들의 서명을 모은 것을 소개했다. 삿포로 돔에서 열린 입단회견에서는 "삿포로 돔을 가득 채우겠다.", "팀을 일본제일로 만들겠다."를 목표로 삼았다.[30]
6. 닛폰햄 시절
닛폰햄에서 등록명은 「SHINJO」2019년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에서 몇 안 되는 영문 알파벳 등록명 사례이자 최초. 말 그대로 등록명을 알파벳으로 등록한 것. 규정상 알파벳이 안 된다는 규정은 없고 딱히 본명이 아니라도 상관없지만, 영문으로는 아무도 등록을 하지 않았던 것을 신죠가 처음으로 등록한 것. 이후 니시오카 츠요시가 2007년 한정으로 이름의 영문 표기를 딴 TSUYOSHI를 등록명으로 썼고 G.G.사토나 T-오카다 등 알파벳을 등록명에 사용하는 선수가 신죠 이후로 늘어나게 되었다.
등번호는 1. 그야말로 신조의 쇼맨십과 스타성이 제대로 발휘되었던 기간. 입단 후 은퇴까지 3년에 걸쳐 신조는 사비로 삿포로돔 우중간 좌석 위에 개인 광고 간판을 2장 설치했고, 닛폰햄 주최시합 때 외야석에 신조 시트[31] 를 만들었다. 팬서비스의 일환으로 2004년 5월 10일부터 홈런을 쳤을 때 타법명명을 했고,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시합 전 시트 노크 때, 가면을 쓰는 퍼포먼스[32] 를 포함해서 현재의 닛폰햄 덕아웃의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굉장히 큰 영향을 남겼다. 도쿄에서 존재감이 없던 비인기구단 닛폰햄이 신 연고지 홋카이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것을 넘어서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구단으로 성장하게끔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6.1. 2004년
2004년은 개막부터 7월까지 2번 중견수로 출장했고, 8월에는 츠보이 토모치카[33] 와 타순을 바꿔 1번으로 플레이오프가 끝날 때까지 나섰다. 5월 30일, 하코다테 치요가다이 야구장(函館市千代台公園野球場)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의 장즈자(張誌家) 투수를 상대로 일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7월 11일,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 게임 2차전에서 3회말 2사 삼루 상황[34] 에서 주자로 있던 신조는 포수가 투구에게 공을 던지는 틈을 타 홈으로 돌진, 투수가 곧장 반구하는 크로스플레이 상황에서 세이프에 성공했다. 포수 야노는 구심에게 항의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고 올스타전 사상 첫 단독 홈스틸로 기록됐다. 헬멧이 벗겨져 나갔던 신조는 배를 땅에 붙인 상태로 양손 양발로 땅을 치며 기뻐했다.[* 그 장면에서 해설석에는 죠지마 켄지가 특별해설로 앉아있었는데, MVP급 플레이라며 웃었다. 이 플레이는 하기 전에 삼루를 맡고 있던 주루코치 마쓰나카 노부히코[35] 와 상대 센트럴 리그의 후루타 아츠야, 야마모토 마사히로에게 얘기를 하고 허락해달라고 했다 한다. 전반기 마지막 시합의 히어로 인터뷰에서 "MVP는 제 것입니다" 선언한대로 MVP로 선정. 또 히어로 인터뷰에서 이 해 일어난 프로야구재편문제[36] 에 대해서 "이제부터는 퍼시픽 리그입니다."고 말했다.
프로야구 재편문제에서 발전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파업이 끝난 뒤, 첫번째 경기였던 9월 20일 삿포로돔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경기에서는 전전날, 전날 시합 중지의 사과로서 "그제와 어제 시합을 못 해서 미안 Joy"하고 동료 외야수 다섯과 비밀전대 고렌쟈의 가면을 쓰고 시트노크를 하는 퍼포먼스를 보여 팬들의 갈채를 받았다.[37]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고 싸우는 와중에 4-8로 지는 게임에서 4회말 아라카키 나기사(新垣渚)에게 솔로 홈런을 치고, 9회말 팀이 9-12에서 3연타로 12-12로 따르붙었을 때, 2사 만루 상황에 타석에 서서 미세 고지(三瀬幸司)에게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친다. 이 장면에서 1루 주자 다나카 유키오(田中幸雄)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2루 베이스 앞에서 신조를 맞이해 껴안고 도는 바람에 신조는 선행주자 추월로 아웃, 홈런은 취소되고 단타 처리됐다. 단, 신조의 아웃 전에 3루주자 나라하라 히로시(奈良原浩)가 홈으로 들어와 끝내기 승리는 성립됐다. 끝내기 홈런이 취소됐지만 끝내기 승리한 첫번째 사례로 남았다. 끝내기 홈런이 되었다면 개인 통산 끝내기 만루 홈런 최다 기록 타이(2회)를 이룰 수 있었다. 극적인 경기 종결 뒤, 신조는 아웃은 됐지만 상관않고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오며 팀 동료들의 환영을 받았다. 홈런을 안타로 바꾼 원흉인 다나카 유키오 는 곧장 신조에게 사과했고, 신조는 "괜찮아요! 이겼잖아요."하며 웃음으로 받았다. 다나카는 끝내기 요건인 3루 주자가 홈을 통과하는 시점에 머리가 하얘져, 신조를 반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히어로 인터뷰에서 "오늘의 히어로는 제가 아닙니다. 모두예요!" 발언, "내일도 이긴다!"고 선언했고,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다음날은 진다는 한신 시대부터의 징크스를 다음날 경기에서도 홈런을 치며 이기고 벗어났다.
이 해 시즌 타율은 커리어 하이인 .298를 기록했고 7~9월에는 전부 월간 타율 3할을 넘기며, 9월 월간 MVP를 수상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공헌했다. 11월 이온 올스타 시리즈 2004 미일야구에 팬 투표로 뽑혔지만, 부상을 이유로 출장하지 않았다. 베스트 나인[38] , 골든 글러브(외야수 부문 최다 득표)[39] , 일본 프로스포츠대상 공로상을 받았다.
6.2. 2005년
1번 중견수로 시작해 5월 중순부터는 5번으로 기용됐지만, 7월 중순 오른쪽 손가락에 공을 맞고 등록말소가 된 이후 출장이 줄어들었다. 4월 15일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전에선 넥스트 배터 서클에서 파울볼을 국부에 직격당한 뒤,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홈런을 치고, 「우불X 타법」이라고 이름 지었지만 뉴스에서 「방송금지용어 타법」이라고 소개했다. 4월 23일, 도쿄돔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우 전에서 미일 통산 1500시합 출장을 달성했다. 6월 5일, 나고야돔에서 주니치의 야마모토 마사히로 투수를 상대로 미일 통산 200홈런을 달성했다. 6월 12일, 코시엔에서 옛 팀 한신을 상대로 홈런을 치고 한신 팬들의 박수를 받자 「나를 키워준 이 구장에 감사타법」이라고 명명했다. 8월 모교인 니시닛폰 단기대학 부속고교 야구부가 전년도 코시엔에 출장을 한 걸 축하하며 소형버스를 기증하여 「코시엔 사상 최대의 선물」이라고 화제가 됐다.
이해는 부상 문제로 규정타석에 도달하지 못했다. 골든글러브상을 외야수 최다 득표로 수상했으나 수상식에는 불참했다. 시즌 수비성적은 평범했는데, “올해 나에게 골든글러브는 아까워. 1년간 이 상을 목표로 뛴 선수들한테 면목이 없네. 내년부터는 인상이 아닌 숫자로 줬으면 해. 그렇지 않으면 이 멋진 상이 가치 없게 돼버리니까”라고 얘기했다.[40] 2년 계약 만료 뒤 맺은 재계약은 신조의 희망으로 1년 계약, 연봉은 자기 최고인 3억엔(추정)이 됐다.
6.3. 2006년
이해 한신 시절 감독이었던 나카무라 가쓰히로가 오릭스, 노무라 카츠야가 라쿠텐의 감독으로 취임해, 치바 롯데 마린즈의 바비 발렌타인 감독(2001년 메츠 시절 감독)을 포함해, 3명의 은사와 대전하게 됐다. 1년간 6번 중견수로 고정 기용됐다.
신조의 발안으로 「삿포로돔 초만원 대작전」이라 하여 “무언가 합니다”고 알린 3월 25일 삿포로돔의 퍼시픽 리그 개막전에서 시합 전에 할리데이비슨의 트라이크[41] 를 몰고 입장하는 쇼를 감행. 신조를 이어 다른 스타팅 멤버들도 사이드카의 조수석에 타고 입장하여 가득 찬 관중들에게 큰 환성을 받았다. 이걸 시작으로 이 해 시합 전에 퍼포먼스 쇼를 한 3시합은 모두 닛폰햄이 승리했다. 이 해부터 개인광고간판 두 장 중 1장에 자신의 일러스트가 말하는 말풍선에 메시지를 써넣는 걸 시작했다. 관객 만원 달성 시에는 무언가 메시지를 넣기로 약속하고 다음날인 3월 26일 “삿포로돔 43,000팬, 위험해, 감동이야!”를 써넣어 팬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4월 17일, 도쿄돔에서 은사 나카무라 가쓰히로가 이끄는 오릭스와 경기에서 친 첫 홈런에 「28년간 마음껏 야구를 했어. 올해로 유니폼을 벗습니다 타법」이라 이름 지으며 갑자기 은퇴표명을 하고, 히어로 인터뷰에서 다시 관객들에게 선언했다. 이 첫 홈런을 마지막으로 타법 명명은 그만두었다. 은퇴 발표부터 시작 후반에 걸쳐 매스컴의 주목은 날이 갈수록 커져 신조의 퍼포먼스는 「신조 극장」이라 표현되며 연일 보도되었다.
4월 30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경기에서 유니폼 밑에 입은 옷깃이 있는 연습복 때문에 물의 빚었다.[42] 신조 본인은 시합 직전 심판단에 출장 가부 확인을 요청해 “어쨌거나 출장은 된다”고 인정받고 출장했다. 이후 상대 팀 감독과 프론트의 항의로 심판단은 회의 끝에 “이후 시합에서는 불가”라고 결정해, 심판단의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신조 본인은 해도 된다는 일을 한 결과라 신조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 6월 16일, 삿포로돔에서 열린 히로시마전에서 사사오카 신지를 상대로 일본 통산 200홈런을 달성했다. 8월 22일, 이와테 현영 야구장에서 라쿠텐의 와타나베 코우키 투수를 상대로 미일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9월 15일, 2007년 여름에 있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자민당과 민주당에게 요청받았다는 게 알려졌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9월 27일, 정규 시즌 최종전인 소프트뱅크와 경기에서 당일 한정으로 프로야구선수가 되고 처음 받은 등번호인 63을 달고 나왔다. 원래 63번은 와타나베 류이치 선수의 것으로 이날 한정으로 와타나베가 68번을 달기로 했으나, 소속된 2군 시합이 없었기 때문에 등번호 68의 유니폼은 따로 제작하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이 일에 관해 “이왕이면 등번호 1로 받고 싶었다”며 농담조로 얘기했다. 팀이 정규 시즌 1위 통과를 결정 지은 시합 이후 은퇴 세레모니를 행했다. 삿포로돔 장내의 불을 끄고, 이제까지 야구인생을 되돌아보는 VTR을 중견수 수비 위치에서 지켜본 뒤, 유니폼과 글러브, 리스트밴드, 타월을 그라운드에 놓고 눈물을 보이며 구장을 떠났다. 유니폼 안의 언더셔츠에는 “오늘, 이날, 이 순간을 마음의 앨범에 새기고, 이제부터도 나답게 가면 돼!”라고 프린트되어 있었다. 은퇴 스피치는 하지 않았지만, 떠날 때, 스코어 보드에는 “얼마남지 않은 야구인생 밝고 즐겁게 흰공을 쫓을 것을 오늘 이날 모두에게 약속합니다.”라는 서명이 붙은 즉필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예정대로 다음날인 9월 28일에는 등번호 1을 다시 달았고, 와타나베도 63으로 돌아갔다.
10월 2일, CM출연 계약을 맺고 있던 다이도 드링코에서 D-1 COFFEE의 「SHINJO 은퇴기념캔」을 12월까지 한정 발매했고, 동시에 「SHINJO 은퇴 기념 캠페인」도 전개했다. 11월 이온 미일야구2006에서 팬투표 톱으로 뽑혔지만 출장사퇴를 표명하며 “일본 시리즈에서 모든 걸 불태우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시리즈에서 신조 최후의 타석.
그리고 진짜 일본에서 마지막 경기인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2006년 일본시리즈 5차전[43] 에서 알렉스의 좌익수 플라이를 마지막 아웃카운트로 연결한 좌익수 모리모토 히초리와 서로 껴안으며 우승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그의 프로야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다.
우승 헹가레. 눈물을 흘리는 신조를 헹가레치는 팀원들[44] .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쇼맨은 이렇게 일본 야구계의 정점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7. 플레이 스타일
현역시절에는 전형적인 수비형 외야수였으나 현재 와서는 갭파워가 있는 OPS히터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재평가해주려 해도 역시 기본적으로 컨택이 영 좋지 않다 보니 타율에 비해 펀치력은 있었다 정도이지 수비형 야수였다는 평가는 바뀌지 않고 있다. OPS히터라고 불러주려고 해도 7할 중반을 왔다갔다하는 선수한테 OPS히터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하지 않은가.(...)
커리어하이는 일본 복귀 첫 시즌의 123경기 544타석 .298/.327/.508 150안타 79타점 24홈런. 커리어 통틀어, 규정타석 무시해도 단 한해도 3할을 기록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타율은 낮았고, 통산타율이 2할 5푼으로 2할대 초반도 찍는 경우가 종종 있던, 멘도사 라인보다 아주 약간 나은 정도의 컨택트를 지닌 선수였다. 90년대~00년대까지의 당시 일본야구는 타고투저였는데, 4년 연속으로 2할 4푼을 넘기지 못한 것은 할 말이 없는 수준.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야 조금 높았지만 그게 낮은 타율을 상쇄할 정도로 엄청 높은 편도 아니어서 통산 .305로 타율보다 5푼 정도 간신히 높은 수준의, 선구안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단 하나 파워만큼은 확실하여 풀타임시 20홈런을 충분히 넘길만한 장타력을 지니고 있고 종종 25홈런가까이 넘기는 시즌도 만들어 내고는 했다. 투수친화적인 한신 고시엔 구장, 삿포로 돔을 홈으로 뛰면서 찍은 성적인만큼 보다 타자친화 구장에서 뛰었다면 30홈런도 기대할 수 있었을만한 파워넘버. 커리어하이는 미국 진출 직전시즌의 28홈런. 한마디로 '''공갈포'''라는 정의에 정말 딱 부합하는 타자.
이런 신죠를 주전으로 뛸 수 있게 해 준 것은 절륜한 수비력이었다. 1993년, 1994년, 19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 연속으로, 한신 시절 총 7회의 골드글러브를 쓸어담으며 주전 중견수로서 한신의 외야를 책임졌다. 보통 메이저리그에서도 .970대에서 골드글러브를 타네마네 하는데 통산 필딩율이 .986일 정도의 높은 필딩율에 커리어 최고 1시즌 13개, 매년 10개 내외의 외야보살을 꽂아대는 엄청난 어깨를 바탕으로 한 철벽수비를 자랑했다. 신조의 강견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99년 주니치전에서 우익수 츠보이가 잡으려고 콜을 보낸 희플을 콜 무시 후 달려들어 낚아챈 후(...) 다짜고짜 홈으로 던져서 홈으로 태그업하던 3루주자를 홈보살을 꽂아버렸다. 이 당시 3루주자가 '''이종범'''으로 이종범의 주루스피드는 모두가 다 아시는 대로이니 정말 놀라운 어깨가 아닐 수 없겠다.
이렇게 수비 하나만큼은 철벽이었던 선수로서 SF시절 당시 같은 팀이었던 배리 본즈가 신조를 엄청난 중견수라고 칭찬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은퇴하는 해까지 골드글러브를 가져갔다. 주력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으로 전성기 땐 한 시즌 10도루 내외는 기대할 만큼의 꽤 빠른 발을 지니고 있었다. 이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외야수비 범위로 신조가 수비형 외야수 하면 아직까지 대표적인 선수로 떠오르는 데 한몫했다.
종합하자면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수비특화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렇게 수비가 강점인 외야수답게 연봉 면에선 불이익을 받았는데, 뉴욕메츠에서 135만 달러 계약을 하기 전까지 일본에선 고액연봉자의 상징이라는 연봉 1억 엔을 넘겨본 적이 없었다. 역시 외야수의 제일가는 덕목은 타격이라는 점이 다시금 생각나는 부분. 한신이 FA때 5년 12억으로 1년 2억 좀 넘는 계약을 제시하긴 했지만 본인이 거절하고 미국에 갔으니...
신기한 것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성적하락폭이 별로 없어, 타격 하락폭이 거의 없었고[45] , 필딩율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물론 타격이야 그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하락폭이 없는 수비는 그의 수비가 메이저에서도 통하는 진퉁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46] 덕분에 팬그래프 기준 메이저리그 통산 wRC+는 76 정도였으나 수비에서 높은 기여도를 인정받아 3년 통산 2.8, 첫 2년 동안 1.7, 1.3의 WAR을 기록했을 정도.
8. 은퇴 후
은퇴 후에는 2007년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었다. 이후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는데, 야구선수로 큰 인기를 얻어 그간 받은 거액의 연봉과 광고수익 등 벌어들인 수익이 50억 엔이 넘고 실보유자산은 25억 가까이 되는 거부였지만, 사기를 당해 22억엔이 넘는 큰 돈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정확히는 여태까지 자산관리를 전부 어머니에게 맡겼었는데, 어머니가 투자사기를 당해 그 돈을 전부 날려버리고 1억엔 남짓밖에 안되는 재산만이 남게 된 것.
은퇴 이후 경마 마주 등 하고싶은 것을 하고 살다가 그마저도 지쳤는지 인도네시아 발리로 이주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던 신조였지만 결국 이 사기로 인해 귀국하여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로는 야구해설이나 예능에 나오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내에서 돈을 벌며 사는 중. 2017년 출연한 예능에서 22억을 잃어 페라리 타다가 지금은 스쿠터 타고 다닌다는 자학드립성 썰을 담담히 풀며(...) 좌중을 웃프게 만들었다. 역시 엔터테인먼트의 도사라고 해야 할지...
그 외에도 기요하라 가즈히로 각성제 사건 당시에 기요하라 외에도 각성제를 한 선수가 더 있다는 증언이 있었는데, 메이저리그 복귀 이후로 이전에 비해 볼과 안와가 패일 정도로 수척해진 얼굴과 더욱 검어진 피부로 인해 각성제 의혹이 나오는 등 은퇴 이후에는 이래저래 꼬여버린 인생을 살아가는 중.
2019년 11월 18일 현역복귀 선언을 하며 1년후 트라이아웃에 도전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본인은 '전설을 만들고 싶다'고...물론 나이가 47세에 은퇴한지 14년이 된 사람인 만큼 합격 가능성이야 제로겠지만 역시 야구계의 기인이자 엔터테인먼트의 달인다운 행보. 이에 구단은 신죠를 임의은퇴신분에서 자유계약선수로 신분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2020년 12월 7일 열린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실전 경기를 치렀는데 첫 3타석에선 각각 2루 땅볼, 볼넷, 2루 땅볼로 물러났지만 4번째 타석에서 적시타를 쳤다![47] 타 구단에서의 영입 가능성은 없는 수준이고 본인도 복귀를 단념했지만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현역 복귀를 목표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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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담
신조 츠요시 전설
위키에 소개된 내용 이외에도 청바지 핏이 안 산다고 하체 트레이닝을 거부한다든가, 퀴즈프로에 나가 연필을 굴려 최종문제까지 맞췄다든가 하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한국 웹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가와 케이와 함께 한신 역사상 양대 기인이라 할 수 있는 선수인데, 공교롭게도 만화 루키즈에는 이 둘의 이름을 합친 '신조 케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크레용 신짱에 나온 바로는 노하라 미사에가 신조의 팬이라고 한다.
[1]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에 따르면 '신조 쓰요시'가 된다.[2] '''それ行け Go! 新庄 燃える男 それ行け Go! 新庄 根性見せろ''' (그래 가자 GO! 신조 불타는 남자 그래 가자 GO! 신조 근성을 보여라) [3] '''メジャーで鍛えた技と 熱き鼓動を打ち鳴らして 燃えろ新庄 北の大地の星とな''' (메이저리그 에서 갈고 닦은 기술과뜨거운 박동을 두드리며 타올라라 신조 북쪽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라)[4]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SHINJO(장음까지 표기하면 SHINJŌ)이고 일본식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SINZYO(장음까지 표기하면 SINZYÔ)이다. JYO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표기. 또 읽었을 때 '신즈요' 라고 발음된다.[5] 1989년 드래프트는 '''8개 구단 동시 1차 지명'''의 전설을 쓴 노모 히데오를 필두로 후루타 아츠야 등 레전드급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드래프트로 유명하다.[6] 2013년 현재 한신 타이거즈의 GM. 201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7] 격려차 하는 시합[8] 한신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하고 오사카 사투리로 감사 인사를 하는 등 팬들에게 사랑받았지만, 1995년에 야쿠르트로 이적. 야쿠르트에서도 1995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일등공신급 활약을 했다. 일본시리즈 4차전 11회에서 코바야시 히로시와의 14구 대전은 일본에서 상당히 유명한 대결이다.[9] 1992년 이후도 암울하지만 1987~1991년까지 5년간 한신은 꼴찌를 네 번이나 했다. 하지만 이때 활약한 카메야마 츠토무는 몇 시즌 지나지 않아 방출...[10] 2016년 현재 한신 타이거스 수비주루 코치로 있다.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한 뒤에는 이종범을 유격수 포지션에서 밀어낸 직접적인 장본인. 수비력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11] 덕분에 쿠지는 그해 '''센트럴리그 최초 무홈런 타자 신인왕'''이 되었다. 쿠지는 이듬해인 1993년에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12] 일본의 골든글러브는 한국과는 달리 최고 수비를 선정하는 상이다. 베스트나인은 타격 성적 위주로 수상하며 한국의 골든글러브와 유사하다.[13] 타율/출루율/장타율 .251/.305/.463, 23홈런 62타점 13도루. 수비로는 102시합, 236자살, '''13보살''', 6실책, 병살 처리 1, 수비율 .976[14] 수비기록은 120시합, '''289자살''', 4보살, 1실책, 수비율 .997[15] 카나모리는 이때가 첫 선발 등판이었는데, 만루홈런 2개를 맞는 바람에 당시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에게 미움을 사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 이후 대만 퉁이 라이온즈에서 계투로 좀 뛰다가 일본으로 복귀 주니치에 다시 입단했으나 1군에 오르지 못하고 다시 전력외 통보를 받고 퇴단했다. 참으로 기구한 삶... 그리고 시오타니는 SK에서 일본인 용병으로 큰 화제를 모았으나 손가락 부상 이후 선수생활을 사실상 종료, 현재는 독립 리그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후쿠이 미라클 엘리펀츠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16] 수비기록은 111시합, 247자살, 6보살, 4실책, 병살처리 1, 수비율 .984[17] 수비성적 135경기 출장, 276자살, '''13보살''', 6실책, 병살처리 1개, 수비율. 980[18] 수비성적 124경기 출장, 268자살, '''12보살''', 4실책, 병살처리 5개, 수비율. 986[19] 일본프로야구 마지막 퍼펙트 게임 기록 보유자. 1985년 백 스크린 3연발의 희생자로 기억에 남아있지만, 통산 성적상으로는 한신 킬러. 한신 상대로 38승 10패 10완봉을 기록하였다.[20] 현역 시절 고의사구를 받아쳐 홈런을 만들었다.[21] 2012년 시즌 종료 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은퇴했다.[22] 올스타전 1000번째 안타라는 것 같은데, 자세히 아는 분이 계시면 수정 부탁드립니다.[23] 수비성적은 121경기 출장, 247자살, 8보살, 3실책, 병살처리 2개, 수비율. 988[24] 타격성적은 타율/출루율/장타율 순으로 .278/.321/.491, 142안타, 28홈런, 86타점, 15도루[25] 수비성적은 129경기 출장, 251자살, 8보살, 3실책, 병살처리 3개, 수비율. 989[26] http://www.baseball-reference.com/players/s/shinjts01.shtml Salaries 부분 참조[27] 이때 노무라 감독은 팀의 유일한 레귤러가 떠나간다며 아쉬워했다.[28] 2007년 12월 이혼하였다.[29] 이 해의메이저 외야수 가운데 5번째, 신인 외야수 가운데 최다였으며, 구단 신인 외야수 중 최다였다.[30] 현역 마지막 해인 2006년, 신조는 이 두 가지를 다 이루었다.[31] 126석을 만들어 야구를 하는 아이들을 경기마다 무료로 초빙했다.[32] 이때 전적은 6전 4승 1패 1무.[33] 상술했듯 99년 한신에서 데뷔하며 신조와 함께 주전 외야수를 맡던 선수였지만 2003년 닛폰햄의 포수 노구치 토시히로와 트레이드되었다.[34] 투수는 한신의 후쿠하라 시노부, 포수는 역시 한신의 야노 아키히로, 타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35]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4번타자로 NPB 최초 3년 연속 시즌 120타점을 기록했다.[36]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해체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합병으로 촉발되어 아예 요미우리 회장인 와타나베 츠네오가 중심이 되어 단일리그 10구단으로 리그를 재편성하려 했고, 결국 이에 반발한 선수노조가 회장 후루타 아츠야의 지도 하에 파업을 단행한다. 와타나베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일본프로야구계에서 발언권이 아주 강력한 인물이다.[37] 아카렌쟈 : 모리모토 히초리, 아오렌쟈 : 시마다 카즈테루(島田一輝), 키렌쟈: 신조, 모모렌쟈: 이시모토 츠토무(石本努), 미도렌쟈: 츠보이 토모치카[38] 타격성적 .298/.327/.508, 150안타, 24홈런, 79타점[39] 수비성적 122경기 출장, '''272'''자살, 8보살, 5실책, 병살처리 1, 수비율 .982[40] 독특한 언행으로 개념 없는 운동선수로 알려졌지만, 신조 츠요시는 굉장히 지적인 사람이다. 그의 퍼포먼스는 여러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자신이 생각하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의 실천에 가깝다.[41] 바퀴 세 개 달린 오토바이[42] 연습복이 좀 화려했다고 하는데, 프로선수가 몸가짐을 똑바로 안 하면, 타의모범이 될 수 없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당시 관계자 중 하나는 신조 이전에 그러던 선수가 없던 것이 아닌데, 신조였기에 문제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옷깃이 있는 이너웨어는 80년대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꽤 흔히 볼 수 있었다.[43] 다르빗슈 유가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닛폰햄의 2006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1962년 장훈이 대활약한 첫 제패 이후 44년만의 일본시리즈 제패였다.[44] 신조,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팀 최연장자인 다나카 유키오, 구단 사장, 트레이 힐만 감독 순으로 헹가레를 했다. 당시 팀의 일원이던 모리모토 히초리, 다르빗슈 유, 가네무라 사토루, 오카지마 히데키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45] 메이저 당시 좌완 한정 플래툰으로 출전했기 때문이다.[46] 그래서 대만, 한국, 우주리그를 가도 2할 5푼을 칠거라는 농담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47] 신조에게 적시타를 맞은 비운의 허용투수는 히구마 쥬리어스라는 미국 혼혈 선수였다. 이 선수는 1997년생으로 2015년 드래프트에서 4라운더로 야쿠르트에 입단했으나 1군 기록 없이 5년만에 방출당하고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이 선수가 더 안타까운 것은 신조 앞에 상대한 두 선수 상대로도 전부 볼넷을 내주는 바람에(...) 2볼넷 1안타라는 최악의 기록으로 트라이아웃을 마무리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