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화

 

'''한대화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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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화의 수상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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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1994'''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2005'''
'''2006'''




'''1990 KBO 리그 타격왕'''


'''1989, 1990 KBO 리그 출루율왕'''


'''1986 KBO 리그 승리타점왕'''


'''1988 KBO 올스타전 미스터 올스타'''


'''한대화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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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등번호 5번'''
창단

'''한대화(1983~1985)'''

박창언(1986)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8번'''
김종윤(1982~1985)

'''한대화(1986~1993)'''

박재용(1994~1999)
'''LG 트윈스 등번호 9번'''
김상훈(1984~1993)

'''한대화(1994~1996)'''

이병규(1997~2006)
<color=#373a3c>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8번'''
정기창(1996)

'''한대화(1997)'''

윤재국(1998~199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6번'''
박정환(1994~2000)

'''한대화(2004~2009)'''

김한수(2010~2019)
<color=#373a3c> '''한화 이글스 등번호 80번'''
결번

'''한대화(2010~2012)'''

전대영(2013~2014)
'''KIA 타이거즈 등번호 89번'''
미나미타니 가즈키(2012)

'''한대화(2013~2014)'''

유동훈(2015~2018)


'''이름'''
한대화 (韓大化 / Han Dae-hwa )
'''생년월일'''
1960년 8월 29일[1] (64세)
'''국적'''
대한민국
'''본관'''
청주 한씨[2]
'''출신지'''
대전광역시 동구 신흥동
'''출신학교'''
대전신흥초 - 한밭중 - 대전고 - 동국대 [3]
'''종교'''
천도교
'''포지션'''
'''3루수''', 유격수[4], 지명타자[5]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1차 지명 (OB)
'''소속팀'''
OB 베어스 (1983~1985)
'''해태 타이거즈 (1986~1993)'''
'''LG 트윈스 (1994~1996)'''
쌍방울 레이더스 (1997)
'''지도자'''
동국대학교 감독 (1998~2003)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4)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05~2009)
한화 이글스 감독 (2010~2012)
KIA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6] (2013)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14)
'''병역'''
병역특례[7]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OB 입단 시절
2.3. 해태에서의 전성기
2.4. LG에서의 고참 시절
2.5. 쌍방울에서의 은퇴
3. 지도자 시절
3.1.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
3.2.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3.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3.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수석코치 시절
3.4.1. 2013년
3.4.2. 2014년
4. 경기감독관
5. 김성근과의 악연
6. 에피소드
7. 연도별 주요 성적
8. 관련 문서

[clearfix]

1. 소개


전 야구 선수이자 코치 및 한화 이글스 감독, 현 KBO 경기운영위원회 위원. 선수 시절 포지션은 3루수였다.
선수 시절의 등번호는 5번(OB)-8번(해태)-9번(LG)-8번(쌍방울)이다.

'''한대화 감독시절 공식 응원가'''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image]
한대화는 대전 출신이지만 아버지는 평안남도 출신의 실향민이다. 손병희 선생과 친분이 깊었던 천도교인이었다고 한다. 동향 출신인 김응용 감독이 나중에 그를 해태로 부른 데는 이런 인연도 있다.[8] 신흥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고 한밭중과 대전고 시절 유격수와 투수로 활약했다. 그는 원조 파워히터 유격수였다. 하지만 프로야구에서는 명 3루수로 이름을 날렸고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포지션도 3루수였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성인야구 최고의 유격수 김재박이 있었기 때문에 3루수를 맡았다. 그러나 동국대에서 맡았던 주 포지션 은 유격수 와 2루수였으며 프로야구 에서도 선수생활 초기엔 유격수로 뛰었다. 어우흥 대표팀 감독이 4번 장효조 다음에 등장하는 5번타자로 대학 4년생인 한대화를 중용한건 그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탄탄한 하체에 강한 허리힘으로 대학 선수로는 유일하게 국제용으로 인정받았다. 이 대회에서 타격10위에 이름을 올린 한국선수는 한대화가 유일했다. 한대화는 동국대 1학년이던 1979년 4월 부산 시장기에서 타격왕 12타수 6안타 타율 0.500을 기록하며 일찌감치 가능성을 보였다. 그 해 춘계리그에선 3번 타자로 활약했다.
대전고-동국대 체육교육과(1979학번)를 졸업했으며 동국대 체육교육과(1979학번) 졸업반이던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국가대표로 선발, 사실상 결승이나 다름없던 일본과의 최종전[9]에서 2-2로 맞선 8회말 2사 주자 1, 2루 상황에 타석에 나와 풀카운트 씨름 끝에 왼쪽 폴대를 강타하는 결승 3점 홈런으로 대한민국 야구 사상 2번째 세계 대회 우승[10]을 이룩하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날 이후 한대화는 해결사 이미지가 굳어진다.

2.2. OB 입단 시절


[image]
1983년 고향 팀인 OB 베어스[11]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시즌 개막전에서도 3점 홈런을 기록하며 '''3점 홈런의 사나이'''라는 묵직한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그 해 타율 0.272에 5홈런이라는 평범한 성적에 그쳤고, 1984년과 1985년에는 오히려 타율이 2할대 초반으로 뒷걸음질치며 팀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1985년 시즌 직전에는 고향 대전에서 개인훈련[12] 도중 갈증을 해소하던 뒷산 약수터의 돌려쓰는 바가지가 화근이 되면서 간염이 발병해 체력 관리에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고, 거기에 훗날의 신인왕 출신 양심불량자처럼 척추 분리증을 앓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OB가 재일동포 출신 내야수 박창언을 영입하면서 한대화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부상과 A형 간염으로 인해 김성근의 강훈련을 소화할 수 없게 되자 강압적인 훈련으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에 눈 밖에 나게 되고, 불화가 생기게 된다.[13]
[image]
OB 베어스에서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뒤 모습.
결국 1986년 시즌을 앞두고 양승호, 황기선과의 2:1 맞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14]. 당초 한대화는 새로운 고향 팀인 빙그레 이글스로의 이적을 원했지만, 그 당시 빙그레 이글스는 신생 구단이라 선수층이 극히 부족했던 탓에 OB 베어스로서는 한대화와 맞바꿀 만한 전력감이 없었던 바, 해태 타이거즈와의 트레이드를 적극으로 추진한 것이었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한대화는 결국 임의탈퇴 공시되며 몰렸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임의탈퇴 사례다.

2.3. 해태에서의 전성기


하지만 동국대학교 시절 은사였던 김인식 당시 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의 설득 끝에 해태 타이거즈 이적을 받아들였고[15],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후에는 OB 베어스에 있을 때와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며 대활약, 왕조를 이루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주전 3루수로 활약한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였었고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한 초반에는 2루수로도 출전했으나 붙박이 3루수로 자리잡으면서 타격도 살아나고 수비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 3루수였던 이순철중견수로 자리를 옮기고, 중견수였던 김일권은 벤치 신세로 전락하는 포지션 연쇄이동이 일어났다.[16]
한대화가 해태행을 거부했던 것은 고향 팀인 빙그레로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긴 했지만, 해태 특유의 강도높은 팀 분위기와 김응용 감독의 철권통치를 두려워한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대화가 해태 유니폼을 입자, 김응용 감독은 되려 한대화에게 훈련할 때 시간 맞춰 올 생각 말고 오후에 느지막히 운동장으로 출근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는 간염을 앓고 있던 한대화가 늦잠을 자고 몸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한 김응용의 배려였다.[17]
이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반드시 실력을 톡톡히 보여 주는 클러치 히터의 면모를 과시하며 김성한, 이순철과 함께 당대 최강의 타선을 이루며 1986년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6회 우승에 큰 공을 세운다. 3루 수비에 있어서도 좌우 수비폭은 넓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글러브 핸들링과 정확한 송구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연봉 문제 등으로 구단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한대화는 매년 연봉 협상에서 함께 주축 타자로 활약했던 김성한에 준하는 대우를 해 줄 것을 해태 구단에 요청하였으나, 구단의 대우는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해 관계가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 이유로는 원년부터 전라도 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성한과는 달리, 한대화는 비호남에 트레이드로 합류한 '굴러온 돌'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의견이 있다.[18]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해태에 있을 때도 고향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한편 김응용 감독과의 관계 악화가 트레이드의 원인이라 보는 이들도 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1993년 올스타전 때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한 것. 당사자들은 그저 장난삼아 저지른 해프닝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카메라에 잡힌 장면을 보면 꽤나 살벌한 분위기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 한대화는 “당시 감독님이 오해하셨다. 슬라이딩을 하다 손을 다쳐서 아이싱을 하고 있었는데 대기타석에 없다는 이유로 태업을 지적하셨다. 나도 화가 났지만 이틀 뒤 전화를 하셨다. ‘내일 훈련 나와’라고. 그래서 훈련을 나갔다”고 설명했다.# 하여간 1994년 LG로의 트레이드는 이런 상황을 기반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삼성 라이온즈 시절 김응용이 사장으로 부임했을 때 코치로 부임한 것을 보면, 그렇게 불화설까지 돌을 문제는 아니였던 듯 하다. 어찌 됐든, 한대화가 간염 때문에 OB 감독 김성근한테 버려지고 온 해태에서 성공적인 재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김응용 덕분이고, 이후 인터뷰에서도 김응용에 대한 감사를 아끼지 않는다.

2.4. LG에서의 고참 시절


[image]
LG 트윈스 시절.
[image]
2001년 8월 선동열과 같이 나와 시구와 시타를 하고 인사하는 장면.
아무튼 1993년 시즌 종료 후 팀 동료 신동수와 함께 김상훈, 이병훈과의 2:2 트레이드로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 한대화는 LG 트윈스에서 팀의 4번타자를 맡으며 유지현[19], 김재현[20], 서용빈[21] 3인방과 노찬엽[22], 김동수 등의 중견급 타자들과 더불어 견고한 타선을 구축하여 신바람 야구의 한 축으로 1994년 한 번 더 한국시리즈 우승의 축배를 들었다. 개인통산 총 7회째 우승이었다. LG 트윈스로 이적하자마자 해태와는 너무 다른 팀 분위기[23] 그러니깐, 해태가 군기반장 팀이라면 LG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팀.[24] 이후 한대화가 기강을 잡았다는 썰 외에도 타 팀의 선수[25]가 LG에 가면 자유를 넘어 팀 분위기가 너무 풀어졌었다. 라는 썰을 많이 푼다. 대표적으로 경기를 졌는데, 신인들이 거울보며 포마드 젤을 바르며 나갈 준비를 한다던가, 명품 옷 등을 치장하면서 여자친구를 자주 만나러 간다거나, 라커룸 응원을 안한다는 등..
94-95 LG는 최강의 팀이었고, 한대화 또한 알려진대로 팀 내 기강을 잡는 역할도 했지만 신바람 야구의 틀 안에서 후배들의 기둥 또는 큰형님 역할을 했다. 주로 위의 신인 3인방(유-김-서) 뒤에서 4번 타순을 쳤는데, 경기의 결정적인 순간에 앞에 살아나간 주자들을 묵묵히 큰거 한방으로 불러들이곤 했다. 대표적 사례가 1994년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2타점 적시타와, 1995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선제 투런홈런이다. 특히 95년 당시 1차전에서 LG가 자랑하는 에이스 이상훈[26] 김용수가 난타당하면서 뜻밖의 7대 8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 팀 분위기가 급속히 가라앉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다음날 고참인 자신이 홈런으로 팀 승리를 이끌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중요한 순간마다 해결사 역할을 잘 해냈다. 95년까지는 수비 또한 전성기 못지 않았는데 체력 안배차원에서 이광환 감독이 송구홍을 3루로 돌리고 한대화를 DH로 기용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런데 96년이 되자 정말로 수비에서 포구 실수 등 급격히 빈틈을 보이기 시작하며 팬들을 안타깝게 했고 결국 구단 입장에서 트레이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빌미가 된다.
당시 경기 도중 중요한 시점에 한대화가 나오면 구장이 일순 조용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한대화에 대한 믿음이 컸다. 그가 찬스에 유난히 강했음을 보여주는 일면. 이런 이유로 인해 당시 언론에서 붙여준 별명이 해결사. 그러나 그가 해결사였던 이유는, 다름아닌 그가 타이거즈 시절 9시즌동안 wRC+ 150을 찍었던 당대의 초 강타자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득점권의 사나이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해결사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LG에서도 그대로였다. 특히나 94년~96년은 끔찍한 투고타저이면서 잠실을 쓰며 타격에는 좀 손해를 보았지만, 득점권에서는 정말 해태 시절과 비슷하게 결승타점이 많았다. 유달리 그에게 홈런보다는 팀을 위해서 단타, 팀배팅을 할 줄 아는 선수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고, 그것이 사실인 것. 홈런을 원했다면 해태동료 김성한, 장채근 같은 선수들이 많았다. 그래도 현역시절 20홈런도 넘겼었다.

2.5. 쌍방울에서의 은퇴


[image]
말년을 보낸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1996 시즌 후 투수 신영균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되나, 당시 노장이었던 한대화에게 이전같은 3루 수비는 보이기 힘들었고 지명타자 슬롯도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쌍방울 트레이드 당시 감독은 김성근. OB 베어스 시절 갈등이 있었던 사이었는데 김성근식 훈련에 맞지도 않았고, 소화도 하기 힘들었던 한대화는 구석에 몰리고 만다.[27] 한대화는 시즌 중 은퇴를 결심하고, 이에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은 리그 역사에 빛나는 명 3루수인 한대화에게 은퇴식을 준비해 주려 했으나,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에서 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은퇴식이냐며 거절했다. 결국 한대화는 1997 시즌 후 쌍방울에서 임의탈퇴 공시되면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
통산 성적으로 1983~1997년까지 15시즌 동안 1,331경기에 출장, 타율 0.279, 홈런 163, 타점 712, OPS 0.820을 기록. 단일 시즌 기준으로 최고의 해였던 1990 시즌에는 타율 0.335(그해 타격왕),[28] 홈런 15, 타점 86, OPS 0.937을 기록.

3. 지도자 시절



3.1.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


쌍방울 레이더스를 끝으로 1997년 현역생활을 마감하고 그해 겨울에 바로 동국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했었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었던데다가, 프로 출신 1호 대학 감독이었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당시 나이가 37세로 상당히 젊은 나이.[29]
그러나 2000년에 체육특기생 입학과 관련, 학부모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약식기소되었다는 어두운 이면이 존재한다.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사건 이후 2003년까지 동국대 감독으로 재직. 이 사건은 완전히 잊혀지는 듯 했으나…. 이후에 한대화까들에 의해 성지가 발굴되었다. 다만 처벌을 받았다면 자리 보전은커녕 야구계에서 퇴출됐을 것이고[30], 이후 별다른 결과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면 정식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3.2.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image]
삼성 라이온즈 No.86
한대화(韓大化)
2004년 해태 시절 둘도 없는 선후배 사이였던 선동열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하자 삼성의 타격코치로 영입된다. 그리고 2005년부터는 수석코치로 활약.
이 시절 동국대 제자였던 박한이를 만나 재회했다. 그리고 2009년 첫 FA 때도 상담을 해줬다고.
삼성 타선의 안습이 이 때 부터 발굴 되었을지 모른다. 아마, 삼성 컬러는 뻥타선인데 여긴 소총부대 + 투수진으로 싸우는 타선으로 만들어 버린 주범 1위. 그래서 그런지 본인 코치 흑역사 1기인 2009년 여기도 포함이다.
물론 나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이마양의 해체 후 김응용과 선동열 시기 전력누수가 꽤 있었다. 당장 리드오프를 맡던 강동우는 트레이드, 이승엽은 일본진출에 돈질러서 사온 심정수는 한두해 반짝하다가 부상으로 은퇴, 외국인 타자들도 그저 그랬다. 진갑용,박진만,김한수,김종훈 등은 노쇠화를 피하지 못했고 양준혁은 꾸준했지만 선동열 시기 갈등을 비롯해 성적에 기복이 좀 있었다. 즉 필연적으로 타선 리빌딩을 해야했고, 당장 유망주들이 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당시 감독은 지키는 야구, 스몰볼을 즐긴 선동열이였기에 가시적인 성과나 나오긴 힘들었다.
그러나 후에 강봉규,신명철이 20-20을 찍는 등 활약했고, 대타자가 되어가는 박석민-최형우-채태인 타선을 구축한다.[31]

3.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한화 이글스 No.80
한대화(韓大化)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0
'''한화 이글스'''
133
49
82
2
8위
-
2011
133
59
72
2
6위
-
2012
105
39
64
2
8위[32]
-
<color=#373a3c> '''총계'''
<color=#373a3c> '''371'''
<color=#373a3c> '''147'''
<color=#373a3c> '''218'''
<color=#373a3c> '''6'''
<color=#373a3c>­

3.3.1. 2010 시즌


2009년 9월 24일, 계약이 만료된 김인식 감독의 뒤를 이어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비록 빙그레 혹은 한화에서 선수생활은 하지 않았으나 구단역사상 첫 연고지역(대전) 태생 감독이라 지역내에선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2009시즌이 종료되자마자 팀의 주축 선수였던 김태균이범호가 모두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해버렸고, 마무리투수였던 브래드 토마스마저 미국으로 떠났다. 그야말로 차포 떼고 시작하는 격.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이게 '''리빌딩이냐 재창단이지!!'''라는 안습한 대사까지... 그리고 왠지 시즌이 진행될수록 만화 속에서 자꾸 개그 캐릭터가 되어가고 있다. 세이콘에 의해 지옥으로 보내질 때 했던 대사가 '''음…, 차라리 지옥이 나을 수도 있지.'''실제로도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위트있고 재밌는 답변이 많다. 주로 암울한 팀 사정을 빗댄 '''자학개그'''지만. 한술 더 떠 남의 팀 트레이드때마다 "우리도 선수 필요한데 선수 좀 주세요." 하면서 구걸개그까지 시전한다.
별명으로 대전간디, 대전호구, 돌대화가 추가되었다. 보다시피 하나같이 안 좋은 의미의 별명들.
자세한 것은 한대화/2010년 문서 참조.

3.3.2. 2011 시즌



2011년 07월 23일 올스타전에서.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0에 유일한 현역 1군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2011년 들어 한화가 작년과 같이 어이없이 무너지지 않으며 탈꼴찌에도 성공하고 5월에는 SK 와이번스와의 3연전에서 야신 김성근 감독과의 지략싸움에서까지 승리를 거두며 와이번스를 터는 등 선전하자 팬들 사이에서 새로이 나온 별명은 '''야왕'''. 한대화 본인은 야왕이란 별명을 아들에게 전해 들었고, 비교적 만족하는 듯 하다. 간혹 야황(野皇)으로 불리기도.
자세한 것은 한대화/2011년 문서 참조.

3.3.3. 2012 시즌


[image]
2012년
땡깡왕 돌대화.
시즌 개막 전에는 선수들이 감독의 재계약을 원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언론과 팬들이 호의적이었다. 2011 시즌에 끈기를 보여주며 6위에 올랐고 한대화의 작전 야구가 잘 통하기도 했으니 기대가 있을 만했다. 거기다가 김태균박찬호가 팀에 합류하면서 올해는 정말 뭔가 일을 낼 것만 같이 보이기도... 희망과 기대에 찬 2012 시즌이 개막, '''그리고 한화는 멸망했다'''.
팀의 총체적인 부진도 그렇고 본인의 용병술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재계약을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중도 퇴진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화의 부진은 계속되었고, 결국 9월도 안 됐는데 한화는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다. 이에 대한 대가로 한화 프론트는 태풍 볼라벤이 상륙하기 전 밤이었던 8월 27일 한대화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한대화 감독의 후임으로 그의 스승이었던 김응용 전 해태/삼성 감독이 선임되었다.
자세한 것은 한대화/2012년 문서 참조.

3.3.4. 총평


부임 당시 한화 감독으로 한대화가 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언론이나 팬 모두 다음 한화 감독에게 펼쳐진 것은 고난과 욕의 행군 뿐이라고 한마음 한뜻으로 말하던 상태. 심지어 앞으로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구단의 총알받이 역할 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즉, '''누가 한화 감독이 되더라도 자신의 경력만 망칠 게 뻔한 상태'''였던 것.
그런데 갑자기 이전까지 한화 구단과 별 연관성이 없었던 한대화가 감독에 임명된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등장이었고, 한화 감독직을 수락한 한대화는 대인배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었다.[33]이 때문에 감독 부임 초창기에는 웬만하면 까지 말자는 공감대가 은연중에 형성돼있었다. 즉 반쯤 까방권을 획득한 상태로, 2010년 그의 행적이나 팀 성적에 대해선 어느정도 눈 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2011년 '''야왕'''이라 불리며 인터넷 야빠계의 스타 자리에 등극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2010년에 비해 한대화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거나 한화의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운이 좋았던 시즌이었다... 그저 한때 유행이었을 뿐. 사실 세이버메트리션 사이에서는 2011시즌 한화의 6위 달성이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 미스테리'''일 정도.[34]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2년에는 박찬호, 송신영을 영입하고 김태균이 복귀하여 갑작스럽게 한화 4강 가능이라는 설레발이 등장한다. 결국 이전 해의 야왕 신드롬과 그 해의 전력보강 설레발로 어느 정도 성적은 내야 되지 않겠느냐는 팬들이 늘어났으나,
결과는 '''망했어요.'''
이 과정에서 한대화가 보여 준 감독으로서의 능력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인간성 좋고 유머감각 있기로 소문난 사람이라 기자들 상대로 드립치는 능력만은 전임 감독 정도로 탁월하긴 했다. 그마저도 성적이 워낙 좋지 않자 기자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곧 잊히고 말았다. 그밖에 불펜 운영, 2진급 선수 발굴 및 활용, 작전 수행 능력, 어려운 상황에서의 리더십 등등은 평범 혹은 평범 이하였다. 특히 지나친 좌우놀이나 1루에 주자가 나갈 시 자동 번트, 히트 앤드 런[35] 등등 유치원생도 예상가능한 작전을 즐겨 썼는데, 한화 선수들은 이마저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신통한 모습을 보이며 번번이 실패. 돌 같은 감독에 돌 같은 선수(...)가 무엇인지를 팬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2012년은 각 팀의 전력평준화 현상이 유독 심한 해로 6개 팀이 옹기종기 모여 비슷한 성적을 찍어준 시즌인데, 유독 한화만 저 멀리 아래쪽에 머물러 있으니 팬들로선 환장할 노릇.
이로 인해 2012년 중반기가 되자 부임 당시 획득한 까방권이나 2011년 야왕놀이 따위는 모두 잊고 소수의 냉정한 시각으로 지켜보던 팬들을 제외하고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감독 경질을 외치게 된다. 심지어 몇몇 팬들은 야왕이라고 불렀던 것을 창피하다고 까지 말하는 상태. 야왕이란 별명도 '야구 왕병신' 이라며 까는 용도로 전락했다.
결국 부임 당시 ''''누가 와도 망함''''이라고 사람들이 예상한 그대로의 결과. 누가 감독으로 오더라도 현 한화 이글스의 성적에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한대화는 리빌딩이란 최소한의 목표도 없이 타팀 30대 노장선수 영입에 유망주를 다 퍼다 주고도 성적이 똥망했기에 까여야 마땅하다. 리빌딩은 고사하고 암흑기만 연장시킨 꼴... 그야말로 잃어버린 3년이 되었다.
2011년 탈꼴지 안했으면 8888을 찍을 뻔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의견도 있고, 프런트의 삽질을 감독 한명으로 덮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골수팬의 의견도 무시 할 수 없다.[36]
그래도 업적을 굳이 꼽아 보자면 그의 재임 기간에 최진행, 김혁민, 안승민, 오선진, 송창식 등의 성장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꼽아 볼 수 있겠다. 2009년 한화 방출자 명단에 좌완투수 박정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박정진을 구제한 사람이 한대화로 밝혀졌다. 좌완이라 살아남았다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17시즌까지의 박정진의 존재를 감안하자면 그래도 업적이라 할 만하다. 만일 10시즌 이후 박정진마저 없었다면.
2015 시즌 후 후임 감독들의 삽질로 인해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저 당시 프런트가 역사상 최악이었고 선수 복을 누리지 못했을 뿐, 만약에 한대화에게 정근우, 이용규, 권혁, 배영수, 송은범, 윌린 로사리오, 제라드 호잉, 최재훈, 정우람, 박상원, 송광민[37]이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38]위의 저 선수들이 가세하기 전과 후는 확실히 타격이나 수비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비교대상으로 거론되는 그 인간은 저 중 호잉과 최재훈과 박상원을 제외하고 전부 갖고 있었음에도 그 꼴을 낸거다.
2012년 한화 이글스의 성적은 분명 감독이 경질될 만한 시즌이였다. 다만 2012년 이미 늙어 버린 박찬호와 김태균 둘만의 영입으로 '''탈꼴찌를 넘어 상위권이 가능하리라고 착각했던 프런트와 팬들의 설레발'''이 가장 큰 문제였다. 2012시즌의 한화와 한대화에 대해 4강 이상을 노려볼 만한 전력으로 일관되게 8위를 함으로써 팬들의 기대를 개발살내버렸을 뿐 아니라 선수와 팬 모두에게 한화는 답이 없다는 패배근성의 그림자를 확실하게 드리운 역대 최악의 시즌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사실 한화의 전력은 4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2012시즌 직전 자체 전력평가에서 한대화 감독 이하 코칭스탭들은 불안한 센터라인 수비(특히 포수)와 불확실한 선발로테이션을 고려해서 대략 6~7위를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구 모르는 프런트와 모기업의 높으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발끈하면서 작년에 공동 6위였고, 올해 박찬호 김태균이 가세했으니 4강은 기본이고, 가급적 우승을 목표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전반적인 성적과 평은 좋지 않으나 2011년의 성적만이 평가가 갈리는 시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후 한화가 전폭적인 투자를 했음에도 2015년이 돼서야 겨우 6위를 찍어본 점 때문에 더욱 평이 갈리게 되었다. 부정적으로 평하는 쪽은 2011년의 성적은 우연히 좋은 것이고 그 전 및 그 후에는 본 실력대로 8위를 찍은 것이라고 본다. 근거로는 2011년의 아무 이유없이 높은 대타성공률이나 4할도 채 되지 않았던 낮은 피타고리안 승률 등을 꼽는다. 긍정적으로 평하는 쪽은 아무리 운빨이더라도 그게 1년이나 지속될 리 없다고 보는 측이다. 밖에선 알 수 없지만 뭔가 잘 운용했기에 좋은 성적이 나온 것이지 1년 내내 운이 좋겠냐는 논리. 또한 만약 운빨이라 쳐도 어쨌든 888899라는 전무후무한 비밀번호를 찍을 뻔한 걸 막았다는 점만은 좋게 평가한다.
2016년 들어서는 재평가의 움직임이 많이 보인다. 지금의 선수층을 가지고 8~9위 싸움을 하는 김성근 감독과 비교되면서, 전근표를 4번으로 쓰던 시절에 저 정도면 훌륭하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으며, 김성근이 경질당하기는커녕 한화 이글스에서 사실상 1인자로 군림함과 동시에 선수 혹사는 멈출 줄을 모르니, 이 쯤 되면 한화 이글스 구단 사장직을 맡자는 목소리가 간간히 나올 정도다.[39]
일부 팬들은 지금보다 안 좋은 팀 상황에서 어떻게 6위를 했는지에 대해 재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결론은 2011시즌이 '''플루크 시즌'''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플루크는 기아 2군에서 그대로 밑천이 드러났다. 하지만 한대화의 감독 시절의 업적이 2015년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엄청난 혹사 논란과 육성 문제까지 겹치면서 재평가받고 있다. 최진행 발굴, 박정진 등용, 김경언 트레이드부터 시작해서 조인성 트레이드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대수 영입에 없는 선수로 6위를 한 것까지. 그 당시 2015년만큼의 지원이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한화 팬들이 한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급 지원을 받은 김성근 감독이 끝없는 추락을 하기 시작하자 한대화는 진정한 야왕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 2018년에 우주의 기운이 한화로 모인 덕에 비밀번호는 한 번 끊었으나 그 후 베테랑과의 불화와 멍청한 경기운용, 선수기용으로 좋지 못한 성적을 기록한 한용덕의 이면이 드러나면서 '차라리 15시즌 망했다 치고 한대화에 기회 좀 줬으면 플레이오프까진 갔겠다'며 무한으로 재평가받는 중. 한대화가 감독이었던 시절 한화 이글스의 라인업을 보자. 눈물만 나온다.
한대화 감독 재임시기엔 선수 - 감독간의 위계 없이 사이가 굉장히 편안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를 한대화가 밝히기로는 어느날 갑자기 선수 '''와이프'''에게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부부싸움을 했다'''며 한 감독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감독으로서 이런 고민도 들어줘야 하나 생각들었지만 그 정도로 선수들에게 신뢰받고 있단 생각에 뿌듯했다고 한다.[40] 하지만 이후 한대화가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자기 스승그 후임자가 팀을 맡던 시절엔 선수들이 굉장히 위축되고 감독과 위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선수들이 도통 감독에게 다가가기 어려워져 버렸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 이후 한용덕 감독이 10년에 걸친 비밀번호를 끊으면서 명장 소릴 들었으나 다음해 베테랑과의 갈등이 계속 드러다더니 준수한 외국인 타자와 10승 투수 2명[41]을 가지고도 9위를 찍고 그 다음해엔 구단 최다연패인 14연패를 찍고 사퇴하면서 '한대화에게 배스나 션 헨 같은 선수말고 서폴드같은 선수라도 있었으면 중위권은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3.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수석코치 시절


KIA 타이거즈 No.89
한대화(韓大化)
[image]
2013년, KIA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라는 호칭으로 타이거즈 공식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42]
2012년 10월 24일, KIA 타이거즈가 2군 감독으로 한대화를 선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선동열이 삼성 감독 시절 수코를 역임한 바 있었기 때문에 선동열과의 인맥으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잘리자마자 다시 부활...

3.4.1. 2013년


2012년 시즌 후 KIA가 본격적으로 2군 물갈이를 시작하면서, 2013년에는 2군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2군에 다녀온 안치홍이 컨디션을 회복하고, 무엇보다도 김주형이 살아나면서(!) KIA 팬덤에서 야왕매직은 실존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즌이 지나면서 여론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퓨쳐스리그 남부리그 최하위권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타자진이나 투수진 모두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투수 전향 1년차 김윤동이 과부하에 걸려 재활군으로 가면서 선수 발굴은커녕 없는 자원마저 갉아먹냐며 비난을 들었다. 당연히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도 '''돌대화'''라고 까였다. 어차피 선동열 사단인 점도 있고, 선동열 감독이 경질된다 하더라도 후임 감독으로 선임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3.4.2. 2014년


2013년 10월 5일 이순철 수석코치가 경질되면서 후임 수석코치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10월 17일에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이후 2014 시즌 동안 선동열 감독을 보좌했고, 선동열이 자진 사퇴하고 김기태 신임 감독이 부임하면서 같이 정리되었다.

4. 경기감독관


[image]
2015년부터는 KBO의 경기 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겉보기엔 편해 보일지는 몰라도, 여러모로 신경쓸 일이 많고 심판들에 대한 평가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바쁘다고 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감독관직에 대해서 상당히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하며, 감독을 다시 하거나 해설을 맡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이상한 팬들은 한대화가 인터뷰에서 ''다시 한화 감독이 된다면 감독의 색을 입히기보다 팀컬러를 살려 공격적인 야구를 하겠다''고 밝힌 것을 거론하면서 다시 감독으로 모셔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감독으로서 온갖 고난을 겪어보았던 한대화 본인이 또다시 감독직을 맡을 의향은 거의 없어 보인다.

5. 김성근과의 악연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대화의 입장에서 김성근은 스승이 아니라 원수다. '''
일반적으로 SK 팬이나 OB(현 두산) 팬들은 김성근이 감독을 하는 동안 그 밑에서 활동했기에 다른 여느 감독들(조범현, 김경문, 박종훈 등등)과 같은 김성근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썩 달가운 소리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43]
일단 OB 시절 한대화가 훈련 중 A형 간염으로 쓰러져 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자 훈련광인 김성근 눈 밖에 나면서 구단과의 사이도 틀어지게 되었다.[44] 이후 선수 말년에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은퇴할 때도 구단 측에서는 ''''그래도 3루수 레전드니 은퇴식은 챙겨줄게'''' 하는 마당에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잉여에게 무슨 은퇴식?'''' 이라고 김성근이 은퇴식을 못하게 압력과 디스를 넣은 통에 더 사이가 틀어졌다. 지금도 표면적으로 디스는 걸지 않지만 아마 속은 상당히 곪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 류현진 등판으로 김성근과 한대화 사이에 설전이 오갔을 때의 분위기에 의하면 여전히 좋지 않은 관계로 보인다.
게다가 김성근 밑에서 활동한 시간보다는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이후 김응용 감독과 야구를 한 시간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선수시절만 해도 김응용과 더 오래 있었으며, 코치직도 김응용과 같이 시작했다. 물론 이 당시엔 김응용삼성 라이온즈 사장. 지금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걸 보면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애초에 김성근의 빠돌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느 선수와 함께 했었으니 가르침을 받았다며 원포인트 레슨받은 박찬호고 김병현이고 다 감독님 제자!! 타령을 하니 김성근 제자 타령은 걸러 들어야한다.[45]

6. 에피소드


  • 대전 출신으로 대학교 빼고 초중고 모두 대전에서 다닌 레알 대전광역시 토박이지만, 광주광역시를 연고지로 두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탓에 올드 해태 팬들 중에는 그를 호남 출신으로 아는 사람도 많다.[46] OB 시절 트레이드 대상 명단에 올랐을 때도 자신은 새로 창단될 대전 연고 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가기를 매우 희망했지만 구단은 그 말을 무시하고 해태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게다가 한대화가 한국시리즈에서 고향팀 빙그레 상대로 홈런도 치고 적시타도 때리는 등 해태의 승리에 일조해 빙그레를 응원한 충청권 야구팬들에게 더 미움을 받았다. 때문에 한동안 대전 원정경기를 갈 때 야구장에 "배신자 한대화"라는 현수막이 걸렸을 때 상당히 억울함을 피력하기도 했다. 훗날 디씨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조공을 받았을 때 자신의 이름이 마킹된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을 보면서 뭔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고...
  • 성격이 상당히 순하고 유들유들한 편이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심판들에게 항의할 때 한대화 감독이 만만해 보이는지 심판들이 막 뻗대는 경향이 있다.
  • 1986년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어 그 해 타율 0.298, 14홈런, 66타점으로 맹활약한 한대화는 이듬해인 1987년 시즌 타율이 0.236로 급전직하 했는데 이유는 원래 시력이 안좋아서 콘택트렌즈를 착용했지만 렌즈가 자주 말라서 경기 도중 화장실에서 몇 번이고 안약을 넣는 불편함 때문에 아예 맨눈으로 시합에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다못한 한 기자가 "렌즈가 그렇게 불편하면 안경을 쓰는게 좋지 않느냐" 라고 묻자 순둥이였던 한대화는 "그러면 (김응용)감독님이 건방지다고 하실 것 같다"[47]며 주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기자가 대신 김응용 감독에게 "한대화 선수가 경기할 때 콘택트렌즈가 불편하다고 하는데 안경을 써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봤는데 김응용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답하길,
> 허허허, 아니 야구만 잘한다면 안경 아니라 쌍안경을 쓰고 나와도 누가 말린대?[48]
그렇게 허락을 받은(?) 한대화는 안경을 쓰기 시작했고, 다시 본래의 실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 한대화의 안경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 더. 1990년 8월 1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사직 원정경기 도중 1루에서 2루로 진루하던 한대화는 상대 야수가 잘못 던진 공에 얼굴을 맞아 안경이 깨지고 오른쪽 뺨을 여섯 바늘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이후 정신을 차린 한대화는 구단 측에 "안경도 신체에 일부이니 경기 도중에 깨진 안경값도 보상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해태의 이상국 운영부장은 "그럼 경기 도중에 금이빨이 빠져도 물어줘야 하냐?" 라고 되받아치며 그냥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한대화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상국 부장은 친구이던 판사에게 유권해석을 구했고, 판사는 "안경도 신체의 일부라고 간주하는 것이 맞다"는 답을 내놓았다. 결국 이상국 부장이 "안경 렌즈는 가격이 천차만별이니 알아서 하라. 구단은 안경테 값만 주겠다"며 통보하자 한대화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안경테 값 6만 6천원을 받았다고 한다.
  • 독실한 천도교 신자다. 부친이 대전의 천도교 교구장이었다고. 한창 리즈시절 인터뷰에서 치성을 드려 성적이 잘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천도교의 교세가 워낙 쪼그라든 탓에 아마 천도교 신자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한대화일 것이다.
  • 김시진과 무척 친하다. 고교부터 대학. 프로시절, 코치시절에도 같이 있었던 적이 없는데 사이가 가깝다. 한화 이글스 감독 당시 넥센전이면 넥센 덕아웃으로 찾아가 김시진에게 "꼴뚜기 형님"이라 별명을 부르며 아이스크림을 먹여주는 정도로 친하다. 이런 관계로 한때 둘의 관계를 소재로 한 혀갤문학이나, 칰갤문학이 판치기도 했다.
  • 참고로 헤비 스모커다. 실제로 경기 중에도 담배를 피운다고 인터뷰에서도 직접 밝힌 적이 있고, 한화 감독 시절에도 경기 도중 작전이 실패했다거나 팀의 대량실점 등 경기가 제대로 안 풀리면 수시로 덕아웃 뒤 출입문으로 나가는 모습이 심심찮게 비춰졌다. 여기에 2012년에는 한대화 감독을 비출 때 "한 대 피우고 싶으시죠?" 라는 문구와 함께 니코스탑 광고가 깨알같이 뜨기도 했다.
  • 동대 3년 선배인 강석우와 친한 편인지라, 그 영향으로 강석우가 한화의 잠실 원정 경기 직관을 오기도 했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OB
88
313
.272
85
17
'''5'''
(2위)
5
44
39
4
19
.406
.313
1984
74
189
.238
45
8
1
1
16
22
5
29
.307
.339
1985
38
53
.226
12
1
0
2
7
5
0
1
.358
.241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6
해태
103
342
'''.298'''
(5위)
102
'''24'''
(2위)
2
'''14'''
(5위)
'''66'''
(2위)
50
(10위)
8
42
'''.503'''
(2위)
'''.372'''
(5위)
1987
94
301
.236
71
16
0
'''13'''
(5위)
36
39
5
52
.419
.347
1988
101
356
.320
(7위)
'''114'''
(5위)
18
(8위)
1
'''18'''
(3위)
57
(6위)
51
6
51
'''.528'''
(3위)
.403
(7위)
1989
106
358
.279
100
14
2
'''13'''
(5위)
63
(6위)
52
15
81
.439
(7위)
'''.409'''
(1위)
1990
119
418
'''.335'''
(1위)
'''140'''
(2위)
20
(7위)
3
'''15'''
(5위)
'''86'''
(2위)
'''73'''
(2위)
10
76
'''.505'''
(5위)
'''.432'''
(1위)
1991
92
336
.301
101
17
3
'''22'''
(4위)
73
(8위)
62
8
55
'''.565'''
(3위)
.392
(7위)
1992
110
362
.268
97
16
1
20
(9위)
74
(9위)
69
8
67
.483
.379
1993
107
335
.266
89
13
1
13
(8위)
46
46
4
53
.427
(9위)
.364
(10위)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LG
106
357
.297

106
15
1
10
67
(9위)
49
3
53
.429
.384
(6위)
1995
98
295
.241
71
13
0
8
37
25
1
26
.366
.300
1996
52
138
.232
32
5
0
5
16
12
1
16
.377
.312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쌍방울
43
111
.225
25
2
0
4
24
16
1
20
.351
.344
<color=#373a3c> '''KBO 통산'''
(15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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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1] 음력 1960년 7월 8일[2] 항렬자를 쓰지 않았으나, 문양공파 37세손이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3] 체육교육과(1979학번)[4] OB 베어스 시절 및 1987년, 그 외에도 이따금 유격수로 출전하기도 했다.[5] LG 이적 후로 지명타자로서 출전하는 빈도가 높아졌다.[6] 사실상의 2군 감독[7]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8] 정작 한대화는 아버지가 실향민인 것을 코치 때야 밝혔다고 한다. 선수 때 그 말씀을 드렸으면 더 잘 봐줬을 텐데는 덤.[9] 당시 쿠바가 불참한 가운데 9개 국가가 풀 리그로 대회를 치루었고 대한민국일본간의 최종전을 앞두고 공교롭게도 두 나라가 6승 1패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대한민국일본의 패배는 모두 이탈리아에게 당한 것으로,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그것이 유이한 승리였다.[10] 첫번째 우승은 1977년 니카라과 슈퍼 월드컵 대회였고, 당시 김응용이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11] 당시 OB 베어스대전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었다.[12] OB 구단에서 주도한 보문산 동계훈련 때라는 설도 있다.[13] 이 때 김성근은 한대화가 훈련을 하기 싫어서 꾀를 부린다고 여겨서 더 심하게 훈련을 시켰고, 한대화는 더욱 심각히 은퇴를 고민했다.[14] 전년도에 친 2홈런이 해태전(동대문)에서 기록됐다[15] 공식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한대화의 부친 고향이 김응용 감독과 같은 평안남도 평원군이라는 점이 작용했다고 한다. 영입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결국엔 영입에 성공했다. 김응용이 보이지 않은 조력자인 셈이다.[16] 김일권은 1984년 이른바 불고기 항명 사건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난 상태였다.[17] 알다시피 간질환 환자에게 충분한 휴식은 보약이나 다름이 없다. 훗날 인터뷰에서 한대화는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든 스승님은 김응용이라고 강조했다.[18] 이는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뉴욕 양키즈의 황금기를 함께 이끌었던 미키 맨틀, 로저 매리스 중에 양키즈에서 내내 활동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맨틀이 스포트라이트를 누린 반면, 타 팀에서 트레이드되어 온 매리스는 줄곧 맨틀의 그늘에 가렸던 것과 비슷하다. 김성한이 맨틀, 한대화가 매리스의 포지션이었던 셈.[19] 94년도 신인왕[20] 최연소 20-20를 만들고 당해 최연소 KBO 골든글러브 수상자[21] 드래프트 막차 순번의 신인최초 사이클링 히트KBO 골든글러브 수상자[22] 90년도에 타격 타이틀 승부를 한 적이 있었다. 승자는 당연히 한대화[23] 해태는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쓰지만, LG에서는 나이 차이 많은 후배들이 자신에게 "형형, 대화 형 또는 대화형님~" 이러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니들 뭐여~?!하면서 불편한 반응을 보이고, 선배로서 기강잡기를 잠시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경기 안되어서 LG 덕아웃의 분위기에 동화되었다. 그해 결국 1위를 했다.[24] 유난히 해태 vs LG의 트레이드에서 해태가 많이 손해를 본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분방하던 LG에서 선수간 분위기가 강압적이기로 악명 높은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으니 극과 극의 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손혁이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강력하게 거부한 것이 괜히 그런 게 아니다. LG에서 해태로 이적한 선수들 중 거의 유일하게 해태에서의 적응에 성공한 선수가 바로 최훈재이다. 공교롭게도 친정팀 LG와 맞붙은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의 마지막 우승을 확정짓는 결승타를 날리기도 했다.[25] 특히 해태-기아와 삼성, OB-두산[26] 시즌 말기 4일만 쉬고 등판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무리가 왔다.[27]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드러난 김성근의 행적을 볼때, 한대화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눈 밖에 나서 기용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28] 당시 빙그레의 이강돈보다 불과 타율 1만분의 1 차이로 앞질렀을 정도의 접전이었다. 이는 한대화가 골든글러브(3루수 부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수상한 개인 타이틀이었다.[29] 프로야구 초창기에도 나이가 30이 되었으면, 바로 은퇴 또는 코치로 들어가는 시기였다.[30] 양승호가 대표적인 케이스.[31] 다만 강신 듀오는 당시 일본인 코치의 조언 덕이 컸고, 이후 이들이 이만큼 타격을 보여주지 못해 사실상 플루크 시즌으로 본다. 또 채최박의 결성에는 당시 사장이였던 김응용의 입김이 있었다는 후문.[32] 시즌 도중 경질[33] 하지만 대전태생에 성인되기 전까지 대전에서 컸다. 선수 시절에도 대전으로 오고싶어 트레이드 파동을 일으킨 만큼 한화가 대전 연고팀이라는 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야구 커리어 첫 프로팀 감독도전이라는 점도 있었으리라.[34] 실제로 팀 득실점으로만 승률을 예측하는 피타고리안 승률은 채 4할도 되지 않는다. 즉 압도적인 최하위.[35] 팀 타자들 주루 능력이 시원찮으니 그랬겠지만, 매번 히트 앤드 런을 거는 것만으로도 문제지만 볼카운트 상관 없이 작전을 걸어댄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히트 앤드 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작전은 타자에게 볼카운트가 불리할 땐 매우 위험한 작전이 되어버린다.[36] 구대성 은퇴식, 송광민 시즌 중 현역 입대 영장, 한대화 경질 등등 이 당시 한화 프런트는 심히 맛이 가 있었다.[37] 몇 개월 쓰지도 못하고 군대로 보냈고, 전역 후에는 3할만 3번을 쳤으니 여기에 포함시킨다.[38] 그렇다고 하기에는 12시즌에 지원받은거라곤 김태균, 송신영, 박찬호 뿐이고 그나마도 송신영은 먹튀가 되었다. 박찬호도 크게 도움된건 아니고.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할 것은 한화의 센터라인은 정근우, 이용규, 하주석, 최재훈이 오기 전까지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를 만드는 수준이었다는거다. 저 넷이 뛰던 때엔 한화의 센터라인 약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정근우는 이글스 역대 2루수 WAR순위를 석권했고(정근우를 제외한 최고순위에 해당하는 5위인 정원석이 수비는 구멍이었던걸 감안하면 그냥 이글스 2루의 역사를 바꾼 수준이다.), 이용규는 부상으로 한 시즌에 한 달은 빠지고 아예 한 시즌은 항명때문에 출장정지당하는 대형사고도 쳤지만 타격이나 수비면에서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한화의 중견수는 제이 데이비스 이후로 땜빵으로만 버텨오던 포지션이었으니. 하주석은 아직은 기복도 심하고 부족한 면이 보여도 수비는 확실히 탄탄했으며 타격 역시 펀치력을 갖고있었다. 한대화 시절은 장타력 있는 타자가 없어서 손지환 김용호 심지어는 신경현까지 클린업을 들어가기도 했으며 전현태가 6번을 치는 수준이었으니 전역 후의 하주석 정도면 어느정도 차이를 보였을거다. 최재훈은 애초에 두산에서도 아깝다고 했던 자원이고 한화에 합류하자마자 포벤저스(조인성, 차일목, 정범모, 허도환)를 정리해버리고 19시즌엔 2할9푼까지 쳐내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39] 선수 시절 김성근 감독과 철전지 원수관계였던 박종훈 단장을 내정했으나, 팬들의 반응은 허수아비가 될 거 뻔하다는 불신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론 김성근 감독이 박종훈 단장과의 갈등으로 자진사퇴해버렸으니 기우였던 셈.[40] 그만큼 선수들과 감독간의 신뢰감이 돈독했었다.[41] 좌완 채드벨, 우완 서폴드[42] 조범현 체제 이후 KIA 타이거즈는 다른 구단들과는 달리 1군 감독이 1군은 물론 2군, 3군까지 직접 총괄하는 형식이고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그러한 경향이 더 강해졌다. 이는 선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선 감독 후반기에 2군 감독 대신 2군 총괄코치로 장효조를 임명한 바 있다.[43] 본인도 김응룡에겐 감사를 표하나 김성근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44] 재미있는 건 김성근은 쌍방울 김독 재임시절 심성보가 당뇨로 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자 전용 스케줄을 짜 주는 등 관리를 해 줬다고 한다. [45] 참고로 타자 쪽 역시 이승엽, 최정 등 수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정작 이승엽과 최정의 홈런 생산성이 급증한 건 백인천/이만수 덕이라는 평이 많다. 최정은 아예 '다운스윙을 하지 않으면 혼나다가 이만수 감독님 덕에 홈런 타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며 김성근을 간접 디스하고 이만수에게 감사를 표현하기도. 이건 딱히 누구 잘못이라기보단 리그도 인종도 다양하고 계약 관계는 계약 관계일뿐인 타국과 달리 다리 하나만 건너도 마주칠 정도로 풀이 좁고 감독과 선수 사이가 스승과 제자 관계 취급당하는 KBO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46] 부친 한상준(1924년생)의 고향은 평안남도로 실향민이다. 따라서 한대화는 대전 출신 실향민 2세. 대구 출신 실향민 2세(부친 고향이 경기도 개성)인 김재박과 동일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47] 실제로 아주 옛날에는 윗 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을 지식 자랑을 하는 행위로 보아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있기는 하였다. 1986년쯤만 되어도 벌써 옛 이야기이긴 했지만...[48] 야구만 잘 하면 사사로운 부분은 신경쓰지 않는 김응용 감독의 야구관이 드러난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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