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무라 히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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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村均(いまむら ひとし)
1886년 6월 28일 ~ 1968년 10월 4일
1. 초기의 인생
3. 전쟁 이후
4. 조선과의 인연


1. 초기의 인생


미야기현센다이 출생으로[1], 판사였던 아버지와 육군 대위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7남으로 태어났다. 미숙아로 태어난데다가, 3살까지 걷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해 가족들의 근심을 샀다. 왜소한 체격에 더해 야뇨증까지 앓았기 때문에 많은 놀림을 받으며 자랐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이마무라를 싫어한 소학교 선생님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이마무라가 등교까지 거부하게 되는 등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다행히 나중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의 영향으로 이마무라 또한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는 곧 공부와 운동 모두 두각을 보이게 된다.
도쿄제국대학 법학과 진학을 희망하여 도쿄로 상경, 친척집에서 공부에 매진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는 진로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돌봐야할 이마무라의 어린 동생들이 많았기에 이마무라의 학업 뒷바라지를 해줄 수 없었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거나 지원병으로 입대할 것을 강권했다.[2] 혼란에 빠진 이마무라는, 러일전쟁으로 고조되던 모병 열풍 속에서 천황의 행차를 호위하는 육군의 위용을 보고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가난과 지병으로 고생했지만[3] 친구의 도움으로 육군유년학교-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교를 모두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만주사변 전후에는 관동군의 독단을 경계했고 특히 조선 북부에 주둔한 병력들이 멋대로 월경하는 사태를 우려했다. 사태를 최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군 내 강경파들로부터 크게 빈축을 샀는데 이때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2.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중일전쟁 시에는 난닝에서 보급이 끊긴 사단을 지휘하여 작전을 성공시켰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제16군 사령관으로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공략을 지휘, 불과 9일만에 약 9만 3천의 네덜란드군과 5천명의 영국군·미군·호주군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제16군의 공세적인 움직임에 일본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크게 오판한 네덜란드측이 전의를 상실해버린 것이 승리의 주요한 배경이었다. 이마무라의 지휘로 일본은 가장 중요한 전략 목표였던 팔렘방의 유전지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로 향하던 와중 제2차 자바 해전이 벌어졌는데, 육군 병력이 탄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해군 병력들이 미 해군 순양함과 교전을 벌이다가 어뢰 오인사격이 터지는 바람에 수송선을 생으로 여러 척 날려먹은 것은 물론이고 히토시 본인도 물에 빠지는 신세가 된 것. 이 자체로도 가벼운 일은 아니고, 당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던 일이었지만 물에 빠진 당사자가 적당히 넘어가면서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 남방함대의 총책임자 오자와 지사부로가 본래 육군 쪽이 원했던 것보다 호위 전력을 훨씬 넉넉하게 보내주고 타격전단까지 별도로 얹어주면서 인도네시아 공략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 때문에 해군 측에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이마무라 히토시가 수송선 문제는 연합군 해군이 공격한 것으로 치자며 넘어가 준 것. 이때의 인연으로 이마무라와 오자와는 평생의 막역한 지기가 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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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이마무라 히토시
점령지에서는 포로학대와 학살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인도네시아인과의 융화정책에 주력하여 주민들의 호감을 얻었다. 그는 거리의 아이들이 자신에게 경례를 하면 받아주는 것을 즐겼고,[5] 인도네시아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수카르노를 네덜란드 감옥에서 해방시켜 협조를 구했다.[6] 자바 섬을 지배한 기간 동안 주산물인 목면을 수탈하지 않도록 했는데, 당시 자바 섬에서 목면은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이자 중요한 생필품이며, 동시에 죽은 자에게 입히는 수의에도 사용된다는 종교적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토에서는 이마무라의 선정을 탐탁치 않아했는데, 강력한 통치로 일본인의 힘을 보여야 주민들이 복종할 것인데 이마무라는 너무 물러터졌다는 게 그 이유였다. 본국으로부터의 압력에도 뜻을 굽히지 않던 결국 이마무라는 1942년 11월에 자바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마무라의 후임 사령관인 바바 마사오는 민간인 학대와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여기에 네덜란드 민간인 위안부 강제동원 사건도 터트리는 끝에 교수대 위에서 생을 마쳤다.
자바를 떠난 이마무라 히토시는 제8총군 사령관으로 전임되고, 1943년에는 대장 계급에 오르며 라바울과 뉴기니 섬 인근 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과달카날 전역의 참상을 보며 식량 문제에 주목하였고, 라바울이 농사를 짓기에 용이한 기후와 토양을 가졌다는 점을 활용, 태평양 전쟁 때 라바울에서 직접 농사까지 지어가며 종전까지 버텨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일본군 중 거의 유일하게 식량 보급으로는 곤란을 겪지 않은 곳이었다. 트럭 섬에 있는 일본군은 미군의 해상봉쇄를 견디지 못하고 많은 수가 굶어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높이 평가할 만 하다.[7]

3. 전쟁 이후


전쟁 이후, 이마무라 히토시는 휘하 장병들이 전쟁 기간동안 사회와 오래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귀국 후 곤란을 겪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병사들이 중학 수준 이상의 학력을 갖출 수 있는 교육과정을 기획하는가 하면 잡지를 발행하는 등 그들의 문화소양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장병들의 본국 조기 송환을 위해 호주 군 당국과 공조하였다. 일이 마무리되자 1946년 7월 독약을 마시고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마무라는 복원선에 올라 귀국한 장병들보다도 전범 재판을 받게 된 부하들이 마음에 걸린다며 기소되기도 전에 스스로 수용소에 입소하였고, 그곳에서 수용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과 재판 조력에 힘썼다. 이러한 이마무라의 노력으로, 라바울 수용소의 일본군 제소자들은 군기를 유지할 수 있었고, 호주군 역시 이마무라의 여러 탄원들을 받아들여 일본군 제소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수용소에서의 일화
이마무라 본인은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포로들의 처형을 용인하고 2만여 명의 인도인들을 강제로 인도국민군에 배속시켰다는 혐의로 기소, B급, C급 전범으로 10년형을 선고받게 된다.출처 그는 재판에서 부하들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인정했으며, 죄를 저지른 자신의 부하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재판을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는 이 모든 전범들에 대한 무지로 선처를 요청했으며, 실제로 재판부는 그 의견을 받아 들였다.[8] 다만 라바울의 참모장 아다치 하타조 중장은 알면서도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아다치 중장의 변호사 역시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와 비슷한 주장을 했으나, 재판부는 지휘관이 몰랐다는 주장은 받아들였어도 참모장이 몰랐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주 전범재판에서 라바울에서만 이마무라 대장을 포함한 '''390명이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았고 266명이 유죄를 선고 받고 무려 87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단순 전범들의 숫자만 봐도 다른 일본군 점령지를 훨씬 상회한다. 출처
이에 대해, 식량난도 없었고 대대적인 적군의 공격도 없었던, 여타 일본군에 비해 월등히 나은 여건 속에서도 수백 명의 전범이 쏟아진 점을 꼬집으며 이마무라의 무책임한 지휘를 비판하는 시각의 서술이 이전 편집들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라바울에서의 전범재판과 수감자에 대한 대우가 불공정했다는 일본측 시각을 교차검증해본다면 이마무라의 책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문제. 가령, 라바울 전범재판 기소내용의 대부분은 포로 학대, 특히 인도인 포로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마무라 자신과 일본측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포로가 아니라 임금노동자로 재판의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즉, 말레이 전역 등에서 생포된 인도인들 중 찬드라 보세 휘하의 인도국민군으로 전향하거나 일본군에 협조하기로 한 인도인들은 포로 신분에서 방면해주었고, 라바울에 있던 인도인들은 억지로 끌려온 포로가 아니라 일본군에 협조해 스스로 라바울행을 택했다는 것. 이들 인도인 신분에 관한 문제 뿐 아니라, 재판 과정도 불합리한 부분들이 많았는데, 일본군인들을 학대혐의로 고소한 인도인들이 곧 인도로 귀국해버렸기 때문에 피고인 측에서는 법정에서 피해자 측의 증언을 직접 논박하려 해도 피해자 측과 대면하지 못하는 사태가 초래된 것.(...) 결국 다수의 피고인들은 충분한 해명의 기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증언만으로 극형에 쳐해지는 일들이 많았다.
호주군이 주관한 라바울 전범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은 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네덜란드 당국에 의해 자바 섬 공략 및 통치시기에 대해 재차 재판을 받았다. 이마무라가 지휘하는 일본군에게 9일만에 항복하는 굴욕을 맛보았던 네덜란드 측에서는 그를 사형시키고자 하는 목소리도 컸으나, 자바 섬 통치시기 이마무라가 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던 유화정책 등이 주요하게 작용하여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때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수카르노를 비롯한 독립군 측에서는 이마무라를 환영하며 그를 탈옥시킬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단, 이 탈옥계획은 이마무라가 '무사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부하여 실행되지는 않았다.
이후 호주군에 의해 언도받은 10년 형의 복역을 일본 스가모 형무소에서 이어가게 되었으나, 남태평양 마누스 섬에 남아있는 옛 라바울 부하들을 걱정하여 자신의 이감을 탄원하였다. 더 나은 대우, 가족들과의 면회까지 누릴 수 있는 일본 형무소를 포기하고 굳이 남태평양으로의 이감을 청한 이마무라의 행보에 당시 일본 언론은 물론 GHQ 관계자들까지 감탄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조차 '''"일본에 온 이래 처음으로 참된 무사도 정신을 접한 것 같다"'''며 높게 평가하고 그의 이감을 허락했을 정도.[9]
책임이라는 덕목을 크게 중시한 군인이었다. 그 예로 강간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장교에게 항소를 금지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장교는 항소를 하던 말던 사형을 면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마무라 중장의 최소한의 도덕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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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의 모습
이후 출소하여 일본에 귀국한 뒤 은둔 생활을 하면서 회고록을 출판했으나, 인세는 전부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위해 쓰고 본인은 군인 연금만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의 책임을 반성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마무라의 유죄 여부와는 별개로, 적어도 휘하 장병들에게는 존경받는 덕장이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이마무라가 전후에도 휘하 장병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 점이 주요하게 작용했는지 이마무라의 휘하에 있던 장병들은 전후에 이마무라 히토시를 기념하여 '이마무라카이'라는 전우회를 조직하였다. 전후 일본에 난립하던 수많은 전우회 조직들 중에서도 이마무라카이는 규모와 활동면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필리핀 공격 지휘관이었던 혼마 마사하루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19기 동기이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에히메현의 호국신사에 이마무라의 이름이 '순국 22열사의 비'에 새겨져있다. 참고로 이 비석에 새겨진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다치바나 요시오'''다.
도쿄의 국립국회도서관에 그의 육성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무타구치 렌야의 육성도 남아있다고 한다.

4. 조선과의 인연


조선에서는 총 세차례 근무했다. 군 생활 초기에는 함경도 청진시에서 근무했는데, 그의 중위 진급은 이때의 일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을 돕기 위해 노는 일 없이 어머니에게 돈을 보내고 육군대학 입시에 전념하였는데, 이때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인지 합격하게 되었다. 출세 코스인 육군 대학을, 그것도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므로 그는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중좌 때는 함흥에서 잠시 근무했고, 장성으로 진급해서는 용산의 보병 제40여단의 여단장으로 부임했다. 사실 원래는 도쿄에 있는 여단에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용산에 가기로 되어있던 내정자가 집안사정을 이유로 도쿄 근무를 탄원하면서 이마무라의 임지가 용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혹자들은 이것을 황도파의 인사 간섭이 빚은 인사참사로 보고 이마무라를 동정했으나, 오히려 이마무라는 '군대연성에 적절한 임지'라며 도쿄행보다 경성행을 더 좋아했다. 이후 2.26 사건이 터지면서, 도쿄가 아닌 경성으로 가게 된 것이 이마무라의 군 생명에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전후 라바울 수용소에서 부하들을 챙기던 이마무라는 조선인과 대만인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호주군측의 부당대우로 수용소 분위기가 악화되자 이마무라는 조선인 구역에도 방문하여 조선인 포로들을 달래기도 했다.
귀국 후에 옛 부하들을 각별히 챙겼던 이마무라는 조선인 부하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일기본조약 전후에 박정희김종필은 이마무라를 고평가했는데, 특히 한국측 대표자로서 일본을 왕래하던 김종필은 직접 이마무라를 방문하여 그를 예찬하기도 했다.
[1] 아버지의 전근이 잦아 센다이에서의 생활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2] 아예 어머니 독단으로 육사에 원서를 보내기까지 했다.[3] 현대의학으로 분석한다면 가벼운 기면 발작이 있었다. 전공시간만 되면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고. 이 증상은 훗날 라바울 전범재판 때도 어김없이 나타났는데, 이마무라는 실례하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도록 주변의 호주군 헌병에게 자신이 졸면 깨워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정작 재판이 지루한 나머지 호주군 헌병도 졸아버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4] 둘은 때마침 나이도 동갑이었다.[5] 나중에는 인도네시아 민군 책임자인 이마무라의 위신이 추락할 것을 우려한 그의 부하들이 이를 막았다.[6] 수카르노와 이마무라는 서로를 높게 평가했다. 훗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는 방일 중 일부러 이마무라를 방문하기도 했다.[7] 다만 미군이 라바울을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던 점도 작용했다. 처음에는 홀시와 맥아더가 카트휠(수레바퀴) 작전으로 라바울을 점령하려 했으나, 해군과 공군만 무력화시켜두면 제해권도 없는 라바울의 일본군이 스스로 지킬 수는 있을지언정 밖으로 나와서 미군을 방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굳이 점령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 라바울은 일본 본토에 가깝다거나 해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도 아니었고, 8만~13만의 대군이 탄탄한 방어 시설과 충분한 보급까지 확보하고 있으니 점령하기 쉬운 곳도 아니었다. 점령을 시도했으면 이오지마나 오키나와는 우습게 보일 정도의 희생을 치렀으리라는 것이 중론.[8] 일설에 의하면 자바 섬에서의 관대한 통치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줬다고 한다.[9] Tsunoda Fusako, Sekinin Rabauru no shogun Imamura Hitoshi (Tokyo: Shincho-sha, 1984), p.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