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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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는 유시태.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재판
5. 여담


1. 개요


6.25 전쟁 기간인 1952년 6월 25일 '6.25 멸공 통일의 날' 기념대회에서 훈시 중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의열단 출신 유시태(柳時泰)에게 암살될 뻔한 사건.

2. 배경


1951년경,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과정에서 저지른 전술, 전략상 실책들과 한강 인도교 폭파,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 여러 사건으로 인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헌병대로 연행하는 등 일련의 정치파동을 일으켜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했다.
의열단 출신이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시현은 이러한 이승만의 행보에 반감을 품고 암살을 결의했다. 그는 당시 인천소년형무소장이자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 최양옥을 찾아가 "이승만 대통령을 함께 살해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최양옥은 이를 거부하고 내무부 정보과의 박춘개(朴春介) 경감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다. 이에 내무부장관 장석윤과 박춘개는 1952년 1월 하순에 최양옥을 불러 "증거가 불확실하니 더 정확한 정보를 얻으라"며 "인천에서 부산형무소 근무운동을 청탁하면서 알아보라."고 했다.
최양옥은 이에 따라 김시현을 찾아갔지만, 김시현은 최양옥이 고발한 사실을 미리 알고 불쾌하게 대했다. 최양옥은 장석윤에게 자신이 김시현을 고발한 사실을 경찰이 누설했다고 했고, 장석윤은 각 경찰 책임자를 불러 호통쳤다. 몇 달 후 김시현은 인천에서 최양옥을 다시 찾아가 "이 대통령 살해할 목적으로 일선장병을 달래러 갔다 온다. 동조해달라"고 했다. 최양옥은 "안될 말이니 가라"며 돌려보냈다. 결국 김시현은 최양옥 대신 의열단 출신 유시태(柳時泰)를 포섭해 이승만 암살을 감행한다.

3. 전개


1952년 6월 25일, 임시수도인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6.25 멸공 통일의 날' 기념 대회가 열렸다. 유시태는 민주국민당 소속 김시현 의원의 양복을 빌려 입고 김 의원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오전 11시 이승만 대통령의 훈시가 있던 도중 단상 뒤 VIP석에 앉아있던 유시태가 갑자기 튀어나와 3m 남짓 거리에서 이승만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4차례나 저격했으나 탄환이 모두 불발되어 저격이 실패했고, 옆에 있던 경호원이 권총을 든 유시태의 팔을 쳐 떨어뜨린 후 치안국장 윤우경이 뒤에서 유시태를 끌어안아 주저앉혔다. 이후 유시태는 주위에 있던 경호원과 미군 병사들에게 연행되어 헌병대로 끌려갔다가 곧 육군특무대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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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미수 후 연행되는 유시태
이후 경찰은 유시태에게 권총과 양복을 제공한 혐의로 김시현을 긴급 체포하고, 뒤이어 민국당의 백남훈, 서상일, 정용한, 노기용 의원과 인천소년형무소장 최양옥, 서울고법원장 김익진, 안동약국 주인 김성규 등을 공범으로 체포했다. 최양옥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사전에 내무부에 김시현이 대통령 암살을 모의했다고 고발했는데 왜 체포했냐고 물었더니 중장정보요원이 "김시현이 인천에 왔을 때 왜 잡아주지 않았고 동정하지 않았냐. 그것이 죄다."고 말했다고 한다.

4. 재판


1952년 7월 27일 영남지구계엄사령부 법무처로부터 부산지방검찰청에 이송된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은 부상지방검찰청 김달기(金達起) 검사에게 넘겨졌고, 8월 6일 김달기 검사는 취조를 끝내고 김시현 등 연루자 12명 전원을 구속 기소했다. 피의자들의 관련 혐의는 다음과 같다.

김시현(국회의원, 70세): 살인예비, 살인미수, 안녕질서에 대한 죄

최양옥(인천소년형무소장, 59세): 살인예비

유시태(무직, 62세): 살인미수

서상일(제헌국회의원, 66세): 살인미수, 방조, 게엄법 위반 무허가 집회

백남훈(무직, 68세): 살인미수, 방조, 게엄령 위반, 무허가 집회

김성규(약종상, 57세): 살인미수, 방조, 안녕질서에 대한 죄

방주혁(한의사, 74세): 살인미수, 방조, 안녕질서에 대한 죄

김익진(전 검찰총장, 서울고검장[1]

, 57세): 안녕질서에 대한 죄

노기용(국회의원, 56세): 살인미수, 방조

정용환(무직, 27세): 법령 제5호 위반, 무기 불법 소지

유희공(의사, 44세): 법령 제5호 위반, 무기불법 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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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에 회부된 피의자들. 좌측에서 두번째 인물이 김시현이고 우측에서 두번째 인물이 유시태이다.
1952년 8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저격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김시현은 사실 심리에서 암살 시도 동기를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민생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 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며, 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 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 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2]

또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를 죽이기는커녕 되레 주일대사를 시키는 그런 대통령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이에 재판장이 "그렇다면 이 대통령 대신 누굴 대통령으로 삼을 생각이었는가?"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다.

김시현은 유시태, 최양옥과 공모한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시영(유시태)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친구이며, 최양옥은 기미년독립운동 이후에 안 사람이지만 의열단과는 관계가 별로 없다.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작년 9월경부터 이제는 도저히 이대통령을 살릴 수 없다는 심경에 도달하여 최양옥이와 누차 논의한 즉 찬동을 얻었으므로 계획을 실행해 왔지만 나중에 최의 가정이라든가 그 환경을 살펴본즉 결행할만한 의사가 없을 것으로 단정되었기 때문에 유시영이와 협력하기로 변경한 것인데 이제 알고 보니 최는 금년 1월경에 이미 치안국에 내통하였던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일을 많이 해온 관계로 이런 일은 사람이 많을수록 실패하는 것이므로 이번에도 나 혼자 결행할 것이었지 최와 유 양인과 상의한 것조차 후회가 날 정도이다.

김시현은 최양옥과 만나서 얘기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작년 10월 경에 그를 만나 불평을 말하고 민족을 위해 일하려면 정복을 벗으라고 하니 그는 정복 입고서 민족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후 그 집을 방문하니 가정에 낙(樂)을 붙이고 있는 것을 보고 ‘허 이 사람은 일하기는 힘들군'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이용하기를 단념했다."고 대답했다.
한편 유시태는 법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권총 탄환을 일부러 물수건에 적셔 두었다가 불발탄으로 만들었다”고 진술, 살해의사가 없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석방되었을 때는 "그때 권총이 발사되기만 했더라면 이번에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하니다."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
1952년 9월 3일, 대구고등법원은 김시현과 유시태에게 사형을, 서상일과 백남훈에게는 징역 6개월 및 집행유예 1년을, 나머지 김성규, 방주혁, 노기용, 김익진, 최태현, 최양옥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경찰 측과 피고 측 모두 항소했고, 1954년 1월 30일 대법원은 김시현, 유시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서상일과 백남훈에게는 게엄법에 의한 무허가 집회로 인해 유죄 판결이 내려져 각각 징역 6개월에 1년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반면 김성규, 최태현, 방주혁, 김익진, 노기용에 대한 공소를 기각했으며, 최양옥에겐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김시현과 유시태는 옥고를 치르다가 4.19 혁명 직후 석방되었다.

5. 여담


김시현의 변호를 맡았던 장후영 변호사는 이 사건은 민국당을 파괴하기 위해 김시현이 경찰의 양해 아래 연출한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최양옥이 김시현으로부터 암살 계획을 전해듣고 곧바로 치안국 정보수사과에 고발했는데 이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은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사건 발생 3일전인 6월 22일에는 치안국 정보수사과 형사들이 김시현을 체포하고 문초한 결과 혐의가 짙다고 판단하여 강제처분을 결정했는데, 치안국장 윤우경이 일선 수사관을 퇴실시키고 30분간 독대한 후 그대로 풀어줬다는 사실이 관련 경찰관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경찰관들은 김시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자고 상부에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김시현의 행동을 막을 수 없다고 증언했다.
장후영 변호사는 이러한 정황증거와 더불어 "탄환 4발 중에 2발이 구입할 때부터 불발탄이었고 나머지 2발도 손수건에 물을 적셔 싸가지고 다니면서 불발탄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애초부터 살인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권총으로 위협하여 대통령의 각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진술한 유시태의 설명을 볼때 이 일은 자작극임에 분명하며, 따라서 살인 미수 사건은 완전히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에서 알 수 있듯 정작 피고인 김시현 본인부터가 자신이 한 일이라고 진술했는데 그의 변호사가 왜 자신의 의뢰인과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법원도 당연히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김시현과 유시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시현이 1961년 이종률과의 면담을 통해 회고록을 구술했을때도 암살 실행 전 경찰의 조사를 받은 사실이나 살해 목적은 없었다는 유시태의 법정 증언 등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독재자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권총의 불발로 실패했다고 얘기했다.
[1] 이승만과 대립하다가 검찰총장이 서울고검장으로 좌천당하고 서상환 총장에 의해 검사복을 벗었다.[2]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