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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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하시중'''
심덕부

'''배극렴'''

(조선 개국)

'''조선 초기의 역대 수상(首相)'''
(초임)

'''초대 문하좌시중 배극렴
(1392)
'''

2대 조준


裵克廉(1325 ~ 1392. 12. 10, 음력 11. 26)
1. 소개
2. 일생
2.1. 왜구와의 싸움
2.2. 말년과 이모저모
3. 현대 매체에서


1. 소개


여말선초의 인물. 조선 초기의 무신 출신 재상이었다.

2. 일생



2.1. 왜구와의 싸움


1376년에 왜구가 경상도를 공격하자 진주도원수에 임명되었고 1377년 여름 4월에 부원수로 종군해 우인열과 함께 율포에서 왜구를 물리쳐 100여 명을 참수했으며, 여름 5월에는 강주원수로 종군해 하카다와 싸워 격파했고 우인열이 병으로 사직하자 그를 대신해 경상도 도순문사가 되었다. 겨울 11월에는 왜구가 130척의 배를 거느리고 김해부, 의창현 등을 공격하자 그들과 싸웠지만 크게 패했으며, 1378년 가을 8월에는 욕지도에서 왜구를 격파해 50명을 죽였고 겨울 12월에는 왜구가 하동현, 진주 등을 공격하자 사주까지 추격해 20여 명을 죽였다.
1379년 여름 5월에는 왜구가 2700여 명을 이끌고 진주를 공격하자 양백연, 우인열, 한방언, 김용휘, 경의, 홍인계 등과 함께 반성현에서 적을 격파해 13명을 죽였으며, 여름 6월에 왜구가 울주, 청도, 밀성, 자인, 언양을 공격하자 우인열, 하을지 등과 함께 울주에서 승리해 선박 7척을 얻었고 가을 8월에는 우인열, 박수경, 오언 등과 함께 사주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해 43명을 죽였다.
1380년 가을 8월에는 왜구가 사근내역에 주둔하자 김용휘, 지용기, 오언, 정지, 박수경, 배언, 도흥, 하을지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싸우다가 5백여 명이나 죽을 정도로 크게 패했다.

2.2. 말년과 이모저모


1380년 가을 9월에는 밀직부사에서 경상도 도순문사로 임명되었다. 1388년 4월을 명나라의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이성계 휘하의 장수로 참전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으며, 1390년에 평리를 지내다가 7월에 양광도 찰리사가 되어 한양 궁궐의 수축을 감독했고 11월에는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1391년 정월에는 중군 총제사로 임명되었다가 평리를 옮겨 가을 8월에 한양의 궁궐을 수리하는 일을 맡았으며, 1392년에는 만호를 지내다가 파직되었고 여름 4월에는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고 이후 판삼사사, 우시중 등을 지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익대 보조 공신 문하좌시중 성산백에 봉해졌다.
1등 공신에 봉해졌고 병으로 사직했다가 이틀 만에 사망했고 그가 죽자 이성계는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생선 반찬을 먹지 않았다. 시호는 정절(貞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배극렴이 건국 1등 공신에 봉해진 것을 두고 의도적인 정치적 안배로 해석하였다. 배극렴은 위화도 회군에 동참하는 등 이성계와 어느 정도 연이 있긴 했지만 역성혁명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지는 않았고, 굳이 따지면 중도파에 가까웠으니 이런 배극렴을 1등 공신에 봉하여서 민심을 수습하고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는 것.
이 해석이 아예 틀렸다고 단정할 수야 없겠지만, 반대로 실록의 기록상으로는 그런 것치고는 배극렴이 꽤 중요한 입지를 갖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사료가 왕왕 있다. 가령, 태조 1년의 개국 프로파간다성 기록이 그렇다.

어떤 사람이 문밖에 이르러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지리산(智異山) 바위 속에서 얻었습니다."

하는데, 그 글에,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

하고, 또,

"비의(非衣) ·주초(走肖) ·삼전 삼읍(三奠三邑)"

등의 말이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이해 들어오게 하니 이미 가버렸으므로, 이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한 비기(秘記)에 ‘건목득자(建木得子)’의 설(說)이 있고, 또 ‘왕씨(王氏)가 멸망하고 이씨(李氏)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는데, 고려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숨겨지고 발포(發布)되지 않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2번째 기사

일종의 예언서가 조선의 건국을 알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자의 파자를 이용한 예언들이 나와 있는데, 우선 목자(木子)는 합치면 이(李)가 되니까 이성계를, 비의(非衣)는 합치면 배(裵)이므로 배극렴을, 주초를 합치면 조(趙)씨라서[1] 조준을 의미하고, 삼전 삼읍에서 전(奠)과 읍(邑)을 합치면 정(鄭)이 되는데, 각각 세 쌍이 있으니 세 명의 정씨인 정도전, 정총, 정희계를 뜻한다. 즉 이 예언은 '이성계가 배극렴, 조준, 세 명의 정씨와 함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예언서란 게 실존할 턱이 없으니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위해 창작된 이야기일 텐데, 그러한 프로파간다성 일화에 정도전, 조준 같은 대신들과 함께 이름을 올릴 정도면 조정 내에서도 상징적인 인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예언 이야기는 정도전이 지어 바친 악장인 수보록에서도 나온다.

수보록(受寶籙).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智異山) 석벽(石壁)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뒤에 임신년에 이르러, 그말이 그제야 맞게 되었으므로, 수보록(受寶籙)을 지었습니다. 저 높은 산에는 돌이 산과 가지런했는데, 여기서 이를 얻었으니 실로 이상한 글이었습니다. '용감한 목자(木子)가 기회를 타서 일어났는데, 누가 그를 보좌하겠는가? 주초(走肖)가 그 덕망 있는 사람이며, 비의(非衣) 군자(君子)는 금성(金城)에서 왔으며, 삼전 삼읍(三奠三邑)이 도와서 이루었으며, 신도(神都)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王位)를 8백 년이나 전한다'는 것을 우리 임금께서 받았으니, 보록(寶籙)이라 하였습니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7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한편 수보록은 태종 11년에 궁중 음악을 논할 때 다시 논의거리가 되는데, 여기서는 가사가 '목자장군검(木子將軍劍)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 비의군자지(非衣君子智) 부정 삼한격(復正三韓格)'으로 좀 더 운율에 맞게끔 구체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성계 장군의 검, 조준 대부의 붓, 배극렴 군자의 지혜가 삼한을 도로 바로잡는다네' 정도의 가사인데, 여기서는 오히려 장군 이미지와 달리 지혜(知)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 기사에서 태종은 정희계는 공이 없고 덕도 없어서 때에 응해 나온 사람이 아니며,[2] 배극렴은 짧은 정승 기간 동안 이렇다 할 공훈이 없었다는 이유로 수보록은 악부에서 빼라고 지시한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卒)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201) 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극렴(克廉)의 본관(本貫)은 경산(京山)이니, 위위 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상주(尙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尹)·화령 윤(和寧尹)이 되어 모두 어진 정치를 하였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되어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安集)하였었다. 수비(守備)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임금에게 마음을 돌려 조준 등과 더불어 서로 모의하여 임금을 추대하고는, 마침내 수상(首相)이 되었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 학술이 없어서 임금에게 의견을 아뢴 것이 없었으며,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 이르러서도 이에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어린 서자를 세울 것을 청하고는 스스로 공(功)으로 삼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탄식하였다.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아들이 없었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6일 계묘 1번째 기사, 1392년

졸기에서는 그의 성품이 검소했던 점. 지방관으로서의 실적이 꽤 있었던 점. 방어전에 능했지만 공격전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한편 배우지 못하여 학술이 없어서 임금에게 의견을 아뢴 것이 없었다는 박한 평가 역시 내리면서 비판하고 있는데, 바로 뒤에 세자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서 짐작한다면 '너 그 때 왜 방석이 밀었냐?'라는 책임 추궁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3] 이색의 졸기에서도 이색이 그를 가리켜 말 장사꾼이라고 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문(文) 방면에서는 꽤 미숙했던 모양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지만, 졸기의 저 부분은 이색이 한산군에 봉해지자 이성계에게 "개국할 때 날 불러서 직임을 맡기지 왜 말 장사꾼을 수상에 앉혔습니까?" 라고 디스를 했다는 기록이다. 이것을 믿으면 이색이 마음 속으로는 이성계를 왕으로 여기며 충성하고 있었기에(...) 내심 재상이 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말인데 너무 과도한 윤색으로 보인다.
한편, 그의 졸기에는 세자 책봉에 책임이 있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일찍 죽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훗날 정도전, 의안대군의 꼴을 보면 이 사람도 비명횡사했을지도 모르는 노릇. 그가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고, 진정으로 그러했다면 무인정사 때까지 살아있었을 시 위험했을 수도 있다.
다만 조준의 졸기를 보면, 태조와 더불어 조준, 정도전, 남은, 김사형 등과 세자 문제에 대해 논의할 당시 '''적장자(嫡長子)로 세우는 것이 고금(古今)을 통한 의(義)입니다.'''라는 주장을 처음으로 한 이가 바로 배극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가 밖에서 무언의 압력 을 가하였고, 이로 인해 이성계의 마음이 움직였으니 초반에 조준이 반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결국 그 자리에 있던 재상들의 동의 하에 의안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즉, 배극렴도 (다른 이의 의견을 따랐을 지도 모르지만) 처음에는 이전까지의 정석대로 장자가 세자가 될 것을 주장하였으나, 신덕왕후와 이성계의 의지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의안대군을 밀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
또 반대를 하고 싶었더 하더라도 위치상 그러기가 힘들었다. 당시에 같이 의논을 하던 재상들은 그를 제외하고는 전부 문신 출신이었던데다 조준, 정도전, 남은, 김사형 등은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정몽주를 견제하는 등 이성계 측과 같은 길을 걸었던 이들이자 조선 건국에 영향을 미친 실세들이었다. 더군다나 이 실세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더라면 2인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겠지만, 조준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입장이 한결같았다. 이러니 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은 어쩌면 위치상 2인자인 만큼 대표자 격으로 한 것일 수도 있다.

3. 현대 매체에서


개국에서는 이호재가 분했다. 이호재는 같은 해에 방영한 아래의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정도전으로 출연했다.
조선왕조 오백년 1부 추동궁 마마에서는 MBC 성우 한규희가 배극렴을 연기했다.
용의 눈물에선 태조 왕건의 수달역으로 유명한 김시원이 분했다. 고려말은 간략하게 다루고 조선 건국으로 빠르게 넘어가기 때문에 건국 직후 병사한 그의 비중은 크지 않으나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되자 영광이라며 기뻐하고 옥새를 얻으러 갈 때 대비 안씨를 면전에서 겁박해 벌벌 떨게 만드는 등 상당히 과격하면서도 충직한 인물로 나온다. 그의 죽음에 이성계도 매우 안타까워했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배극렴(정도전) 문서 참고. 배우는 송용태.
[1] 후대인 중종 시기에 기묘사화조광조의 죽음을 불러온 주초위왕의 도참설 역시 이와 완전히 동일한 방법으로 풀이되었다. 아예 남곤국조보감에 보니까 옛날 조준을 가리키는 것 같다며 중종에게 해설을 해 주는 기록도 나온다.[2] 이때 정희계만 지적했다는 것은 정도전과 정총에게는 공이 있다는 뜻이 된다.[3] 남은의 졸기에서도 '배운 것이 없어 식견이 우매한 때문에 강씨(康氏)가 적통(嫡統)을 빼앗으려는 계책을 찬성했다'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건국 당시 남은의 활약상을 생각한다면 이 못 배웠고 식견이 부족했다는 발언은 그의 무식을 지탄하는 것이 아니라 신덕왕후와 정도전 등과 함께 이방석을 세자로 지지한 점을 공격한다는 것이 더 그럴 듯한 이야기다. 남은과 유사한 위치에 있던 배극렴의 졸기 또한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