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모

 

김종모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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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1996
1997
2002
2009




1987 KBO 올스타전 미스터 올스타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7번
팀 창단

김종모(1982~1992)

이종범(1993~199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5번
백기성

김종모(1993~1995)

권오성(1996~1999)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75번
박현수(1990~1993)

김종모(1996~2000)

김지훈(2005~201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
장호연(1998~2000)

김종모(2001~2004)

조계현(2006~2009)
KIA 타이거즈 등번호 87번
박철우(2001~2005)

김종모(2006~2007)

김동재(2009~2010)
KIA 타이거즈 등번호 71번
김종윤(2001~2007)

김종모(2008~2009)

백인수(2010~2018)
<color=#373a3c> 한화 이글스 등번호 76번
김민재(2010~2012)

김종모(2013~2014)

정민태(2015~2020)


[image]
이름
김종모(金鍾模 / Joung-mo Kim)
생년월일
1959년 11월 1일 (64세)
출신지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사평리[1]
학교
서림초-동성중-광주상고-영남대
포지션
내야수[2], 외야수[3]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제일은행 야구단 (1981)
해태 타이거즈 (1982~1992)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1993~2000)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2001)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02~2004)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06~2007)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08~2009)
광주동성고등학교 감독 (2012)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3~2014)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14)
해설위원
광주문화방송 (2011)
광주방송 (2018~)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해설자 시절
5. 기타
6.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한국의 前 야구선수, 前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의 수석코치. 해태 타이거즈의 원년 멤버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등번호는 7번[4]. 광주상고 출신.

2. 선수 시절


해태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외야수로서, 80년대 당시 초호화 스타군단이었던 해태에서 김봉연이나 김성한, 이순철, 선동열, 한대화에게 가려져 있었지만, 클린업과 하위타순을 넘나들며 5차례나 3할 이상을 기록하며 1980년대 해태 왕조의 건설에 기여한 선수였다.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등의 거포가 많았던 80년대 초중반 해태에서 컨택트에 초점을 맞춘 교타자라는 점이 주요 특징으로 꼽히곤 하는데, 사실 은퇴 시점에서도 홈런 10위권 대에 위치해 있던 펀치력도 준수한 전형적인 중장거리형 교타자였다.[5] 프로에 데뷔 한 후 김종모는 좌효조, 우종모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컨택 능력에 있어서 비교될 선수가 역대 최고의 교타자였던 장효조 뿐일 정도로 빼어난 컨택능력을 자랑했다.[6] 그러나 역시 타격의 신이라고 평가받는 장효조의 벽은 넘지 못해서 자주 3할을 넘나 들었음에도 타격왕은 차지하지 못하는 2인자였다.[7][8] 83년 3할 5푼의 타율의 성적을 시작으로,[9] 4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 올스타전에 6번 출전, 특히 1987년 올스타전에서는 MVP로 뽑히는 등 원년부터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84년부터 시작된 고질적인 허리부상 때문에 경기 출장수가 많지 않은 편이다. 프로 통산타율이 0.298인데, 이는 앞서 말한 부상으로 인한 말년의 부진 때문. 김종모는 앞서 말한 뛰어난 타격 실력으로도 유명하지만, 타격 뿐만 아니라 안정감 있는 외야 수비실력을 지녀 265경기 연속 무실책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10] 그 외에도 항상 싱글벙글 웃는 모습으로 인품도 매우 훌륭하다고 알려져 있다.

1992년까지 잦은 허리부상 등으로 부진 했지만 92년 겨울,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서 스프링캠프때도 전년과 확연히 달라진 몸상태를 보여 본인과 코칭스태프가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시범경기때 공이 구강쪽을 강타하는 불의의 부상으로 인해 한 달여간 제대로 된 식사와 운동을 하지못해서 스프링캠프 때 몸을 만들어 놓은 것이 허사로 돌아가 구단의 코치 권유에 의해 은퇴를 하게되었다.

3. 지도자 시절


[image]
(출처 : 포토로)
[image]
(출처 : 포토로)
이후 해태에서 수비코치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스승인 김응용이 2001년부터 삼성감독으로 옮길때 따라 삼성 코치를 역임하기도 했다.
[image]
(출처 : 포토로)
2004년 선동열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자 타격코치로 1년을 있다가, 코치진개편때 잘리고 다시 해태의 후신인 KIA에서 코치 생활을 하였다. 2008년 조범현 감독이 부임할 때 다시 KIA 수석코치로 선임되었다. 당시 기아 사장이 자신과 같은 인하대 출신 감독을 원했고 그래서 조범현 감독이 선임이 되었는데 조범현 감독 성적부진을 대비해서 구단에서는 조범현에게 수석코치를 이순철과 김종모 둘중 한명을 선택하라고 했고 조범현은 김종모 수석코치를 선택하여 수석코치로 부임하였다.[11] 수석코치로 당연히 해태와 인연이 없던 OB 출신의 조범현프랜차이즈 출신 김종모를 불편하게 여겼을 것이고...[12] 결국 2009년 KIA 우승으로 조범현의 입지가 크게 강화되자 우승 4일만에 조범현의 입김으로 해임된다.[13] 이에 대해 KIA팬들의 반발이 많았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조범현을 따라 들어와 타격코치를 맡았던 황병일이 맡게 된다. 이를 두고 조범현을 나쁘게 볼 수 만은 없는 것이 자신이 조금만 삐끗해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 뻔한 사람인데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냥 놔두었다면 이후 조범현의 16연패 때 16연패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김종모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원래 수석코치는 감독의 오른팔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감독과 가장 친한 사람이 하는 것이 감독 입장에서 편하다. 이 경우 감독이 경질되면 수석코치도 그 직후 혹은 시즌 이후 감독을 따라 팀을 떠나거나 시즌이 끝난 후 후임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나간다. 극히 희박한 경우지만 감독이 영전되어 단장이나 사장 등 높은 자리로 가면서 수석코치에게 감독 자리를 물려주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2000년대 초반 김응용-선동열.
해임 후 광주상무지구에 평소 모밀을 좋아해 종모밀이라는 모밀전문점을 운영하다 2011년 모교 광주동성고 감독으로 선임되어 폐업을 하였다. 2012년 페넌트레이스 종료 후 스승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 이글스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다. 2014년 6월 26일, 김성한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수석코치에 임명되었다. 마찬가지로 공석이 된 타격코치 자리는 장종훈 코치가 전담한다. 이후 김성근 감독이 2014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코치직을 사임(구단의 재계약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의 행보는 불명확하나, 수석코치로 여러 번 우승을 하면서 나름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공석인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갈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기아가 김기태를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그냥 추측으로 끝났다.

4. 해설자 시절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8 시즌부터 kbc MyFM에서 KIA 타이거즈 홈경기 야구해설을 맡게 되었다. 캐스터는 참고로 전남 출신 개그맨 양원경. 지역방송이니까 가끔씩 사투리도 섞어가면서 편안하게 해설을 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image]
2019년부터는 중계 플랫폼이 지상파 라디오에서 유튜브로 변경되면서 원정경기 중계도 하게 됐는데, 매 경기마다 캐스터 양원경과 함께 신들린 먹방을(...) 보여주고 있다.

5. 기타


우승복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야구인이다. 선수 시절 6개의 우승메달[14]를 건 뒤로, 해태 코치로서 1993, 1996, 1997년 우승. 거기에 2001년에는 김응용감독을 따라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뒤에서 거기서도 우승(2002)을 하며 2005년까지 삼성에 몸을 담았다가, 선동열이 수석코치로 오자 다시 친정인 KIA 타이거즈로 돌아가 2009년까지 타격코치를 하며 KIA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한마디로 김종모가 1군 코치로 부임하는 동안에는 그 팀은 우승한다. 하지만 결국 한화에서는 비밀번호 2자리만 더 늘린 채 팀을 떠나게 되면서 징크스가 깨졌다.
이건열과 더불어 마산아재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타자 헬멧 쓰고 외야 수비를 본 인물로 추정된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타이거즈
77
258
.291
75
12
0
10
43
28
7
20
.453
.342
1983
86
311
.350
(2위)
109
(5위)
17
2
11
44
51
7
29
.524
(4위)
.406
(2위)
1984
74
272
.316
(5위)
86
12
1
14
(5위)
44
38
2
35
.522
(4위)
.394
1985
57
147
.231
34
2
0
4
20
9
1
11
.327
.285
1986
104
383
.313
(2위)
120
(3위)
19
2
11
61
(3위)
59
(5위)
6
42
.460
(5위)
.381
(2위)
1987
88
332
.331
(5위)
110
13
1
9
41
43
2
25
.458
.377
1988
105
353
.300
106
8
2
4
35
36
1
29
.368
.350
1989
57
127
.236
30
4
0
0
16
6
0
10
.268
.288
1990
117
381
.286
109
20
1
10
64
41
0
46
.423
.360
1991
64
155
.206
32
4
1
8
23
15
0
12
.400
.262
1992
21
20
.200
4
0
0
1
4
3
0
6
.350
.385
<color=#373a3c> KBO 통산
(11시즌)
<color=#373a3c> 850
<color=#373a3c> 2739
<color=#373a3c> .298
<color=#373a3c> 815
<color=#373a3c> 111
<color=#373a3c> 10
<color=#373a3c> 82
<color=#373a3c> 395
<color=#373a3c> 329
<color=#373a3c> 26
<color=#373a3c> 265
<color=#373a3c> .435
<color=#373a3c> .356
[1] 전직 야구선수 장채근도 이 마을 출신이다.#[2] 1983년 당시 3루수로 출장했었다.[3] 주로 우익수로 출전[4] 이후 이종범의 영구결번으로 처리 된 등번호이기도 하다.[5] 오히려 거포로 알려진 김준환이 원년 홈런 2위를 기록한 이후론 단 한번도 10위 안에 들지 못하고 두자릿수 홈런도 단 두차례만 기록하는 모습을 보인다.[6] 세간의 평으로는 포수 미트에 들어간 공을 꺼내서 치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으며, 현역시절 정말로 공이 너무 좋아 못 칠것 같은 투수를 꼽아 달라는 질문에 자신에게 그런 투수는 없었다. 라고 말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7] 83년과 86년에 타율 2위를 기록했는데, 특히 83년에는 .350의 고타율을 기록하고도 무려 .369의 타율을 기록한 장효조에 밀려 2위를 기록한다. 해당 타율은 역대 타이거즈 역사상 이종범, 김선빈에 이은 팀 내 3위 기록이다.[8]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팀 사정과 김응룡 감독의 성향 상 타율 관리를 목적으로 김종모를 빼주거나 할 수 없어서 타 팀의 수위타자들과 달리 타율관리가 힘들었다고 밝혔다.출처[9]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에서 밝힌 1983년 .350의 고타율을 기록한 비화가 있었는데, 당시 해태 타이거즈 프런트에서 82년 시즌 종료 후 김종모에게 '내년 시즌에 타율 .350 이상을 치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 라고 했었다. 그리고 거기에 자극을 받은 김종모는 83년도 시즌에 정확히 .350의 타율을 기록했다.출처[10] 이 기록은 훗날 조원우에 의해 깨진다.[11] 김종모는 자신의 야구철학과 성격이 조범현과 맞지 않는다는것을 알고 계속해서 거절했으나 새벽까지 이어진 설득과 만약 해임을 할시에 몇달전에 미리 언질을 준다는 확답을 받고 수락하였다고 한다.[12] 불편한 이유를 콕 찝어서 이야기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조범현이 이끄는 팀 성적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바로 경질시켜버리고 수석코치인 김종모 감독대행 체제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SK시절 김성근-이만수 체제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13] 선임때 해임전에 미리 언질을 준다는 약속을 했으나 지키지 않고 당일날 해임을 하였다고 한다.[14]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이때까지는 한국시리즈의 우승팀 선수들에게는 우승반지가 아니라 메달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