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용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경찰공무원, 정치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일제 때 항시 권총을 휴대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유자재로 출몰하여 일경(日警)을 괴롭혔던 대담무쌍한 투사(鬪士)''''
- 《사진으로 본 국회20년》(1968)에 수록된 노기용 전 국회의원에 대한 인물평.
2. 생애
1897년 경상남도 초계군 중방면(현 합천군 적중면) 황정리[3]#에서 태어났다. 경성부 보성중학교를 중퇴했다.
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대구의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1920년 그는 송두환·최윤동·김종철(金鍾喆)·정두희 등이 주도·조직한 비밀결사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정두규·노원용(盧圓容)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1921년 8∼9월 권총을 소지하고 경주 양북면의 최세림(崔世林)과 합천 덕곡면의 조성걸(趙性傑)의 집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펼쳤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23년 4월에 합천 초계면의 문재규(文載奎)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1923년 음력 6월에는 이수영(李遂榮)의 집에서 최윤동과 모임을 갖고 전라북도 정읍군에 소재한 보천교 본부를 습격, 교인들로부터 수금한 3만원을 탈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백동희(白東熙)를 새로이 동지로 포섭하여 거사를 준비하였으며 그해 7월 노원용과 함께 군자금 수합을 위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일제 경찰의 경계가 심하자 대전의 윤길수(尹吉洙)에게 권총을 보관시키고 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3년 12월 2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1924년 4월 9일 예심이 종결되고 공판에 부쳐졌으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감정관계로 공판이 여러 번 연기되었다. 1924년 10월 16일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총포화약류단속령 시행규칙 위반, 가택침입,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독립유공자 공훈록 및 공적조서#
광복 후 1946년 미군정 때 경찰 경위에 입직하여 1946년 2월 경감으로 선산경찰서장, 1946년 5월 청송경찰서장, 1947년 2월 문경경찰서장, 대구경찰서장, 1948년 4월 경상북도 경찰학교 교장 등을 지내고 그해 11월 총경으로 퇴직하였다.#
이후 1949년 경상남도 고성군수를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제31선거구(합천군 갑)에 출마하였는데, 9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표가 많이 나뉘어져 23.81%(7,321표)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2대 국회에서 내무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1952년 6월 6.25 전쟁 2주년 부산기념식장에서 발생한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에 김시현, 서상일, 백남훈 등과 함께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1954년 1월 최종적으로 공소 기각 판결을 받기도 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위 선거구에 또 다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유봉순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부터 한의사에 종사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제7선거구(부산시 동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오위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제40선거구(합천군 을)에 출마하였는데, 무려 13명의 후보와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각축을 벌인 끝에 민주당 정길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75년 9월 15일 부산광역시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상신리 박곡재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