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코제두프
이반 미키토비치 코제두프
러시아어 : Иван Никитович Кожедуб
우크라이나어 : Іван Микитович Кожедуб
1920년 6월 8일 ~ 1991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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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의 전투기 에이스이자 '''소련 역사상 최고의 격추왕.''' 2차대전의 전설적인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과 더불어 ''' 소련군의 2차 세계대전 역사에서 연방영웅을 논하는데엔 절대로 빠질수 없는 인물'''. 그의 공식 격추 기록은 ''' 66기'''[1] 로 격추 전과 60기를 넘긴 소련 파일럿이 코제두프 뿐인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소련 역사상 최고의 에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전부 독일군 전투기는 아니고, 미군(...)P-51기 2기 격추기록이 있다. 2차 대전중 같은 연합군을 실수가 아닌 고의로 격추한 매우 드문 경우이기도 하다. 반미라 공격한건 아니고, 미군이 착각했는지 먼저 공격하길래 막아보려 했지만 어쩔수없이 격추시켜야 했다고 한다.
또, 부하 하나가 충각으로 자꾸 적을 잡고 다니자,[2] 나같은 에이스는 그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하지말란 뜻으로 충각으로 격추했는데, 죽을뻔해서 상관한테 혼나고 격추 수에 넣지 않아주었다고 한다.
2.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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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제두프가 탄 La-7'''
2.1. 입대 전,입대
1920년 6월 8일생으로, 우크라이나의 Obrazhiivka 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다섯 남매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코제두프가 공학도가 되길 바랬으며 코제두프 또한 아버지의 바램대로 1940년에 화학공대를 졸업하였다. 하지만 하늘에 대한 공경을 버리지 못하고, 1940년에 소련 공군에 입대한다. 1941년, 공군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그해 바로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바르바로사 작전과 함께 동부전선이 개전되자 그 또한 소련 공군으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공군학교에서의 준수한 성적으로 인해 그는 바로 전선으로 발령받지 못하고 후방에서 전투기 조종사들을 양성하는 직에 발령받는다. 하지만 재능을 썩히고 있기 아깝다는 그의 생각으로 그는 전방 배치를 원했으며, 그의 희망대로 그는 쿠르스크 전투 직전 1943년 동부전선의 Воронежский фронт(보로네시 전선)[3] 에 배속. 그 후에는 다른 부대에도 발령받았다.
2.2. 첫 전투
소련 최고의 에이스로 알려져 있으나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첫 공중전을 겪었을 때 그는 엄청난 바보짓을 저질렀다.
1943년 3월, 소위로 진급한 코제두프는 쿠르스크 주변의 비행장에서 마침내 첫번째 실전 출격을 감행으나.....
''그게 마지막 출격이 될 뻔했다.''
1. 이륙한지 30분 만에 코제두프는 장기와의 연락이 끊겼다.
2. 마침 독일군의 Bf 109 편대가 수천미터 아래에 있는것을 보고 부족한 경험 탓에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노련한 루프트바페.
3. 독일군 편대는 흩어졌고, 곧바로 코제두프는 2대의 Bf 109로부터 추격을 받기 시작했다.
4. 코제두프는 당황해서 한참을 급강하하며 추적을 피하려 했고, 소련군의 대공포가 마구 쏘아대자 Bf 109들은 돌아갔지만 코제두프의 비행기도 날개에 구멍이 뚫려 반파된체 기지로 돌아왔다.
2.3. 이후 전쟁기간
이후 격추 기록을 열심히 올리며 독일 공군을 '''말그대로 갈아마시던''' 그는, 결국 64기의 독일기와 2기의 미군기를 격추시켰다. 격추 기록 중 미군기는 '''자신을 독일 전투기로 간주하고 달려들었다가''' 얻어터진거라고(...). 그리고 그말고도 독일기 격추기록중 한대는 저공비행 중이던 '''Me262'''라고 한다. 날아가던 도중에 지면 근처에 생긴게 이상한놈이 하나 있어서 봤더니(...) 생전 처음보는 기체였고, 이것이 제트 전투기이던 Me262였던것. 후달리는 추중비덕에 안습이 된 가속성능이 결국 그 Me262의 파일럿을 소련공군 소속 연합군 공군 최강자의 손에 순식간에 골로 가게 만들고 말았다.
2.4. 소련의 영웅이 되다
첫 공중전에서의 장대한 삽질을 잊지 않고 노력한 덕에 66기를 격추시킨 소련 최고의 에이스가 되었고, 훈장을 무더기로 받았으며, 소련의 훈장중 가장 높은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3번이나 받았다.
2.5. 종전 후
1950년 소장 진급으로 최연소 장성에 올랐고, 소련 연방의회 의원으로 3번이나 선출되며, 소련 공군 원수 자리에까지 올랐다.
'''6.25 전쟁'''에도 참전한 적이 있다. 당시 소련은 공군 전투기 부대를 비밀리에 중공군에 파견했다. 이들은 형식상 중공군 소속으로 위장하고 교신도 러시아어가 아닌 중국어로 하였다. 이 공군 부대의 지휘관을 코제두프가 역임했다. 다만 코제두프는 직접 항공기를 타고 출격하지 않고 지상에서 지휘하였다.
1991년 8월 10일 소련 붕괴 직전에 노환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1] 격추수는 자료마다 모두 다르다. 66기라는 곳도 있고 64기, 혹은 62기 라고 주장하는 곳도 있다. 그가 베를린 공방전에서 추가로 2기를 격추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단 공식적인 격추기록은 64기로 적혀 있으며, 그의 격추기록 중에 베를린에서 격추하였다는 2기의 격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뒤에 후술할 미군의 P-51 2기의 격추를 포함하면 66기가 되기에 여기서는 66기로 적어 놓았다.[2] 정말 충격적이게도 2차대전 초기에 소련 공군은 공중 충각 전술을 '타란'이라 부르며 애용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애용한 조종사들이 적지 않다.[3] 1943년 10월 20일 이후로 Первый украинский фронт ( 제 1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