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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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의자에 앉아서 미군에게 항복 서명을 하는 다치바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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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花 芳夫 (たちばな よしお)
1890년 2월 24일 생 ~ 1947년 9월 24일
1890년에 에히메 현에서 태어난 다치바나는 1913년에 육군사관학교 25기로 졸업했다.
다치바나는 졸업 후 보병소위로 임관하여 보병 제12연대에 배속되었다. 1916년 9월부터 1917년 1월까지는 육군 토야마 학교 체조과에서 수학했다. 1923년 8월에 대위로 진급하여 1924년 3월에 보병 제12연대 중대장이 되어 마츠야마 연대부관, 제11사단 부관, 타카마츠 상업학교 배속장교를 거쳤다. 1930년에 소좌로 진급하여 보병 제 12연대 대대장으로 승진하고, 1935년 8월에 중좌로 진급한 뒤 보병 제44연대로 이동했다. 독립수비 보병 제9대대, 만주국 군사고문을 거쳐 1938년 7월에 대좌로 승진한 다치바나는 1939년 10월에 보병 제65연대장에 취임하여 중일전쟁에 출정해 선전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에 히로시마 연대구 사령관으로 있다가 1943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4년 5월에 혼성 제1여단장이 되었다가 1945년에 이오지마에서 괴멸한 제109사단이 재편되면서, 그 사단장도 겸임해 중장으로 승진하여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父島)에 주둔했다.
여기까지만 요약하자면 여느 평범한 장군의 진급 스토리로, 나무위키에는 나와 있지도 않고 대신 위키백과에나 짧게 써져 있겠지만... 굳이 이 자의 항목이 이렇게까지 길게 작성된 이유는 바로 후술할 치치지마에서 벌인 '''엽기적인 범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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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1000km 떨어진 남쪽에 위치한 중부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섬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섬인 치치지마(父島)는 이오지마(硫黃島) 북쪽 200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일본 본토와 이오지마를 연결하는 보급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섬이였다. 당시 치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일본 해군은 모리 쿠니조(森國造) 소장 휘하에 치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를 위해 병력을 투입하던 미군으로서는 공격로 주위의 다른 섬으로부터의 지원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치치지마였고, 그를 위해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진행했다.
오가사와라 제도를 폭격하기 위해 미합중국 해군 항공대의 제 51 뇌격대가 오가사와라 제도로 날아갔다. 제 51 뇌격대 대원 중 한 명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해군중위였다, 부시는 비행기를 타고 오가사와라 제도로 출격하여 8천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도중에 일본군의 대공포에 정통으로 맞아 비행기가 추락했지만, 떨어지기 전에 간신히 낙하산을 펼쳐서 비행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미국의 구명정은 상당히 먼 곳에 있었지만 미군기가 강하하고 상승하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정확한 구명정의 위치를 낙하산으로 탈출한 자들에게 알려준 덕분에 부시는 간신히 헤엄쳐서 구명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일본군은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으므로 해군 단정 2 척을 파견해서 그를 생포하기 위해서 쫓아왔지만, 미군 비행기들이 단정이 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부시는 그렇게 2-3시간 정도 치치지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그 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지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 미 해군 잠수함이 부시를 구조했다.
그 외에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목표로 미국이 폭격을 하던 도중에 다른 미 해군기 몇몇도 대공포에 격추되어 총 미국인 9명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그들 중 부시만 유일하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른 조종사 8명은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처참하게 살해당하거나 일부는 잡아 먹히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당시 치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당시) 소장이던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 장군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병력 약 9,000명으로 이뤄졌으며, 일본 해군은 소장 모리 쿠니조(森國造) 제독 휘하에 치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병력 약 6,000명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1945년 3월 이오지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본영은 지치지마의 다치바나 장군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사단장에 임명했다. 해군도 모리 제독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치치지마의 두 지휘관 중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건 다치바나였고, 모리와 해군부대는 사실상 육군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 두 장군의 지휘 하에서 '''미군 포로 학대와 처형, 그리고 식인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오(的場末男) 육군소좌와 요시이 시즈오 해군대좌가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마토바는 굉장히 거칠고 술주정이 심각한 사람이였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부하를 반죽음에 이를 정도로 폭행하는 성격이라 주위의 모든 장병들이 두려워했다. 실제로 마토바는 유도, 검도 등 무술이 총 10단 이상이었고 몸집도 큰데다가 이토록 난폭하므로 주위의 장병들이 두려워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포로를 학대하거나 즉결처형하는 경우는 당시 일본군에서 흔한 일이었다. 병사/수병들 사정이 열악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일본군은 병영 악폐습, 가혹행위, 구타가 참전군 군대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징 대학살처럼 점령지의 국민들을 대량학살을 한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이 관여'''해 손수 포로를 구타, 학대, 고문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은 지치지마를 제외하고는 달리 예가 없었다. 당시 치치지마에서 벌어졌던 이 처참한 살육을 역사가 제임스 브래들리[1] 가 정리했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포로들에게는 칼 또는 총검으로 생긴 수많은 자상과 죽창으로 찔린 상처가 있었고, 일본군은 미군 포로들을 고문하고, 무자비하게 구타한 후에 참수했다고... 훗날 전범 재판에서 치치지마섬의 군의관들은 죽은 포로의 허벅지를 자른 것을 장교들이 먹도록 강요했다고 증언했으며 섬 수비대의 군의관들이 미군의 간과 고기를 얻으려고 포로들을 도살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 중 해군 통신부사관 마비 머숀에게 일본군은 '''직접 자신의 무덤을 파고 그 앞에 가서 서라고''' 명령했다. 그 뒤에 그의 눈을 가리고, 칼로 참수하기 위해 머숀을 무릎 꿇게 한 후 참수했다. 전쟁 범죄 재판에서 이와카와(Iwakawa)라는 이름의 일본의 군인이 증언하기를 "미 해군 포로를 참수하기 위해 칼로 내리쳤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닐라 대학살 당시의 상황처럼 여느 일본군의 학살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포로들을 살해한 후 그 인육을 먹는 엽기적인 식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괌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당시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미군 포로는 츠치야 코켄과의 대화 중에서 "내 나라(미국)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츠치야 코켄은 미군 포로와의 대화 중에서 아직도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훗날 만약 자신이 미군 포로의 목을 베었다면 자신도 전범이 되어서 처벌을 받게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으며, 그런 현실을 목격한 것 때문에 이런 전쟁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져서 자신이 전후에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치치지마의 경우는 '''기아나 식량 부족이 원인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경악하고 분노했다. 당시 치치지마의 식량상황을 보더라도,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따라서 인육사건의 동기는 사기진작을 위한 소영웅주의나 엽기적인 호기심, 그리고 포로를 학대하는 일본의 군사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는 것 같다는 평이 있지만 그러나 여러 정황들을 보건데 '''특별한 술안주가 먹고 싶어서라는 이유'''였다는 점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다가 일본 제국이 마침내 항복하고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자 1945년 9월 2일, 치치지마에도 미군이 상륙했고 다음날인 1945년 9월 3일,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과 모리 구니조 제독이 대표로써 미 해군 함정에서 정식으로 항복했다. 맨 위에 있는 저 사진이 바로 이 때 찍은 사진이다. 항복 교섭을 할 당시에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 해군 조종사는 몇 명 있는가? 만약 살아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당시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3] 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라고 둘러댔다. 이런 대답을 듣고 미군 대표 스미스 해군 대령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까다로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미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의 공범과 그 부하들은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세밀하게 증언을 맞추어 두었다.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고 전 부대원에게 '''반드시''' 침묵하라고 명령했다.
미군 지휘관인 렉시 해병대령은 의외로 항복한 일본군을 너그럽게 대했다. 항복한 일본 육해군의 본토 귀환 작업도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호리에는 사건이 드러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안도했다. 그러나 마토바 부대의 귀환은 자꾸 연기되었는데 미군은 사실 그 동안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또는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을 바탕으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결국 여러가지 정황 정보들을 확보하여 "포로가 된 미 해군 조종사들은 일본 육해군에게 끔찍한 만행을 당한 끝에 살해되었고, 일본군은 살해된 사람을 요리로 만들어 잡아먹었으며, 그리고 이 사건의 주범은 육군에서는 타치바나 장군과 마토바 소좌, 해군은 모리 제독과 요시이 대좌다."라며 괌의 군사재판에 이들을 기소했다, 그리고 이 식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일본 육해군들에 대한 체포가 이어졌다.
5월부터 9월까지 괌에서 이 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다. 치치지마섬 관련 사건의 피고는 다치바나 장군 이하 25명이었다. 그 외에도 트럭 섬에서 자행된 포로 생체해부 등 중부태평양 각지의 만행에 연관된 전쟁범죄 용의자는 63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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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간말종들의 처참한 재판 내용은 당연히 신문에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였고 이 재판 내용은 미군 신문인 "괌 뉴스"에서 연일 '캐너벌리즘[5] '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도했으며, 일부 내용은 미국 본토 신문에도 발행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신문에서 사라졌다. 이상하게 생각한 호리에가 왜 신문에서 이 기사가 사라졌는지를 미군 측에 문의하자 "상부 명령으로 기사의 게재가 금지되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검사인 아서 로빈슨 해군소장은 다치바나 중장, 마토바 소좌, 이토 중좌, 요시이 대좌, 나카지마 대위에게 포로 살해와 시체 훼손 등의 국제법을 적용하여 기소해 사형이 선고되었고, 가토 대좌,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에 처해졌다.[6] 그리고 모리 중장은 이 사건으로는 종신형에 처해졌으나 남방작전 당시의 네덜란드 포로 학살죄가 밝혀져서 네덜란드 측에 의해 다시 기소되어 사형당했다.
1년 정도의 수감 후 요시이 시즈오, 마토바 스에오와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또한 처형될 때까지 미군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심하게 학대를 받았다.
다치바나 요시오는 에히메현 마츠야마시의 호국신사에 있는 '순국 22열사의 비'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며, 거기서 영령으로 모셔지고 있다. 에히메현 항목을 읽다가 보면 잘 가다가 뜬금 없이 에히메 대학 바로 옆의 에히메 호국 신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이놈 때문이다.
그리고 다치바나 요시오는 야스쿠니 신사에도 봉헌되어 있다.
근·현대 문명국 장군 중에서는 유일하게, 보급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포로를 술안주로 잡아먹은 초유의 사태를 벌인 작자. 아니 보급이 부족해도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포로를 술안주로 먹지는 않는다. 진짜로 과달카날 후반이나 임팔 전선의 일본군처럼 식인이라도 하지 않으면 굶어죽기 일보직전인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가운데 의자에 앉아서 미군에게 항복 서명을 하는 다치바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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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花 芳夫 (たちばな よしお)
1890년 2월 24일 생 ~ 1947년 9월 24일
1. 일생
1.1. 출생과 성장
1890년에 에히메 현에서 태어난 다치바나는 1913년에 육군사관학교 25기로 졸업했다.
1.2. 장교 시절
다치바나는 졸업 후 보병소위로 임관하여 보병 제12연대에 배속되었다. 1916년 9월부터 1917년 1월까지는 육군 토야마 학교 체조과에서 수학했다. 1923년 8월에 대위로 진급하여 1924년 3월에 보병 제12연대 중대장이 되어 마츠야마 연대부관, 제11사단 부관, 타카마츠 상업학교 배속장교를 거쳤다. 1930년에 소좌로 진급하여 보병 제 12연대 대대장으로 승진하고, 1935년 8월에 중좌로 진급한 뒤 보병 제44연대로 이동했다. 독립수비 보병 제9대대, 만주국 군사고문을 거쳐 1938년 7월에 대좌로 승진한 다치바나는 1939년 10월에 보병 제65연대장에 취임하여 중일전쟁에 출정해 선전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3. 전쟁 발발 이후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에 히로시마 연대구 사령관으로 있다가 1943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4년 5월에 혼성 제1여단장이 되었다가 1945년에 이오지마에서 괴멸한 제109사단이 재편되면서, 그 사단장도 겸임해 중장으로 승진하여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父島)에 주둔했다.
여기까지만 요약하자면 여느 평범한 장군의 진급 스토리로, 나무위키에는 나와 있지도 않고 대신 위키백과에나 짧게 써져 있겠지만... 굳이 이 자의 항목이 이렇게까지 길게 작성된 이유는 바로 후술할 치치지마에서 벌인 '''엽기적인 범죄''' 때문이다.
1.4. '''치치지마 식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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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1000km 떨어진 남쪽에 위치한 중부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섬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섬인 치치지마(父島)는 이오지마(硫黃島) 북쪽 200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일본 본토와 이오지마를 연결하는 보급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섬이였다. 당시 치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일본 해군은 모리 쿠니조(森國造) 소장 휘하에 치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를 위해 병력을 투입하던 미군으로서는 공격로 주위의 다른 섬으로부터의 지원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치치지마였고, 그를 위해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진행했다.
오가사와라 제도를 폭격하기 위해 미합중국 해군 항공대의 제 51 뇌격대가 오가사와라 제도로 날아갔다. 제 51 뇌격대 대원 중 한 명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해군중위였다, 부시는 비행기를 타고 오가사와라 제도로 출격하여 8천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도중에 일본군의 대공포에 정통으로 맞아 비행기가 추락했지만, 떨어지기 전에 간신히 낙하산을 펼쳐서 비행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미국의 구명정은 상당히 먼 곳에 있었지만 미군기가 강하하고 상승하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정확한 구명정의 위치를 낙하산으로 탈출한 자들에게 알려준 덕분에 부시는 간신히 헤엄쳐서 구명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일본군은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으므로 해군 단정 2 척을 파견해서 그를 생포하기 위해서 쫓아왔지만, 미군 비행기들이 단정이 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부시는 그렇게 2-3시간 정도 치치지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그 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지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 미 해군 잠수함이 부시를 구조했다.
그 외에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목표로 미국이 폭격을 하던 도중에 다른 미 해군기 몇몇도 대공포에 격추되어 총 미국인 9명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그들 중 부시만 유일하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른 조종사 8명은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처참하게 살해당하거나 일부는 잡아 먹히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당시 치치지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당시) 소장이던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 장군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병력 약 9,000명으로 이뤄졌으며, 일본 해군은 소장 모리 쿠니조(森國造) 제독 휘하에 치치지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병력 약 6,000명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1945년 3월 이오지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본영은 지치지마의 다치바나 장군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사단장에 임명했다. 해군도 모리 제독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치치지마의 두 지휘관 중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건 다치바나였고, 모리와 해군부대는 사실상 육군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 두 장군의 지휘 하에서 '''미군 포로 학대와 처형, 그리고 식인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오(的場末男) 육군소좌와 요시이 시즈오 해군대좌가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마토바는 굉장히 거칠고 술주정이 심각한 사람이였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부하를 반죽음에 이를 정도로 폭행하는 성격이라 주위의 모든 장병들이 두려워했다. 실제로 마토바는 유도, 검도 등 무술이 총 10단 이상이었고 몸집도 큰데다가 이토록 난폭하므로 주위의 장병들이 두려워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포로를 학대하거나 즉결처형하는 경우는 당시 일본군에서 흔한 일이었다. 병사/수병들 사정이 열악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일본군은 병영 악폐습, 가혹행위, 구타가 참전군 군대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징 대학살처럼 점령지의 국민들을 대량학살을 한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이 관여'''해 손수 포로를 구타, 학대, 고문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은 지치지마를 제외하고는 달리 예가 없었다. 당시 치치지마에서 벌어졌던 이 처참한 살육을 역사가 제임스 브래들리[1] 가 정리했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포로들에게는 칼 또는 총검으로 생긴 수많은 자상과 죽창으로 찔린 상처가 있었고, 일본군은 미군 포로들을 고문하고, 무자비하게 구타한 후에 참수했다고... 훗날 전범 재판에서 치치지마섬의 군의관들은 죽은 포로의 허벅지를 자른 것을 장교들이 먹도록 강요했다고 증언했으며 섬 수비대의 군의관들이 미군의 간과 고기를 얻으려고 포로들을 도살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 중 해군 통신부사관 마비 머숀에게 일본군은 '''직접 자신의 무덤을 파고 그 앞에 가서 서라고''' 명령했다. 그 뒤에 그의 눈을 가리고, 칼로 참수하기 위해 머숀을 무릎 꿇게 한 후 참수했다. 전쟁 범죄 재판에서 이와카와(Iwakawa)라는 이름의 일본의 군인이 증언하기를 "미 해군 포로를 참수하기 위해 칼로 내리쳤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닐라 대학살 당시의 상황처럼 여느 일본군의 학살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포로들을 살해한 후 그 인육을 먹는 엽기적인 식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괌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당시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츠치야 코켄의 증언에 의하면 포로가 된 조종사들은 치치지마에 배치된 부대마다 한 명씩을 맡아야 했다. 포로가 처형되기 전까지 적어도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자신의 서툰 영어실력으로 포로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본 중위는 22세였고 츠치야 코켄은 소위 후보생으로 당시 21세였다. 근데 당시에 일본은 계산을 할 때 나이를 말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미 해군 포로는 자신에게 "The same age" (동갑이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츠치야 코켄은 증언했다. 그런데 당시 검도 2단이던 코켄에게 워렌 본의 참수를 하는 역할이 맡겨졌는데, 당시 자기 부대에 있던 후임 학도병 중에 검도 4단이 있는 걸 알고는 역할을 떠넘겼다. 어찌보면 좀 비겁한 일이긴 한데 그 학도병은 포로 살해로 기소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칸무리(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사카베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2]
1945년 3월 9일 오전 9시 대대장 육군소좌 마토바 스에오
발령방법: 칸무리 중위와 사카베 군의관을 직접 불러 명령 하달. 다치바나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호리에 참모에게도 통고함.
미군 포로는 츠치야 코켄과의 대화 중에서 "내 나라(미국)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츠치야 코켄은 미군 포로와의 대화 중에서 아직도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훗날 만약 자신이 미군 포로의 목을 베었다면 자신도 전범이 되어서 처벌을 받게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으며, 그런 현실을 목격한 것 때문에 이런 전쟁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져서 자신이 전후에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치치지마의 경우는 '''기아나 식량 부족이 원인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경악하고 분노했다. 당시 치치지마의 식량상황을 보더라도,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따라서 인육사건의 동기는 사기진작을 위한 소영웅주의나 엽기적인 호기심, 그리고 포로를 학대하는 일본의 군사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는 것 같다는 평이 있지만 그러나 여러 정황들을 보건데 '''특별한 술안주가 먹고 싶어서라는 이유'''였다는 점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다가 일본 제국이 마침내 항복하고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자 1945년 9월 2일, 치치지마에도 미군이 상륙했고 다음날인 1945년 9월 3일,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과 모리 구니조 제독이 대표로써 미 해군 함정에서 정식으로 항복했다. 맨 위에 있는 저 사진이 바로 이 때 찍은 사진이다. 항복 교섭을 할 당시에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 해군 조종사는 몇 명 있는가? 만약 살아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당시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3] 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라고 둘러댔다. 이런 대답을 듣고 미군 대표 스미스 해군 대령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까다로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미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의 공범과 그 부하들은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세밀하게 증언을 맞추어 두었다.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고 전 부대원에게 '''반드시''' 침묵하라고 명령했다.
미군 지휘관인 렉시 해병대령은 의외로 항복한 일본군을 너그럽게 대했다. 항복한 일본 육해군의 본토 귀환 작업도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호리에는 사건이 드러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안도했다. 그러나 마토바 부대의 귀환은 자꾸 연기되었는데 미군은 사실 그 동안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또는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을 바탕으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 전범 재판
미군은 결국 여러가지 정황 정보들을 확보하여 "포로가 된 미 해군 조종사들은 일본 육해군에게 끔찍한 만행을 당한 끝에 살해되었고, 일본군은 살해된 사람을 요리로 만들어 잡아먹었으며, 그리고 이 사건의 주범은 육군에서는 타치바나 장군과 마토바 소좌, 해군은 모리 제독과 요시이 대좌다."라며 괌의 군사재판에 이들을 기소했다, 그리고 이 식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일본 육해군들에 대한 체포가 이어졌다.
5월부터 9월까지 괌에서 이 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다. 치치지마섬 관련 사건의 피고는 다치바나 장군 이하 25명이었다. 그 외에도 트럭 섬에서 자행된 포로 생체해부 등 중부태평양 각지의 만행에 연관된 전쟁범죄 용의자는 63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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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간말종들의 처참한 재판 내용은 당연히 신문에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였고 이 재판 내용은 미군 신문인 "괌 뉴스"에서 연일 '캐너벌리즘[5] '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도했으며, 일부 내용은 미국 본토 신문에도 발행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신문에서 사라졌다. 이상하게 생각한 호리에가 왜 신문에서 이 기사가 사라졌는지를 미군 측에 문의하자 "상부 명령으로 기사의 게재가 금지되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검사인 아서 로빈슨 해군소장은 다치바나 중장, 마토바 소좌, 이토 중좌, 요시이 대좌, 나카지마 대위에게 포로 살해와 시체 훼손 등의 국제법을 적용하여 기소해 사형이 선고되었고, 가토 대좌,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에 처해졌다.[6] 그리고 모리 중장은 이 사건으로는 종신형에 처해졌으나 남방작전 당시의 네덜란드 포로 학살죄가 밝혀져서 네덜란드 측에 의해 다시 기소되어 사형당했다.
1.6. 처형
1년 정도의 수감 후 요시이 시즈오, 마토바 스에오와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또한 처형될 때까지 미군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심하게 학대를 받았다.
1.7. 사후
다치바나 요시오는 에히메현 마츠야마시의 호국신사에 있는 '순국 22열사의 비'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며, 거기서 영령으로 모셔지고 있다. 에히메현 항목을 읽다가 보면 잘 가다가 뜬금 없이 에히메 대학 바로 옆의 에히메 호국 신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이놈 때문이다.
그리고 다치바나 요시오는 야스쿠니 신사에도 봉헌되어 있다.
2. 평가
2.1. 일반적인 평가
근·현대 문명국 장군 중에서는 유일하게, 보급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포로를 술안주로 잡아먹은 초유의 사태를 벌인 작자. 아니 보급이 부족해도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포로를 술안주로 먹지는 않는다. 진짜로 과달카날 후반이나 임팔 전선의 일본군처럼 식인이라도 하지 않으면 굶어죽기 일보직전인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2.2. 일본에서의 평가
자국에서도 신나게 까이는 존재다. 하지만 우익들은 일본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순국선열로 평가하고 있다. 에히메 현의 에히메 대학 바로 옆에 있는 호국 신사에서 영령으로 모시고 있고, 야스쿠니 신사에도 모셔지고 있으며 우익들이 와서 참배하고 있다.대동아 전쟁 이후 전범 재판에서 '''억울하게 죽어서 유족들의 원통함을 달래고자 에히메현을 지킨 호국 영령 22인에게 참배를 올립니다.'''
ㅡ 이 인간도 아닌 작자가 안치된 에히메현 호국 신사 안에 새겨진 비문에서
3. 기타
4. 관련 항목
5.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피디아 치치지마 식인사건
- 영문 위키피디아 Chichijima(치치지마)
- 영어 위키피디아 플라이보이스
- 영어 위키피디아 다치바나 요시오
- 일본어 위키피디아 다치바나 요시오
- 일본어 위키피디아 오가사와라 사건
- 구스위키에서는 이 인간이 일류 셰프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1] 이오지마 전투에서 그 유명한 두 번째 성조기 게양 사진에 실린 6명 중 한 명인 해군 의무하사 존 브래들리의 아들이다.[2] 여단 산하 육군 308 대대의 군의관이었다. 본인 대신 하급자인 테라키 군의관을 보냈고 본인은 관여하지 않았기에 기소되지 않았다.[3] 본인에 따르면 치치시마 식인사건 때 미군 포로인 워렌 중위를 몰래 도망치게 해주려고 한 소령은 6개월 동안 구타를 당했고 강제로 인육을 먹어야만 했고 평생 PTSD에 시달려야만 했다고 한다. 실제로 재판에서도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다만 그가 주장하는 바만큼 완전히 무죄는 아닐 거라는 의심은 있었지만 조사 위원회의 위원들은 영어가 유창한 그에게 책임자인 렉시 대령을 포함해 많은 인원이 호감을 가졌으며, 이런 부분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4] 제목에서 식인을 뜻하는 cann'''ibal'''ism이 cann'''abil'''ism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당시 기사 제목의 오타를 검수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이 컸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5] cannibalism·식인 풍습[6] 참고로 이 재판이 법조계의 흑역사인 라다비노드 팔 판사의 재판였다고 하는데 팔 판사의 재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애초에 다치바나 요시오는 극동군사재판이 아닌 별건의 재판이었고, 다른 전범들이 법정에서 온갖 망언을 해도 무죄를 때린 그가 식인 하나로 유죄를 때릴 인간일 가능성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 그냥 다치바나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해 팔 판사를 끌어들인 낭설일 수 있다.[7] 무타구치는 엄청나게 무능하고 뻔뻔하긴 했지만 적어도 타치바나 요시오처럼 인간이길 포기하지는 않았다. 사실 항목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지만, 무타구치는 군인으로서 능력과 소양은 코메디 그 자체지만 인간으로서 도덕심이 마비된 전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무타구치는 사령관이라는 중대한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다. 그가 일본군에 해악을 끼친 것은 본인의 잘못보다 부적합한 인물을 중요한 자리에 올려놓은 상부의 잘못이 더 크다. 오히려 '인간' 무타구치 렌야는 일본군 내에서도 최고 수준의 인격자 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