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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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가수다.'''목포를 노래한 트로트 가수'''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2. 기구한 인생
1916년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인 이봉룡과 함께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 16세 때에 제주도에서 삼천가극단의 순회 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다니게 됐다. 삼천가극단이 일본에서 순회 공연을 할 때 작사가인 강사랑이 이난영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오케레코드사의 사장인 이철에게 추천해서, 1932년에 문호월의 곡 <고적>을 처음으로 취입했다.[2]
1934년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히트를 쳐서 가요계의 스타로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1936년, 21세에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다.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3] 등으로 당대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유명인이 되었다. 1939년에는 '오빠는 풍각쟁이'의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화류춘몽'의 이화자 등과 함께 '저고리 시스터즈'라는 이름의 그룹을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한국 최초의 '''걸그룹'''으로 꼽힌다. 광복 후에도 가수로 활약하였는데, 한국 전쟁 때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직접 운영했다. 이 시절, 후배 가수였던 남인수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을 챙겨주고 아껴주는 남인수의 모습에 반해서 사실혼관계로 지낼 정도였지만,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갑자기 죽게 된다. 일각에서는 자신의 젊었을적 분신, 복제품 수준이라는 이봉룡 선생의 자식과 함께 모아 김시스터즈 라는 3인조 재즈 걸그룹을 만들고 이들을 음악적으로 훈련시키는데 상당한 공을 들여 결국 성공 시킨다.
이후, 이난영은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고 1965년 알코올과 아편 중독[4] 의 후유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이난영의 자식들은 미국에서 김시스터즈, 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했고 1970년에는 내한공연도 했다.
이난영의 대표곡 영상이다.
3. 친일 논란
이난영은 <신춘엽서>, <이천오백만 감격>과 같은 친일 가요를 두 세 곡 정도 불렀다. <이천오백만 감격>을 같이 부른 남인수와 김해송은 전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것에 반해, 이난영은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다. 이유인즉슨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기준인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이 없었기 때문. 확실히, 지속적으로 수많은 친일 가요에 참여한 남인수와는 달리, 이난영의 친일 가요는 그 숫자도 눈에 띄게 적고, 친일 가요에 참여한 적극성을 증명할 증거도 딱히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난영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4. 재즈 보컬로서의 이난영
한국 재즈계에서는 대표적인 원로 재즈 뮤지션으로 손꼽는다.
'항구의 불근(붉은) 소매'에서는 완벽한 스윙재즈 스캣 창법을 구사했으며 '다방의 푸른 꿈'은 블루노트의 리듬기반으로 블루스를 노래했다.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사실상 초창기 재즈의 시대였으며 개척자 정도의 위치에 있다. 이 또한 그의 남편이자 작곡가 김해송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5. 대중매체에서
해어화에서 특별출연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차지연씨가 맡았다. 2019년 TVN에서 김시스터즈를 다룬 드라마 '위대한 이야기.1화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위대한 이야기'에서는 소유진씨가 역할을 맡았다.
6. 관련 컬럼들
- 최유준의 웹미디어 이난영 항구의 붉은 소매 : http://musicology.co.kr/?p=1098
- 최유준의 웹미디어 이난영의 눈물 : http://musicology.co.kr/?p=2123
- 최유준의 웹미디어 한국대중음악사의 수수께끼 - 두 얼굴의 이난영 : http://musicology.co.kr/?p=277
[1] 출생 당시 전라남도 목포부[2] 그런데 다른 데서 먼저 선수를 치는 바람에 이철이 쌩고생을 해야 했다고…이 사건을 MBC 프로그램 타임머신에서 방영했다.[3] 1939년에 발표된 이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곡은 한국 최초의 블루스 곡이다. 남편인 김해송이 이난영을 위해 작곡해준 곡이기도 하다. 동시대 미국의 재즈 스탠다드들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된 노래다.[4] 이난영은 어렸을 때 부터 만성 위경련에 시달렸었고, 명치에 고통을 느낄 때마다 아편을 피웠다. 참고로 이난영에게 아편 맛을 알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 김해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