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우

 



'''강동우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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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우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2'''
'''2005'''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2015'''
'''2016'''
'''201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0번'''
김영진
(1995~1997)

'''강동우
(1998~1999)
'''

진갑용
(2000~201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번'''
류중일
(1987~1999)

'''강동우
(2000~2005)
'''

강봉규
(2006)
''''''두산 베어스''' 등번호 24번'''
강봉규
(2000~2005)

'''강동우
(2006)
'''

이승엽
(2007)
''''''두산 베어스''' 등번호 31번'''
이승엽
(2006)

'''강동우
(2007)
'''

이윤학
(2008)
'''KIA 타이거즈 등번호 2번'''
박경진
(2007)

'''강동우
(2008)
'''

신종길
(2009~2018)
''''''한화 이글스''' 등번호 3번'''
한상훈
(2008)

'''강동우
(2009~2013)
'''

한상훈
(2014~2015)
''''''두산 베어스''' 등번호 81번'''
김우열
(2012~2013)

'''강동우
(2014~)
'''

현역



<colbgcolor=#131230> '''두산 베어스 No.81'''
<colcolor=#ffffff> '''강동우
姜東佑 / Kang Dong-Woo'''
'''생년월일'''
1975년 4월 20일 (49세)[1]
'''출신지'''
[image] 대구광역시 북구
'''국적'''
[image] 대한민국
'''학력'''
칠성초 - 경상중 - [image] 경북고 - [image] 단국대[2]
'''포지션'''
외야수[3]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8년 1차 지명 (삼성)
'''소속팀'''
[image] '''삼성 라이온즈 (1998~2005)'''
[image] 두산 베어스 (2006~2007)
[image] KIA 타이거즈 (2008)
[image] '''한화 이글스 (2009~2013)'''
'''지도자'''
[image]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14)
[image] 두산 베어스 2군 주루코치 (2015)
[image] 두산 베어스 1군 주루코치 (2015~2017)
[image]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18)
[image]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19~2019.7.25)
[image]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19.7.26~)
'''응원가'''
입장시: 2NE1 - <내가 제일 잘 나가>
타격시: 정형돈 - <이러고 있다>[4][5]
삼성 시절: 현숙 - <정말로>[6]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2회 (2002, 2005)
1. 소개
2. 선수 시절
2.3.1. 2009 시즌
2.3.2. 2010 시즌
2.3.3. 2011 시즌
2.3.4. 2012 시즌
2.3.5. 2013 시즌
2.4.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시절
4. 여담

[clearfix]

1. 소개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이자 '''비운의 선수'''로 꼽히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한 명. 2020년 현재는 두산 베어스의 1군 타격코치.

2. 선수 시절



2.1. 삼성 라이온즈 시절


[image]
(출처 : 포토로)
[image]
말 그대로 '''불운의 선수'''.
경북고 - 단국대를 졸업하고 1998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당시 삼성의 외야에는 최익성, 신동주, 양준혁이 주전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전년도 맹활약했던 최익성-신동주 우타 외야 라인에 부진 및 부상이 닥치자 데뷔 첫 해부터 서정환 감독의 눈에 들어 주전 자리를 꿰찼고, 그해 타율 0.300, 10홈런을 쳐주면서 맹활약했다. 후술하겠지만, 1998년의 강동우가 3할을 기록한 이후 무려 17년 뒤인 2015년 구자욱이 3할 타율을 기록할 때까지 신인으로써 3할 타율을 기록한 선수가 나오지 않은 덕분에 은퇴할 때까지 강동우 하면 '''"최후의 신인 3할타자"''' 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도 했다.[7] 신인 외야수가 데뷔 첫 해부터 3할 타율을 기록한 덕분에 그 해 신인왕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고졸로 12승을 거둔데다 우승 프리미엄까지 누린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고졸 신인 김수경에게 신인왕 자리를 내줬다.
또한 삼성의 연고지인 대구광역시 토박이인지라 '''프랜차이즈'''성도 탁월하여 향후 삼성의 주전 외야수가 될 것으로 기대받았고, 1998년 말에 개최된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도 선발되면서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16일 벌어진 사건으로 인하여 강동우의 지독한 불운이 시작되었다.'''
[image]
부상을 당한 후 들것에 실려나가는 강동우. 부상을 당한 후 그 충격 때문에 '''괴로워하는 표정'''을 주목하라.
1998년 10월 16일,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 때 이병규의 큼지막한 홈런성 타구를 뛰어올라 잡아내는 과정에서 왼쪽 다리가 펜스에 부딪히는 바람에 '''정강이뼈가 뒤틀리며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바로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8][9] 이 부상 탓에 강동우의 선수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강동우는 트레이드되지 않고 좋은 성적으로 마지막까지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의사의 소견으로는 '야구 선수로는 물론이고 '''정상인'''으로서의 '''생활도 힘들다'''라고 했을 의사도 부정할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 당연히 대표팀에서도 탈락되었으며[10][11]국대 탈락과 팀 우승에 씁쓸한 실패를 맛보며 2년 간의 재활이 시작된다.[12]
피나는 노력으로 재활을 마치고 2000년 시즌 막판에 겨우 복귀해서 다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지만, 신인 시절의 성적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류중일 코치가 선수 시절에 달던 1번[13]을 달고 나름대로 제몫을 하며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동했고, 2002년 김응용 감독 아래에서 타율 0.288, 9홈런으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14]하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2001년 데뷔하여 삼성의 붙박이 타자가 된 왕년의 좌타 라이벌 '''박한이'''와 함께 테이블 세터를 이뤄 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 시즌 마저도 타율이 2할 중후반에 머무르는 바람에 '비운의 톱타자' 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2004년에는 신인이던 당시 98년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을 내어 2차 전성기를 구가 할 줄 알았으나...
2005년부터 김응용 감독의 후임으로 부임한 선동열 감독과 마찰을 빚게 되며 삼성에서 설 자리를 잃었고, 결국 2006년 3월 두산 베어스강봉규, 김창희를 상대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당시 삼성 팬들은 격분하여 난리를 쳤다.[15] 이는 훗날 레전드 양준혁의 등떠밀기식 은퇴, '''이승엽 와도 자리없다'''는 희대의 발언과 각도드립 등과 함께 선동열의 삼성 프랜차이즈 내치기 사건 중 하나다.
이미 삼성 라이온즈를 떠난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삼성 팬들에게 2루수 강기웅, 김시진 이 후 오랜만에 얻은 에이스 박충식과 함께 여전히 안타까움으로 가슴에 남는 선수다.[16] 강동우와 관련된 신문기사의 리플을 보면 '''한화 팬들보다 삼성 팬들의 응원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삼갤에는 간간히 '은퇴식만큼은 '''삼성'''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온다. 이미 마해영의 사례도 있고. 근데 그 마해영은 말년에 롯데로 가서 은퇴한다...

2.2. 두산 베어스, KIA 타이거즈 시절


[image]
두산 베어스 시절
[image]
KIA 타이거즈 시절
트레이드를 통해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기는 했지만, 이후 한 팀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여러 팀을 전전하게 된다. 2006 시즌에는 두산에서 그럭저럭 주전 경쟁을 했지만, 2007년 김경문 감독이 직접 키운 외야수 이종욱, 김현수 등등이 펄펄 날아다니기 시작하면서 1군에서 탈락, 줄곧 2군에 머물게 된다. 결국 2007 시즌 종료 후 다시 좌완 투수 이윤학[17]을 상대로 KIA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됐다.
조범현의 양아들이라는 욕을 대차게 먹으면서도 시즌 초반 잠깐 동안은 꾸준히 기용되었지만 타율 1할대를 기록하였고, 부상당한 시즌을 제외하고는 커리어 로우 기록을 남기며 줄곧 2군 신세를 졌다.(...)

2.3. 한화 이글스 시절


[image]

2.3.1. 2009 시즌


[image]
2009년 12월 의지노력상을 수상한 강동우.
2008 시즌 종료 후 신종길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2009 시즌 붙박이 1번 타자 겸 중견수로 기용되면서 놀랍게도 맹활약을 펼쳤고, 1998년 이후 12년 만에 3할 타율과 준수한 출루율을 기록하였다. 또한 팀 내에서 가장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보이서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 한화가 간만에 건진 수준급 1번 타자. 농담으로 FA로이드를 복용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로 2009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고, 한화 이글스와 1년 총액 3억 원(계약금 1억 5천+연봉 1억 5천)의 조건으로 재계약에 합의했다. 팬들은 반짝 활약이 아니기를 바랐으나...
한편 2009 시즌 말인 9월 2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고영민을 축하해 주는 장면이 사진에 찍히면서 빈축을 샀다. 게다가 끝내기 안타 직전에는 2루심의 오심이 터진 탓에 다른 한화 선수들은 분을 억누르고 있던 상태였다.

2.3.2. 2010 시즌


스프링캠프에서 몸이 안 좋아 훈련을 제대로 못 했고 시즌 시작 시점에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간염으로 인해 하와이에서 1주일만에 귀국하여 대전시는 모 병원에서 잠시 입원 생활을 했다. 결국 체력부족으로 1할대를 넘나드는 극악의 타격과 심각하게 좁은 수비범위를 보여주며 FA로이드 부작용 의혹을 받다가 결국 2군에 내려갔다. 그러나 5월 초에 2군에서 복귀해서 타율을 2할 7푼대로 끌어올리는 등 준수한 성적을 냈다. 6월 27일 개인 통산 1000안타를 기록했고, 후반기에는 1군과 2군을 왕복하였다.
2010시즌에 문제가 참 많아졌는데 일단 외야수로서 생명인 수비범위가 무진장 좁아졌다. 게다가 백업 플레이에 소홀하고[18][19] 텍사스 안타성 타구를 잡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이며, 이대로라면 한화표 노장 선수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듯하다는 둥 팬들의 비난을 샀다.

2.3.3. 2011 시즌


##
2011년 406 대첩에서 대역전의 계기를 마련한 동점 투런을 때리기도 하는 등 그냥 사라지진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강속구 용병 투수로 화제를 모은 레다메스 리즈의 '천적' 소리를 들었다. 8일 LG전은 류현진이 무너지면서 8대4로 졌지만 4점을 강동우 혼자 다 냈다. 레다메스 리즈 상대로 대단히 자신감있는 스윙을 했다. 이어 4월 16일 기아전에서 결승타를 날려 팀의 7연패 사슬을 끊어냈다.
2011년 4월 21일까지 시즌 타율이 2할 7푼대였으나 득점권 타율은 5할 8푼대로 리그 전체 1위였다. 중심 타선같은 1번 타자의 재림에 그나마 타선에 숨통이 트이게 됐다.
5월 24일, SK 와이번스와의 3연전 첫 경기에서 이승호의 높은 직구를 그대로 때려 2:2 피말리는 접전 끝에 끝내기 안타를 날렸다. 팬과 칰갤러들은 야왕의 작전지시를 충실히 수행한 강동우에게 '''공작'''의 칭호를 내려야 한다며 강동우 공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리고 불암콩콩코믹스 '''<추두: 도망두산을 쫓다>''' 편에서는 '''야또나리'''가 되었다!!
[image]
7월 2일 KIA 타이거즈와의 3연전 두 번째 경기 3-6으로 뒤지고 있는 6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손영민의 공을 잡아당겨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역전만루홈런을 쳤다! 시즌 9호. 캐스터가 타이거즈 팬인 건 알지만 좀 심하게 친기아 성향으로 중계하는 와중에 패배로 기울던 분위기를 다시 되찾아온 모처럼 시원한 한 방이었다.
7월 30일 SK 와이번스의 큰 이승호를 상대로 쓰리런을 때리며 기어코 개인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11호 홈런을 쏘아 올렸다!!
9월까지 타율 .265~.270대를 오가면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홈런은 13개로 팀내 '''홈런 2위'''였다.
9월 17일 4타수 4안타 1홈런 2타점 맹활약을 펼쳤다.
후반기에 타율을 많이 끌어올린 덕분에 타율 0.288로 훌륭한 성적을 내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팀 내 '''타자 고과 1위(!!)'''에 홈런 개수로 커리어 하이고, 타점도 순도높은 타점들이 상당히 많아 38살 나이임에도 차기 시즌에도 충분히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한편 FA 대상자였지만 시즌 종료 후 FA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봉은 고작 5천만원이 올랐는데, 강동우의 생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인상액이 너무 적다는 인상이 짙다. 물론 노장선수의 연봉은 상대적으로 인상폭이 적은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시기 한화 프런트진의 연봉 인상 정책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강동우는 물론이고 이대수, 박정진 등 A+급 활약을 보인 선수들의 연봉 인상폭이 똑같이 5천이었다. 이는 선수들의 동기부여 실패로 이어졌고, 2012년 한화가 최악의 시즌을 맞이하는데 적지 않은 일조를 한다.

2.3.4. 2012 시즌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체력적으로 힘든 테이블 세터를 다른 선수가 맡아주길 바랬으나... 개막전에서 시범으로 다른 선수를 1번으로 기용했다가 쫄딱 망했어요. 그래서 이 해도 1번타자로 활약했다.(...)
5월 17일 두산전에서 3루수가 공을 잡자 오른팔을 빼고 왼팔을 뻗어 태그하는 센스있는 주루플레이로 3루타를 만들어냈다.


이후 꾸준히 제몫을 해냈으나 허리 미세통증으로 인해 6월 26일자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회복기간을 거쳐 7월 10일 1군에 복귀. 한화는 강동우가 2군에 내려가 있는 동안 고동진, 양성우 등을 1번 타자 자리에 기용하였으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실제로 강동우가 2군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한화는 2승 7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마지막에는 '''장성호가 1번 타자'''로 기용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1군으로 올라왔으나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8월 2일 이후로 다시 2군행. 다행히 1번 구멍은 오선진이 각성하면서 메울 수 있게 되었다.

2.3.5. 2013 시즌


삼성 라이온즈 시절 그의 재기를 도운 김응용 감독을 만나 의지를 불태웠으나, 결국 그 해가 한화 이글스에서 마지막 해가 되었다. 시범경기 11경기에 출장해 16타수 5안타 타율 .313 2타점 2볼넷 출루율 .389를 기록해 다시금 KBO 최고령 1번 타자의 재림을 노리고 있었으나, 시즌 개막을 앞두고 시범경기에서 발가락 부상(골절)을 당해 2군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2012 시즌 종료 직후 가을 마무리훈련부터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까지 빠짐없이 훈련을 소화했기에 더욱 아쉬운 부상이었다. 다행히 1번 타자의 공백은 이대수가 나름대로 메워주고 있지만 팀이 개막 직후부터 연패 수렁에 빠져있고 마땅한 좌타자 요원도 없는 상황이라 그의 공백이 더욱 더 아쉬운 상황이었다.
5월 말 1군에 복귀하여 타선에 나름대로 힘을 보탰으나 14경기에서 30타수 6안타에 그쳤고, 팀의 리빌딩 방침과 맞물려 다시 2군으로 향했다. 다행히 퓨처스리그에서는 3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감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후로 전혀 1군에 올릴 기미가 안 보인다. 그토록 대타를 남발하는 상황임에도 정작 강동우의 복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일각에선 '(감독의 권위를 위한) 베테랑 죽이기'로 의심할 정도.
결국 한화 이글스 이적 이후 최악의 성적을 남겼다. 26경기 52타수 11안타 타율 .212를 기록.
11월 24일, 서산 훈련장에서 훈련하던 도중 방출 통보를 받았다. 강동우 본인은 현역으로 더 활동하기를 원했으나 그를 찾는 팀은 어디에도 없었고, 결국 안타까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식도 없이 쓸쓸하게 은퇴한 그이기에 많은 팬들이 더더욱 안타까워 했다.

2.4.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삼성
123
414
'''.300'''

124
23
'''8'''
(2위)
10
30
74
22
43
.466
.355
1999
1군 기록 없음
2000
13
20
.100
2
0
0
0
0
3
1
8
.100
.357
2001
125
347
.251
87
15
2
6
42
54
6
52
.357
.348
2002
130
466
.288
134
23
3
9
49
75
11
47
.408
.352
2003
130
443
.266
118
19
4
9
57
61
8
58
.388
.349
2004
132
438
.295
129
22
1
3
49
59
9
51
.370
.367
2005
125
367
.240
88
15
'''3'''
(5위)
6
38
61
9
46
.346
.322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6
두산
118
393
.249
98
12
2
2
34
36
8
49
.305
.330
2007
25
43
.163
7
1
1
1
6
1
0
5
.302
.25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8
KIA
45
40
.100
4
1
0
0
5
8
0
9
.125
.26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9
한화
128
506
.302
'''153'''
(5위)
30
2
10
48
88
27
70
.429
.384
2010
98
309
.252
78
8
1
4
22
45
14
44
.324
.346
2011
133
518
.288
'''149'''
(5위)
13
3
13
51
'''83'''
(3위)
17
64
.400
.363
2012
76
257
.253
65
16
1
2
22
35
1
26
.324
.346
2013
26
52
.212
11
1
1
0
3
4
0
7
.269
.300
<color=#373a3c> '''KBO 통산'''
(15시즌)
<color=#373a3c> 1427
<color=#373a3c> 4613
<color=#373a3c> .270
<color=#373a3c> 1247
<color=#373a3c> 199
<color=#373a3c> 32
<color=#373a3c> 75
<color=#373a3c> 456
<color=#373a3c> 687
<color=#373a3c> 133
<color=#373a3c> 579
<color=#373a3c> .376
<color=#373a3c> .352

3. 지도자 시절



3.1. 두산 베어스


은퇴를 선언한 후 두산의 2군 타격코치로 영입되어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2014년 4월에 결혼하여 뒤늦게 품절남이 되었다.
2015년에는 2군 주루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는데, 기동력 강화 차원에서 4월 7일에 1군 1루 주루코치로 콜업되었다. 대신 장원진 타격코치가 말소되고 기존의 1루 주루코치이자 수비코치 겸임이었던 강석천은 수비코치만 맡는다. 장원진 타격코치는 박철우 타격코치를 보조하기로 했다.
2015 KS 우승을 친정 팀 앞에서 맛보았다. 그 기분이 심히 묘할 듯.
2018년 시즌 1군 타격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새로온 고토 코지 코치와 함께 선수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듯 하다.
2019년 시즌 2군 타격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이천에서 쌀벌레들을 단련 시키던중, 7월 26일 1군 콜업이 되었다. 이도형 코치와 함께 타격 부분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7월 19일 먼저 콜업된 강석천 수석코치와의 시너지 효과가 났는지 타자들의 타격감이 반등해, 두산은 정규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20] 이 분을 타격코치로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타격반등은 김태형 감독, 강석천 수석코치와 이 분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4. 여담


선수시절 등번호는 20-1-24-31-2-3번 순이다. 삼성 라이온즈의 1번 라인인 황규봉-류중일-강동우-윤성환 중 한 명. '''불사조같은 선수시절을 보낸 선수.'''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이었다. 은근히 1990년대 중후반에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했던 저니맨들이 많다. 그의 전임 1번타자였던 최익성이동수, 신동주 등.
O형 수염 자국이 선명한, 살짝 마초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상당한 미중년이다. 2014년 4월 19일까지 미혼(!!)이었다. 2011 시즌 중반부터 굉장한 활약을 펼치던 때의 스포츠신문 인터뷰 중 '체력 관리의 비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보내 주는 인삼을 꾸준히 먹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팬들은 '저런 건 친구가 아니라 와이프가 챙겨줘야 되는데...'라며 심히 안타까워했다. 어느새 '동우햄 장가 보내기'는 새 시즌 한화팬들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 2013년에는 류택현 바로 다음으로 나이 많은 미혼의 프로야구 현역 선수였다. 위의 사례에서 팬들이 안타까워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결국 2013 시즌 종료 후 은퇴하면서 이제는 노총각 코치(...).
2012년 말 암 투병 중이었던 후배 야구선수 이두환에게 후원금을 전달해 스토브리그를 훈훈하게 달구었다.
2014년 1월에 현역에서 은퇴한 뒤, 그의 생일인 4월 20일에 결혼하여 노총각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축 동우햄 결혼
잘 알려져 있듯이 2015년 전까지 무려 '''17년간''' 마지막 신인 정규타석 3할 타자였으나, 15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후배 구자욱이 .349를 기록하면서 갱신되었다. 다만 구자욱의 경우 '''2012년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데뷔'''시즌 마지막 3할타자 기록은 아직도 강동우가 가지고 있는 셈. 하지만 2017년 고졸 신인 '''이정후'''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 하면서 최후의 데뷔시즌 3할타자 타이틀도 물려주게 됐다.[21]
별명 또는 애칭 비슷하게 '동우햄'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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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두산 베어스 주루코치시절, 양의지와 장면을 연출(?)했다.
현재 2019년 대졸 선수들 중 첫 해에 규정타석 진입과 3할(정확히는 0.300)+두 자릿수 홈런(10개)을 때려낸 선수는 아직도 강동우 이 후 나타나지 않고 있다..

[1] 네이버 등에는 1974년 4월 20일생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는 호적상 생일로 주민등록상에만 이렇게 올라와 있고, 실제로는 1975년생이라고 한다.# 본인이 말하기를 호적상 오류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 밝혔다. 그래서 학교도 1975년생들이랑 다니는 등 제 나이에 다녔고, 1974년생 이병규를 단국대 1년 선배로 취급하고 1975년생인 조인성, 김동주와 친구로 지내는 듯.[2] 1994학번[3] 신인 시절 포지션은 중견수였으나 부상 이후 우익수로 전향했다가 한화 이적 후 다시 중견수로 뛰었으며 선수 말년에는 간간히 좌익수로 나왔었다.[4] 이글스의 불꽃 투혼 강동우~ 이글스의 불꽃 투혼 강동우~ 이글스의 불꽃 투혼 강동우~ 안타를 날려주세요~[5] 이전 가사는 '불꽃 투혼' 부분이 '1번 타자'였다. 강동우가 부상으로 1번 타자 자리에 잘 들어서지 않게 되면서 바뀌었다. 한화 올드팬들은 '이글스의 1번 타자는 이영우지!' 하면서 전 응원가를 싫어하기도 했다.[6] 유튜브에 2004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들을 수 있으며 가사는 안타를 쳐주세요 강동우!(헤이!) 안타를 쳐주세요 강동우(헤이!) 안타 안타 안타 안타 강동우(안타!) 2006년 두산 트레이드 직후 삼성 경기에서 간간히 삼팬들이 불러주었다는 말이 있다[7] 다만 구자욱의 경우 2012년에 데뷔해 군 문제를 해결하고 프로 입단 4년만에 1군에 올라온 중고신인이라 엄밀한 의미로써의 '''순수 신인 3할타자'''는 아니다. 따라서 순수 신인 최후의 3할 타자 자리는 강동우가 유지하고 있다가 2017년 고졸 신인 이정후가 데뷔 첫 해부터 3할 타율을 치면서 무려 '''19년'''만에 순수신인 최후 3할타자 자리를 내줬다.[8] 이때 이병규가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던 도중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 방송을 타면서 '후배(강동우는 이병규의 단국대 1년 후배)가 부상당한 게 그렇게도 고소하냐'며 무한 까임을 당했다. 이병규는 강동우가 부상당한 것을 모르고 홈런성 타구가 잡힌 것이 아쉽다는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판단은 알아서.[9] 이후 베이스볼 긱에서 이도형과 함께 한 인터뷰에서 이도형이 이 사건을 언급하였다. 강동우는 '병규형이랑 단국대 다니면서 참 친하게 지냈는데'라는 말부터 꺼냈는데 그 후엔 계속 이병규를 '''그 사람'''이라고 하였다. 끝에는 이병규와 오해를 풀었다는 말을 했지만 대학 1년 선배를 '''그 사람'''이라고 칭한 것 자체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병규가 2003년 시즌 도중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당해 시즌아웃되었을 때 이병규의 상태를 걱정하는 강동우의 인터뷰가 올라오기도 했고, 2017년 시점에서는 강동우가 은퇴 후 두산 코치로 합류하고 이병규도 은퇴한 뒤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엔 서로 웃으며 연락처도 주고받는 등 지금은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니거나 당사자들끼리 어떻게 푼 듯 하다. 판단을 알아서.[10] 어쨌거나 이 부상으로 인해 군 면제를 받기는 했다.[11] 대신 드림팀 막차에 승선한 심재학은 1998 시즌을 마치고 공익 입대가 예정되어 있어 군대로 끌려갈 뻔했던 상황이었는데, 강동우의 대타로 합류해 병역특례를 받는데 성공했다.[12] 그리고 선수의 안전을 위협하는 구장 시설물의 안전 문제는 '''20여년이 지나도록 하나도 나아지지 않아''' 2019년 6월 25일 kt wiz의 주축 타자 강백호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13] 원조는 원년 세이브왕 황규봉.[14] 각 스포츠 사에서 주는 당해년도 재기수상자를 수상 받은 적이 있다.[15] 김창희는 훗날 선동열을 따라 친정팀 KIA 타이거즈의 전력분석관으로 옮긴다.[16] 다만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을 때는 까였던 적도 있다.[17] 2018년부터 KIA에서 뛰는 우완투수 이윤학과는 동명이인. 이쪽은 좌완투수였다.[18] 2010년 9월 8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김다원우익수 이양기쪽으로 안타를 쳤고 이양기는 이 공을 잡으려다가 실패한 뒤 스텝이 꼬여서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이 황당한 장면에 한화팬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리고 김다원은 그대로 누를 돌고 돌아 홈으로.''' 이는 김다원의 '''데뷔 홈런'''이었다.(…)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건 김다원항목 참조[19] 그러나 강동우가 백업을 게을리 했다고 보기 힘든 측면도 있다. 강동우는 분명 뛰고 있었고, 오선진이 간 것은 애매한 뜬공을 잡기 위한 것이었으며 오선진이 가는 게 더 나은 위치여서 간 것이다. 강동우를 깔만한 상황은 아니다. 이 모든 게 작년에 비해 턱없이 좁아진 수비범위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역시 지나친 비난이다.[20] 스탯티즈 기준. 후반기 타율1위(0.294), OPS 1위(0.761)를 기록했다.[21] 여담으로 강동우의 데뷔 시즌인 1998년은 이정후가 태어난 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