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전국시대)

 



'''기전파목(起翦頗牧)
이촬
李繓'''

'''군호'''
무안군(武安君)[1]
''''''
(嬴)
''''''
(李)
''''''
(繓)
''''''
(牧)
'''최종직위'''
상방(相邦)
''' 고향'''
불명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28년
1. 개요
2. 이민족과의 전쟁
3. 진나라와의 사투
4. 죽음과 조나라의 멸망
5. 대중매체에서
5.2. 만화 킹덤의 이목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장수. 본명은 이촬(李繓)이고, 자가 목(牧)이지만, 본명보다는 이목(李牧)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이자, 중국사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명장 가운데 한 명이다. 북방을 지키면서 10여 년 동안 흉노(匈奴)를 상대로 싸워 그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고, 압도적인 국력을 지닌 진나라를 상대로 방어와 수성에서 무패의 기록을 갖고 있다. 공격과 공성에 있어서 무패의 기록을 가진 백기와는 대비되는 기록이다. 천자문에서는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 하여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을 전국시대의 가장 뛰어난 네 명의 장수로 꼽은 바 있다.

2. 이민족과의 전쟁


장군으로 부임한 이후 조나라 북쪽 국경지대인 대(代)와 안문(雁門)에서 장군직을 역임했다. 조나라는 최북단에 위치했기에, 이목은 장군으로 부임하자마자 흉노족과의 접경 지대로 발령받은 것이다. 당시의 흉노는 한나라 시대만큼 막강한 세력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진나라의 몽염에게 박살나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약소 민족도 아니었다. 툭하면 중국을 괴롭히고 뒷목을 잡게 만들 정도의 저력은 지녔던 것이다.
이목은 부임하자마자 두 가지 규율을 강조했다. 첫 번째는 흉노족의 목을 베고 온 병사를 마찬가지로 참수해 버리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흉노가 쳐들어 올 경우엔 모든 백성과 군사가 즉시 성벽 안으로 대피하는 것이었다. 또한 곳곳에 봉화 등을 설치하여 흉노의 움직임 또한 기민하게 파악함으로서 흉노에 대한 사전 및 사후 대처를 완벽히 준비하니, 이목이 부임하던 시절엔 흉노에 대한 피해가 전무하다시피 했고 반대로 흉노는 이런 이목의 대처 탓에 제대로 된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덤으로 이 동안 이목은 직접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오로지 훈련에만 전념했다.
이런 이목에 대한 대외적인 시선은 좋지 않아, 흉노는 물론 부하들 사이에서도 이목이 겁쟁이라는 말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결국 이목의 행보가 조정에까지 닿았고, 왕은 이목을 크게 질책하며 나서도록 했으나 이목은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이전같이 방어적인 태도만 고수했다. 결국 조왕은 이목을 파직시키고 다른 장수를 부임시킨다. 이목의 후임으로 온 새로운 장수는 이목과는 정반대로 흉노가 보이는 족족 그들과 교전을 펼쳤으나, 매일 지기만 하고 제대로 된 성과를 올리지 못해 결국 북쪽 국경 일대가 엉망이 되고 만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중앙조정과 북쪽 국경 담당자 등 모두가 이목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를 다시 불러오고자 했으나 이목은 이때도 주변의 말을 전부 무시하며 꾀병을 부리며 가택에서 버티기만 한다. 결국 조정에서 억지로 명을 내리며 이목을 북방으로 보내려 하자, 이목은 앞으로도 자신이 원래 하던 방침을 고수하겠다고, 즉 자신의 방침에 간섭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이에 왕은 이목의 담당구역에 대한 전권을 주고 일체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자, 그제서야 이목은 북방으로 복귀했다.
복귀 후 이목은 다시 자기 원래 방침대로 방어적인 태도만 고수했으니, 다시금 조나라 북방은 회복되기 시작했고 손실이 사라졌다. 때문에 자연스레 조나라의 군사물자와 군마, 병사들이 전부 늘어가기 시작한다. 이런 이목의 태도에 흉노는 그저 그가 겁쟁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이목은 장교들을 불러 본색을 드러냈다.

"요즘 병사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그냥 잘 먹고 훈련만 계속 하죠. 전투가 없으니 상 받을 일이 없다고 투덜대는 놈들도 있구요."

"아직도 나를 겁쟁이라 하던가?"

"뭐 별로 달라진 건 없는 듯해요."

"그럼 이제 크게 한번 붙어볼까?"

이목은 조와 흉노 사이의 평원에 보란 듯이 전차 1,300대, 기병 13,000기, 보병 5만과 궁병 10만이라는 대군을 주둔시킨다. 흉노도 이런 이목의 태도에 의심하며 먼저 정찰 목적으로 선봉대를 보냈으나, 이목은 퇴각하는 척하며 수천의 군사를 내버려두는데, 흉노의 선우는 이를 약탈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습격했지만 이목은 '기묘한 진세'를 펼쳐 미끼를 문 흉노군을 포위섬멸했다. 그 결과 흉노는 전투 한 번에 10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고, 선우 본인도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패퇴하게 된다. 북방의 이민족 중 담람이라는 부족은 전멸했으며, 동호 부족은 궤멸당한 뒤 도주했고, 이를 본 임호 부족은 아예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흉노를 포함한 북방 민족들이 입은 피해가 엄청나, 이후 10년간 조나라 국경에 얼씬도 못했을 정도였다.

3. 진나라와의 사투


이목의 활약과는 반대로 조나라 중앙은 계속 썩어가고만 있었다. 장평대전의 참패로 약해진 조나라를 노린 연(燕)나라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간신 곽개는 과거 자신을 비난한 명장 염파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모함을 하여 해임시킨다. 때문에 염파는 분노하여 후임 악승(樂乘)의 부대를 습격하고 그대로 위(魏)나라로 망명했다. 거기에 도양왕(悼襄王)이 창씨라는 여자에게 반해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이려 하자 이목은 그녀가 한 집안을 망하게 한 요녀라며 이를 격하게 반대했으나, 도양왕은 이런 이목의 직언을 무시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2]
이목이 버티던 북쪽 방면을 뺀 대부분의 국력이 쇠퇴한데다가 염파마저 잃은 조나라는, 설상가상으로 통일 대업을 시작하여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진(秦)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기 시작했다. 기원전 236년에 왕전이 연여를 공격하여 9개의 성을 점령한 후, 조왕 천은 이목을 대장군에 임명했다.
기원전 234년에 이목은 연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 무수, 방성을 점령했다. 다음 해에는 호첩을 전사시킨 진나라 장수 환의와 맞붙었다. 의안에서 수성만 고수하던 이목을 끌어내기 위해 환의가 비하를 치러 출정하자, 이목은 바로 환의군의 본진을 습격하여 함락했다. 환의는 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회군하였으나, 이목은 귀환하던 환의군마저 전멸시켰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이목은 조왕에게 무안군이라는 호를 받았다.[3]
이목은 기원전 232년엔 다시 쳐들어온 진의 대군을 업과 번오에서 철벽수비로 막아냈다. 3년 뒤 기원전 229년 진나라는 왕전과 양단화라는 필승카드까지 조나라에 투입했지만, 이목과 사마상(司馬尚)은 한단을 목표로 하는 진나라의 정예병을 상대로 방어를 성공하여 멸망의 위기를 잠시나마 막아냈다.[4] 이로써 조나라는 한창 승승장구하던 진나라의 기세를 잠시나마 꺾어놓을 수 있었다.

4. 죽음과 조나라의 멸망


진나라는 이목이 있는 이상 조나라를 멸망시키긴 힘들다고 판단하고, 염파를 모함한 간신 곽개를 매수해 이목을 모함했다. 곽개의 말에 넘어간 조유목왕은 이목을 해임한다.[5]
다른 기전파목 멤버들과는 달리 이목의 최후는 확실하지 않은데, 각 저서는 그의 최후를 다르게 서술한다. 전국책에 의하면 곽개가 아닌 한창(韓倉)이라는 대신의 모함을 받았고, 이목은 궁궐에서 자결 했다고 한다. 열녀전에서는 각주에 적힌 대로 곽개가 아닌 유목왕의 어머니 도양창후가 뇌물을 받고 나서 이목을 죽였다고 한다. 반면에 사기 염파인상여열전의 조세가에 의하면, 유목왕은 곽개의 모함을 듣고 조총(趙蔥)과 안취(顔聚)를 보내 이목 대신에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이목이 명령을 따르지 않자 유목왕은 사람을 보내 그를 정탐하다가 체포하여 죽이고, 사마상을 해임시켰다. 조세가 유목왕편의 사마천의 평에서는 "내가 풍왕손(馮王孫)이 ‘조왕 천의 어머니는 노래하는 여자로 도양왕의 총애를 받았다. 도양왕이 적자 가(嘉)를 폐하고 천을 세웠다. 천은 평소 품행이 좋지 않았고, 곽개(郭開)를 기용하여 그 참언을 믿고 좋은 장수 이목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처형을 피해 타국으로 망명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없다. 한신(韓信)도 경계할 정도로 뛰어난 전략가였던 초한쟁패조나라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가 재건된 조나라에 중용되었다는 걸 보면, 이목의 집안은 조나라에 그대로 남아있었단 의미이므로 신빙성은 낮다.
이목이 죽고 사마상도 해임되자, 방해물이 완전히 사라진 진나라는 바로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진나라는 석 달도 안 돼서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을 함락하고 조유목왕을 생포하여 조나라를 멸망시켰다.[6]
활약, 능력, 위치로 보면 그야말로 조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었고, 그가 내부의 적에 의해서 쓰러지면서 국가가 최후의 멸망테크를 탔다. 염파처럼 조국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며 수 차례 멸망의 위기에서 구했지만, 결국은 모함을 받고 참수당하니 역시 내부의 적이 생겨나지 않게 하고 국론을 단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제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의 장수 이신은 그의 당조카(5촌)였다고 하지만, 정작 당태종 본인이 이연수에게 만들도록 시킨 북사에서는 먼 옛날에 갈라진 일족으로 나온다. 무엇보다도 당태종은 틈만 나면 역사서를 보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조작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이 직접 명령해서 만들게 한 역사서에 자신의 족보가 틀리게 기록되어 있다면 그걸 그냥 놔둘까? 거기다가 1000년 전 기록이라기엔 신당서의 세계표는 쓸데없이 자세하다. 그러니까 신당서 기록의 원전을 쓴 당나라의 누군가가 이신은 놔두되 이목을 조작해서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5. 대중매체에서



5.1. 삼국지 시리즈


[image]
삼국지 12,13
삼국지 12 PK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 / 무 / 지 / 정 96 / 72 / 86 / 73. 병과는 궁병이며 전법은 '''속전 고수'''. 고유 전법이라서 지력을 크게 키우는 것은 필요가 없고 또한 태생적으로 귀모가 존재해 청룡 언월도, 방천 화극 등의 무력 + 호걸 특성 무기 주고 꾸준히 통솔, 무력만 키우다면 최강의 무장이 된다.
삼국지 13에서도 등장. 전작과 능력치는 동일하며 철벽을 몸소 보여준다. 중신 특성은 신중견수로 기동력 저하 대신 방어력 대폭 상승 효과가 있고 진채에 들어가면 말도 안 되는 방어력 보정빨을 받아 때리는데도 오히려 병력이 더 크게 감소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거기다 병과는 B / A / A로 궁병에 보정이 붙어있고 정예 궁병으로 악착 같이 사수하는 경우는 어지간해서는 절대 못 깨트린다. 견수는 진채 방위에 보정이 크게 붙는 데다가 전법도 견수 지휘에 방어력 극대화까지 붙으면 적군 100명 죽일 때 아군은 천 명 이상씩 죽어나간다. 수영 빼고 전투 관련 특기가 하~나도 없는 손권(...)이 쓰면 아쉬운감이 없지 않은 견수 지휘가 이목이 쓰면 견수 9 + 귀모 7 + 신중 견수라 진짜 더럽게 안 죽는다. 방어 100 오른 놈이 병격을 피해버리니... 다만 일기토 보정이 없어서 일기토를 붙이면 탈탈 털어버릴 수는 있다. 특기는 상업 3 / 훈련 7 / 순찰 6 / 위풍 5 / 분전 2 / 연전 4 / 공성 7 / 견수 9 / 귀모7.

5.2. 만화 킹덤의 이목


  • 진나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만화답게 최강의 적장 포스를 풍기고 있다. 역사서와 같이 북방에서 오랜 기간 복무하면서 무명의 장수로 지내다가 흉노의 대군을 몰살시킨 뒤 진나라 육대장군의 마지막 현역 왕기를 꺾는 것으로 중화 전역에 이름을 알리며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뛰어난 부대운영과 정보은폐, 판단력 등으로 지장으로 보이지만 숨겨둔 무력 역시 엄청나다는 것이 복선으로 깔리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이목 문서 참조.
[1] 백기의 군호와 같다. 뜻은 '''싸우면 지지 않고, 병사를 잘 키워 나라를 평안하게 했다.'''라는 뜻.[2] 열녀전 7권 얼폐전 도양창후에 의하면, 이목은 조 도양왕이 음탕한 성품으로 이미 한 집안을 망하게 한 과부 창후(倡后)와 혼인하려 하자 반대하며, "여인이 정숙하지 못하면 나라가 흔들리고 불안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한 집안을 망하게 하였는데, 대왕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라 간언하였다. 그러나 조 도양왕은 "나라가 어지럽고 어지럽지 않고는 과인이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라고 말하며 이목의 간언을 무시하고 창후와 혼인하고 그 소생인 조왕 천을 후계자로 삼았다. 허나 열녀전은 역사서가 아니라 교양서이기에, 역사적 신뢰도는 낮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3] 환의의 이후 행적은 기록이 엇갈린다. 죽었다는 설, 서민으로 강등당했다는 설, 연나라로 망명해 번오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4] 사기와 전국책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 사기에서는 간단히 '이목과 사마상이 진나라 군을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전국책에서는 전에 이목에게 패했던 환기가 도망치지 않고 왕전의 부장으로 계속 종군하다가, 이 때 이목에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당시 이목과 왕전은 전투를 치뤘고, 왕전은 꽤나 큰 피해를 본 것으로 추측된다.[5] 신뢰도가 낮은 설이기는 하나, 조유목왕이 너무 쉽게 곽개의 모함에 넘어간 것에 대해 이목이 유목왕의 어머니와 악연이 있었기에 그 자식인 유목왕도 이목을 암암리에 싫어했던 것이라는 설이 있다. 허나 상술했듯이 열녀전의 신뢰도는 낮다.[6] 여담으로 곽개는 이후 이래저래 모아온 금으로 여행이나 떠나며 살았는데, 어느날 도적의 습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 도적이 그에게 원수진 염파와 이목의 식객들인지 아니면 진나라의 청탁을 받은 인물들인지 아니면 그냥 진짜 도적이었는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