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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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상고 vs 경남고 레전드 리매치 미디어 데이 때.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이순철,전준호, 이종범, 정수근, 이대형 등 대도라는 별명을 얻은 선수들이 많이 있었지만, 김일권이야 말로 원조 대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프로야구 원년 멤버로서 1982년 원년 도루왕을 시작으로, 프로 통산 5번(1982~84년, 1989~90년)의 도루왕을 차지했다. 프로통산 7위인 총 363개의 도루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그보다 앞서 최초의 개인 통산 300도루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통산 최다 단독 홈스틸 기록(2회)[1] 도 가지고 있다. 도루뿐만 아니라 일발 장타력도 있었는데, 1977년 야구 월드컵에서는 3번 김봉연에 뒤이어 4번을 맡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때 5번이 장효조였다. 프로야구에서 1회초 초구 홈런 기록도 여러개 가지고 있다.
1988시즌에는 피삼진을 단 8개만 기록했는데 이는 KBO리그에서 한 시즌 최소 삼진 기록이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1972년 군산상고는 황금사자기에서 부산고에 9회말 역전승을 거두는데, 이 때의 주축 멤버 중의 하나였다. 이영민 타격상을 이 때 수상. 졸업후 실업 야구 팀 상업은행에 갔으나, 대학에 가고 싶다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년만에 한양대에 입학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출중한 활약을 펼쳤으나 1학기만 마친 채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다시 실업야구로 돌아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한양대로 복귀할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2] 무적(無籍)선수가 되었다. 그래도 워낙 실력이 출중해서 대표팀에는 계속 뽑혔다. 이때부터 독특한 성격은 눈에 띄었고...
1980년 도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는 도루 18개와 득점 18개를 기록해 두 부문 1위를 차지했다. 한국팀이 11경기(9승 2패로 준우승)를 치렀음을 생각하면 엄청난 기록이다. 타율도 0.476으로 3위를 차지했다. 그 당시 한국 야구대표팀의 리드오프는 실업야구 최고 스타였던 김재박이 아닌 김일권이었다.
결국 1981년 2학기에 한양대학교에 복학했다.
2.2. 해태 타이거즈 시절
데뷔 첫 해였던 프로야구 원년, 김일권은 해태타이거즈의 주전 외야수로 기용되며 75게임동안 무려 53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원년 도루왕에 등극해 당대 제일의 1번타자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3] 당시 김일권은 원년 도루왕이라는 상징적인 타이틀 뿐 아니라, 여러모로 선수로서 최고의 한해를 기록했다. 1번타자임에도 11개의 홈런을 기록하면서 리그 7위에 올랐으며,[4][5] sWAR 역시 3.12를 기록해 김봉연에 이은 팀내 2위였으며 득점 생산능력을 나타내는 wRc+ 역시 팀내 중심타선인 김성한과 비등한 수치인 122.6를 기록해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타선에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선수였다.
그리고 이듬해 83년 시즌에는 .275의 타율과 48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2년연속으로 도루 타이틀을 차지해 해태 타이거즈의 첫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83년 시즌 종료 후 그 유명한 불고기 화형식 사건으로 인해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 우승에도 불구하고, 연봉에 인색한 구단의 방침으로 인해 선수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에 다음 1984 시즌 개막을 앞두고, 구단주와의 회식에서 선수들이 불고기를 안 먹고 불판에 그대로 올려놓은 채로 태워버리는 소위 불고기 화형식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김일권이 주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6] , 야구판에서 각종 기행을 일삼아 이단아 취급을 받았던 탓인지 어찌됐건 그 주동자로 찍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구단 관계자들은 크게 화를 냈고 김응용 감독에게도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 이 사건때문에 구단에 찍힌 김일권은 84시즌 초반 트레이드 대상에 올라 팀에서 쫓겨날 위기까지 처했지만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킬 경우 야구를 그만두겠다" 라는 각서를 구단에 제출하고 팀에 복귀하게 되었다. 지금은 선수들의 인권과 권익이 많이 신장되었지만 저 당시엔 "감히" 아랫것이 윗사람에게 대든 큰 사건이었다. 관련기사 : 트레이드 대상 金一權(김일권) 벌금·각서쓰고 팀합류 다만 공개적으로는 300만원의 벌금과 3경기 출장정지 처분이 나왔지만, 구단도 김일권이 주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3경기 출장정지만 내리고 벌금은 부과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김일권이 박건배 회장에게 사과하러 간 자리에서 500만원의 금일봉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 주동자들은 일이 커지자 입씻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금일봉은 김일권이 혼자 먹었다고 한다. 비록 금일봉을 받았지만 과도하게 받은 비난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실 주동자들의 대한 원망을 표출한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우여곡절끝에 맞이한 84시즌엔 0.241의 낮은 타율과 3할을 간신히 넘기는 출루율을 기록했으나, 41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 3연패를 이루어내어 체면치례를 하게된다. 85시즌에 들어서면서 철치부심해 .278의 타율과 39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는데 성공. 신인왕을 수상한 이순철과 함께 특급 테이블세터진을 구성하면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나, 무려 50번의 도루를 성공시킨 MBC 청룡의 김재박에게 도루왕 타이틀을 내주며 4연패에는 실패하였다.
86시즌 해태에는 국가대표 3루수 한대화가 트레이드 되어 들어오는데, 이 트레이드가 김일권의 굳건했던 입지를 흔들게 되었다. 기존 해태의 3루수는 김성한, 김종모가 종종 번갈아 들어갈 정도로 무주공산이었다가 신인왕을 수상한 이순철이 3루에 안착하는가 싶었는데, 이순철이 외야 포지션에서도 무리없이 활약할것이라 생각한 김응룡 감독은 3루수를 한대화로 고정시키고, 기존의 3루수였던 이순철을 중견수로 전환시켰다. 이에 기존 중견수였던 김일권에게도 불똥이 튀어 코너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뀐 포지션에서 변함없는 활약을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테지만 공교롭게도 포지션 전환 후 성적이 크게 떨어져버렸다. 그나마 2할 중후반을 쳐주던 타율은 1할대까지 떨어졌고 도루는 20개 정도로 반토막이 나버렸다. 87시즌엔 겨우 63경기에 나와 타율 0.229에 홈런은 단 한개도 기록하지 못했으며 도루 역시 16개만을 기록하고 말았다, 이러한 부진이 2년동안 이어지자 결국 트레이드 매물로 오르게 되었다.
나이가 많긴 했지만, 다년간 맹활약해준 프렌차이즈 스타를 트레이드 시킨다는 것은 당시 팬들에게 너무한 처사로 비춰졌다. 하지만 직설적 성격의 김일권이 예전부터 눈엣가시였으며, 젊은 이순철이 1번타자 중견수로 성장할것이라 판단한 구단은 결국 태평양 돌핀스로의 현금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2.3. 태평양 돌핀스 시절
88시즌 절치부심한 김일권은 이적 첫 시즌 생애 첫 3할타율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고[7] 1989년 시즌엔 무려 62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도루왕 타이틀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이 타이틀은 자신을 밀어낸 이순철과 경쟁하며 따낸 타이틀이었기 때문에 더 화제가 되었다. 팀 타선이 워낙 약해 김일권의 도루는 다소 빛이 바랬지만 그의 분전으로 태평양 역사상 최초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고, 본인도 첫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이듬해인 1990년에도 나이가 무색한 활약을 펼치며 48개의 도루를 기록하였고 통산 다섯번째 도루왕을 차지했다. 2위 이순철이 26개의 도루를 기록한것과 비교했을때 압도적인 도루를 기록한 것. 다만 도루를 제외한 스탯은 절망적일 수준으로 안 좋았는데, 일단 1번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안타를 달랑 85개밖에 치지 못함과 더불어 타율이 겨우 2할5푼을 간신히 넘겼다. 그렇다고 선구안이 좋아진것도 아니라서 출루율도 3할 턱걸이, 장타력은 원래 있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있던 장타력도 사라져서 홈런 '''0개'''와 더불어 40년 프로야구 역사상 뒤에서 공동 18위인 장타율 .286을 기록한다. 이런 절망적인 성적을 증명하듯 90년 그의 WRC+는 겨우 72.9. 이는 11이대형과 비슷한 수치이다. 결국 그는 압도적인 도루왕을 차지하였음에도 LG에 트레이드 되고 만다.
2.4. LG 트윈스 시절
1991 시즌을 앞두고 LG 트윈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개막전에 태평양 상대로 3타수 3안타를 치며 또다시 부활을 알리는가 싶었지만 결국 최종에는 타율 0.151로 매우 부진하였다. 결국 36세의 김일권은 두번째엔 부활을 이뤄내지 못하고 은퇴하였다.
3. 지도자 경력
쌍방울 레이더스와 해태 타이거즈 코치를 거쳐 이후 현대 유니콘스에서 LG시절 팀 동료였던 김재박 밑에서 코치를 하다가, 사이가 안 좋아졌는지 1년만에 그만뒀다.
도루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2003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주루코치[8] 를 맡다가 지병인 당뇨로 인해 2004년 9월에 자진 사임한 이후로는 다시 야구계에 못 돌아오고 있는 처지이다. 원래 야구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개인주의적이고(이 점에서는 장호연과 비슷) 팀 내부의 단합을 저해하는 스타일이라서 야구계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설이 많다.
4. 근황
2012년 olleh tv에서 KIA 타이거즈 측의 편파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4년 3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이케이코스모스라는 판촉물업체의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2019년 4월 김재박, 김봉연과 함께 LG 유플러스 광고에 출연하였다. 위 사진보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5. 기타
태평양 시절인 1989년 시즌의 한 경기에서 1루 출루 후 2루 도루를 시도했는데, 포수의 악송구로 공이 외야로 빠지자 이를 틈타 3루로, 그리고 내친김에 홈까지 질주하여 세이프에 성공했다. 다시 말해 타자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상대 실책과 자신의 빠른 발만으로 득점을 올리는 '무타 득점'이라는 진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2015년 8월 30일 경기에서 박해민이 재현하였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1]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한문연과 타이기록.[2] 당시 한양대를 지휘했던 김동엽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3] 1982년 7월 21일 숭의야구장에서 열린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경기에서 7회초에 '''KBO 리그 1호 단독 홈스틸'''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4] 이러한 일발장타를 가진 1번타자 계보는 해태 타이거즈의 전통이 된다. 이후 이순철 역시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여럿 기록해 은퇴 시점에서 통산 홈런 7위에 올라와 있을 정도로 일발 장타능력이 있는 선수였고, 이종범은 97년 30홈런을 포함해 데뷔 후 일본 진출 전 까지 매 시즌 홈런 10위 안에 들던 타자였다. 또한 해태 말기 종종 1번으로 출장했던 장성호 역시 전형적인 중장거리 타자였다.[5] 다만 김일권은 82년 시즌 이후 단 한번도 두 자릿수 홈런과 4할대의 장타율을 기록하지 못하고 전형적인 똑딱이로 전락한다.[6] 야구본색에서 밝힌바에 의하면, 김봉연 과 김준환이 사전계획을 짜고 김일권에게 할 것인가를 물어보고 김일권이 "형들이 하는데 나도 해야지" 라고 하자, 결국 실현되었다. 사실 구단주의 눈치를 본 김일권이 두 선배에게 먹는 척이라도 하시라고 손짓을 했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고 한다.[7] 이 시즌 김일권이 당한 삼진은 단 8개다. KBO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 중 한 시즌 최소 기록이다.[8] 이 때에는 살이 좀 찌긴 했었다. 지금은 관리를 했는지 나이에 맞지 않게 동안삘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