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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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독립유공자, 교육자,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백남훈은 1885년 11월 3일 황해도(현 북한 황해남도) 은율군 장련면#에서 백진모(白鎭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살 때 장연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1905년부터 장연예수교회가 세운 광진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경신학교와 보성학교 1·2부 청강생을 거쳤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메이지학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12년 도쿄 조선유학생 학우회 평의원에 선출되었고, 1915년 2월 신익희·김양수·장덕수·최두선 등의 발기로 조직된 재일 유학생 비밀결사 '조선학회(朝鮮學會)'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18년 1월 17일 조선학회 서기에 선출되었으며, 1916년부터는 조선기독교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간사로 선출되는 등 당시 존재하던 거의 대부분의 재일 유학생 비밀결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간부직을 역임했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이던 1919년에는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일본 경찰이 여명회(黎明會)라는 불투명한 단체를 만들어 그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그 해 3월 19일 그들의 의견을 현실에 반영시킨다는 미명하에 공청회를 개최하자, 백남훈은 이 때 유학생 대표로 참가하여 한민족은 도저히 일본과는 동화할 수 없음을 강력히 역설하였다. 같은 해 5월 3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귀국한 후 진주 일신여학교, 부산 동래일신고등여학교를 거쳐 서울 오성학교 후신인 협성실업학교, 광신상업학교 등의 교장으로 재직하는 등 민족교육에 주력하였으며 1925년 백관수·백남운·안재홍 등과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결성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지사적 교육자로 이름이 있었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투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오화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1955년 통합야당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구파에 속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밀양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말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인 1963년 민정당에 몸담았다.
1967년 6월 28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
[1] 28세 남(南)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