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철/선수 경력

 




1.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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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원년 도루왕을 기록한 김일권[1]에 이은 80년대와 90년대 왕조를 이룩한 해태 타이거즈의 붙박이 1번타자로 활약해[2] 팀의 우승을 8차례에 걸쳐 이끌었으며, 세 번의 도루왕과 네 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호타준족의 선수였다. 특히 외야와 내야 모두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특히 중견수 수비에 있어서는 라면수비의 원조로 유명하며, 역대 최고의 수비능력을 지닌 중견수로 종종 언급되고 있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304의 타율과 12홈런 31도루라는 매우 빼어난 성적으로 선동열이나 이종범도 수상하지 못한,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이자 2020년 현재 유일의 '''신인왕'''에 등극하였다. 이순철은 현재는 외야수로 유명하지만 입단 당시의 포지션은 3루수로 무주공산이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3루를 매꿔줄 내야 유망주로 기대받았다.[3] 이후 1986년에 국가대표 3루수 출신인 한대화가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영입되자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던 것이다.[4]
이후 86년에는 타율 .257 14홈런 19도루를 기록해 홈런 5위, 도루 7위에 오르며 순조롭게 주전으로 안착했으나, 87년에는 타율 .215에 6홈런 12도루를 기록하며 부진을 겪는다. 그러나 이는 성장통이었고, 포지션 변경으로인한 적응기였을 뿐이었다. 그걸 증명하듯이 이순철은 이듬해인 88년부터 본격적으로 리그를 대표하는 1번타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1988년에는 .313의 타율에 13홈런 58도루를 해내며 한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을 갈아치우면서도 홈런 8위에 오르는 뛰어난 타격실력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1,2차전에서 연속으로 1차전 선제홈런 포함 결승타를 때려내 해태가 시리즈 내내 유리하게 가는데 1등공신의 역할을 하였다. 시리즈가 5차전 이내에서 끝나서 문희수가 6차전에 던지지 않았다면 시리즈 MVP를 당연히 탔을 정도.
1989년에는 .241의 낮은 타율을 기록했으나 12개의 홈런과 24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1번타자 역할을 무난히 수행한다. 그러나 이 시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순철의 존재 때문에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되었던 그 김일권이 62도루를 기록하면서 전년도에 자신이 세웠던 도루기록을 깨고 90년에도 김일권이 48개의 도루로 도루 1위를 기록하며 도루왕 2연패를 달성했다.[5] 1990년에도 이순철은 89년과 비슷한 성적인 타율 .249에 12홈런 26도루를 기록하면서 성적이 굳어지게 되나 싶었으나 이듬해 각성하게 된다.
이순철은 1991년 시즌 타율.276 17홈런 56도루를 기록하면서 부활한다. 김광수와의 경쟁 끝에 쟁취한 도루 1위는 물론 리그 홈런 7위까지 기록하며 해태 타이거즈를 6번째 우승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에 선수로서 최고의 해를 기록한다.
1992년은 이순철은 44도루로 도루왕은 물론 기복이 심했던 타율도 .309를 기록해 리그 9위를 기록했으며 152안타를 기록해 최다안타왕도 달성. 홈런도 장채근을 이어 팀내 두 번째인 21개나 쳐내며 김성한과 에 이어 20-20 클럽에 가입했다. 거기에 1번타자였음에도 76타점을 쓸어담아 리그8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타격에 있어서는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더욱이 '''최다안타왕과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한 이들 중 20-20을 이룬 선수는 이순철이 유일하다.'''[6] 비록 92년은 돌풍을 일으킨 롯데에게 해태가 아쉽게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으나 이순철은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391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팀의 중심 노릇을 톡톡히 했다.[7]
그러나 1993년 이후 이종범의 등장으로 그의 팀내 입지는 급격히 추락하게 되는데, 비슷한 스타일의 이종범은 타격과 스피드, 장타력 등 모든 면에서 이순철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92년의 이순철과 93년에 막 입단한 이종범의 위치를 비교하면 분명 이순철이 압도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93년 투고타저의 영향과 노쇠화의 영향을 받아 이순철은 .253의 타율과 11홈런 29도루를 기록하면서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남겼다. 그는 .280의 타율과 16홈런 73도루를 기록한 이종범에게 밀리게 되며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1번은 이종범의 자리가 된다.
이후 94년 .322의 타율과 8홈런 18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폼을 다시 끌어올리는가 싶더니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85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을 뿐더러, 95년에는 자신의 커리어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96게임에 출전할 동안 타율 .201에 7홈런 13도루를 기록하고, 20개의 병살을 기록하면서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96년과 97년 역시 이러한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210 대의 타율을 기록하며 부진에 허덕이고 있었으나, 팀의 최고참이자 군기반장으로서 선동열의 해외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인한 공백에도 불구하고 팀을 결집시켜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다.[8]
그러나 전술했듯이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성적도 큰 폭으로 떨어지게 되고, 결정적으로 하와이 스프링캠프 때 선수들과 해태 코치진 간의 갈등이 심화된데다가, 선수 대표격이었던 이순철의 유남호 폭행 사건[9]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자신의 텃밭이던 중견수 자리에 97년 김창희라는 좋은 수비실력과 일발장타를 갖춘 유망주가 입단하게 되면서 자리를 뺏기게 되고 주장이었음에도 199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1997 시즌 후 해태 타이거즈에서 방출당했다.

2. 삼성 라이온즈 시절


앞서 언급했던 불화로 인해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했으나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72경기 동안 프로야구 통산 최다득점 기록을 경신한 것을 제외하면 타율 0.213과 2홈런 3도루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을 기록하고 1998년 시즌이 끝나자 바로 은퇴식도 없이 조용히 은퇴하였다. 사실 삼성에는 이미 양준혁[10]을 필두로 그해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신인 강동우와 기존의 최익성과 신동주라는 걸출한 젊은 외야수들이 포진해 있었으며, 같은 이적생이던 김종훈 역시 0.277을 기록했을 정도로 두터웠기 때문에 사실 이순철의 자리는 백업뿐이었다. 그래도 해태시절때 못해본 포수로 수비출전해서 도루저지도 해보면서 포수난에 뒷목잡던 삼성팬들은 이참에 주전해달라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
주전에서 밀려 백업으로 시즌을 보냈으나 LG 트윈스와의 1998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주전 우익수 강동우가 플라이를 잡다가 대구구장 펜스에 부딪히며 골절상을 입자 3차전 선발출장하여 결승타 포함 2루타와 3루타로 4타점을 올리며 삼성의 플레이오프 유일한 승리를 이끌었다.

3. 기타


시간이 지난 후에 김응용 감독과의 껄끄러운 관계는 청산하고 화해한 듯하다. 김응용 감독은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이순철, 선동열과 간간히 만나서 골프도 친다고 언급했다.[11]
의외로 한방 능력이 있는 1번타자이다. 도루를 잘하는 이미지 때문에 특유의 한방 능력이 묻힌 케이스. 그의 선수 시절 최고의 해였던 92년 시즌에 21개 홈런을 기록하기 이전에도 매년 홈런을 12개씩 쳐주면서 종종 홈런 10걸안에 안착했을 정도로, 근래 기준으로도 보기 드문 일발장타력을 가진 1번타자였다. 이러한 장타력을 바탕으로 1번에서 9번까지 어떤 타순에서도 제 활약을 보인 선수로, KBO 최초이자 유일하게 모든 타순에서 홈런을 기록한 진기록이 있다.[12]
1988년의 사상 첫 선수협 결성 시도의 계기와도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13] 당시 해태 소속인 이순철과 김대현이 차를 몰고 가다가 김대현이 교통사고로 죽었는데도 불구하고[14] 아무런 보상 등을 받지 못하자, 다른 프로 선수들이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선수협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5] 하지만 구단주들의 압력과 보복성 트레이드[16]로 인해 무산되었고, 21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수협이 창설된다. 물론 선수협이 제대로 자리잡기까지는 또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전성기 시절 이순철의 주특기는 빠른 발과 뛰어난 펀치력도 있었지만, TV 중계로 야구를 보고 있노라면 타자가 공을 때린 후, 외야를 잡아주면 낙구지점에 이미 위치하여 세상만사 귀찮음은 다 끌어안은 표정으로 공을 캐치하곤 하는 소위 '''라면수비'''였다. 사실은 이 수비는 매우 빼어난 수비실력이 아닌 이상 나오기 힘든 고급 기술이다. 타자의 타격 특성을 파악해서 미리 시프트를 통해 자리를 잡는 것은 기본이며, 타격소리와 동시에 낙구지점을 파악하는 뛰어난 타구판단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빠른 발이 더해져야만이, 중계화면을 외야로 돌리는 그 짧은 시간에 이미 낙구지점에 도착해 공을 잡아내는 것이기 때문.[17] 이후 이병규에게 라면수비의 계보는 계승된다. 이러한 수비능력은 이순철의 피나는 노력의 대가이다. 한대화의 입단으로 외야수로 전향했을 때 이순철의 외야수비 능력은 형편이 없었다.[18] 그러자 이순철은 체육관에서 뒤돌아서 타구소리만 듣고 공을 잡는 연습을 하였다. 정확히는 타구가 뻗어가는 소리를 듣고 타구의 낙구 포착 지점을 판단하는 연습을 기른 것.[19]
[1] 불고기 화형식 사건 등으로 김일권과 앙금이 쌓였던 김응용 감독은 대체 자원으로 이순철이 등장하자 그를 차기 리드오프로 점찍은 이후 김일권을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그런 이순철도 이종범이 등장한 후 하위 타선을 맴돌다가 1997년 김창희가 들어오자 숙청되었다. 사실 하와이 항명사건이라는 대형 사고의 시발점 이순철이기도 했고, 이로인해 김응용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서로 만날정도로 풀어졌다.[2] 93년 이후 1번 타순을 이종범에게 내주게 된다.[3] 84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3루는 뚜렷하게 주인이라 할만한 선수가 없었다. 1루수인 김성한이나 외야수인 김종모가 종종 투입되었을 정도.[4] 1984 LA 올림픽에서 코너 외야수로 차출되는 등 외야 수비 경력은 이전부터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때는 그저그런 편에 속했다.[5] 이후 1993년 전준호가 75개 도루로 최고 기록을 경신했고, 이듬해인 1994년 이종범이 '''84개 도루'''를 기록해 정상에 올랐다. 이 기록은 2010년대에 접어든 후로도 깨지지 않고 있다.[6] 이종범은 1994년에는 홈런 한개가 모자랐고 2003년에는 박한이에게 최다안타왕을 내주었다.[7] 여담으로 92년의 이순철과 가장 비슷한 성적을 올린 선수는 97년 최익성으로 이 둘은 20-20클럽 달성과 높은 출루율로 팀의 1번타자로 활약하면서 시즌 뿐 아니라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했지만, 당시 2승3패로 팀이 한국시리즈 티켓을 놓친 것까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8] 당시 이순철은 팀 내에서는 김성한의 대를 잇는 유명한 군기반장이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해태 2군 감독으로 있던 김성근조차 어떻게 하지 못한 임창용의 머리 염색을 하루 아침에 다른 2군 선수들과 함께 스포츠 머리로 바꾸도록 만들었을 정도.[9] 이것이 그 유명한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이순철이 엉겁결에 휘두른 주먹에 공교롭게도 유남호 코치가 얼굴을 맞아서 시작된 것이다.[10] 이해 주장으로 이순철도 혀를 내두르는 군기반장이었다고 한다. 양준혁 본인도 신인때 갓동님에게 많이 얻어맞았다고(...)[11]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만화로 알아보는 이순철 선수 생활 [12] 반면 세간의 1번타자의 통념과 달리 정교한 타격은 다소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잘 칠 때와 못칠 때의 기복이 지나칠 정도로 극심한 편이였다.[13] 후술하겠지만 이순철 본인이 선수협 결성에 적극적이었다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14] 여기서 이순철은 의자를 젖히고 누워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5] 당시 선수회 결성에 앞장선 대표격 인물들 가운데는 롯데의 에이스 최동원도 있었다.[16] 장효조, 김시진 대 최동원, 김용철(롯데-삼성간 트레이드)이 트레이드 되었다. 둘다 롯데와 삼성을 대표하는 간판스타였다.[17] 고교 시절 야구선수였던 김C가 선수 시절에 가장 존경하는 선수가 이순철이었는데 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고 브레인 서바이벌에서 밝힌 적이 있다. 덤으로 야구하기 매우 귀찮고 싫은 표정인데도 너무나 야구를 잘했기에(...) 그를 롤모델로 삼았다고 말하기도 했다.[18] 외야수 전향 첫 시즌인 1986년 이순철의 실책개수는 10개인데, 이는 시즌 외야수 최다 실책 기록이다.[19] 외야 수비는 넓은 범위를 홀로 커버해야 하는 점에서, 공이 배트에 맞는 타구음을 듣고 재빠르게 공의 위치를 판단하는게 제일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