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북위)
1. 개요
爾朱榮. 尔朱榮[1]
493년 ~ 530년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의 군벌. 자는 천보(天寶)이며, 시호는 진무왕(晉武王). 북수용(北秀容)[2] 사람이었다. 선대는 글호부(契胡部)[3] 의 유력 부족인 이주부(爾朱部)의 추장이라고 일컬어지며 선조가 이주천(爾朱川)[4] 에 거주한 까닭에 이주(爾朱)를 성씨로 삼았다가 나중에 북위의 권신이 되었다.
2. 생애
부친은 이주신흥(爾朱新興)으로 역사에서 이르기를 "가세가 호족으로 점유하여 재화가 풍성했다" 라고 했으며 "조정에서 매양 정벌함에 있어 사가의 말을 늘 헌납하고 겸하여 물자와 식량을 구비해 군용으로 도왔다" 하니 이런 공로로 산기상시(散騎常侍), 평북장군(平北將軍)에 임명되었다.
이주영은 깨끗하고 미려한 용모에, 궁술과 수렵을 좋아하고, 자못 병법에 밝았다. 젊어서는 북위에 사관하고 용맹과감하여 효명제(孝明帝) 시대에는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었다. 북위 후기 정권에서 육진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기병하고는 신속히 군사 역량을 키워 유격장군(遊擊將軍)ㆍ관군장군(冠軍將軍)ㆍ평북장군(平北將軍)ㆍ북도도독(北道都督)에 임명되었고, 정광(正光) 연간(520~525)에는 육진의 난을 평정하는 무공을 세우고, 이에 의해 거기장군(車騎將軍)ㆍ 대도독(大都督)ㆍ통령병사분광항운육주제군사(統領並ㆍ肆ㆍ汾ㆍ廣ㆍ恒ㆍ雲六州諸軍事)가 더해졌다.
효명제(孝明帝) 건의(建義) 원년(528), 무천진(武川鎮)에 있던 그는 생모인 영태후의 전횡을 제거하라는 효명제의 밀조를 받았으나 음모가 노출되어 효명제는 영태후에게 독살되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이주영은 군측의 간사함을 제거한다고 칭하고는 거병하여 고환(高歡)[5] 을 선봉으로 삼아 휘하인 기마 유목민을 통솔하고서 효명제의 종제인 효장제(孝莊帝) 원자유(元子攸)를 세워 낙양(洛陽)을 공격하고, 비구니가 되어 살게 해달라는 영태후의 요청을 거절하고 영태후가 세운 어린 손자인 효명제의 종자(從子) 소공제(少恭帝) 원조(元釗)와 함께 황하에 처넣고 아울러 원씨 황족과 백관 등 북위의 높으신 분들 2,000여 명을 하음(河陰)[6] 에 끌어내어, 철기로 포위하고 모두 죽였다.이를 역사에서는 '''하음의 변'''(河陰之變)이라고 한다.
얼마 뒤 효장제에게 자기 딸 이주영아(爾朱英娥)를 시집보내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나아가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대장군(大將軍), 상서령(尙書令), 영군장군(領軍將軍)에 취임했다. 이윽고 대승상(大丞相) 태원왕(太原王)이라 칭하고는 적자인 이주보제(爾朱菩提)와 함께 제위를 찬탈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로써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니 이때 "서울과 읍(邑)의 사대부가 열에 하나 없이 인솔하여 모두 도피해 감히 나오는 자가 없고 호위는 공허하여 관(官)이 폐허가 되었다."라고 사서에서는 기록했다.
이주영의 제위 찬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동년 8월에는 후경(侯景)을 선봉으로 삼아 갈영(葛榮)이 영도하는 하북(河北) 봉기를 진압해 멸하고 북진(北鎭)의 난을 평정했다. 이윽고 북위 황족인 북해왕(北海王) 원호(元顥)를 옹위하고 쳐올라온 양나라의 장군 진경지(陳慶之)의 북벌군을 깨뜨리고 천주대장군(天柱大將軍)을 칭하면서 천자의 장인로서의 전횡이 극에 달했다.
효장제는 장인의 발호ㆍ전횡을 괴롭게 여겼고, 또 처인 이주황후가 부형의 권위를 믿고 남편을 항상 업신여겼으므로 마침내 인내력을 잃게 되었다. 효장제는 영안(永安) 3년(530) 9월, 이주황후가 임신 중이었으므로, 장인인 이주영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알리게 하고 동시에 암살을 노렸다.
한편, 이주영은 손자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딸의 상견을 위해 아들인 이주보제 및 자파 황족 원천목(元天穆) 등을 데리고 궁에 도착했으나 효장제는 이를 기회로 궐내에서 이주 부자와 원천목 등을 주살했다.[7][8]
그렇지만 이주영의 사후, 일족인 이주조(爾朱兆)ㆍ이주세륭(爾朱世隆)ㆍ이주천광(爾朱天光)ㆍ이주중원(爾朱仲遠) 등이 거병하여 이주영의 조카인 이주조가 병주(幷州)에서 출병하여 원공(元恭)을 세우니 이가 절민제(節閔帝)다. 효장제는 낙양이 함락되면서 제위에서 폐해지고 진양(晋陽)으로 연행되어 살해되었다.[9] 나중에 선비화된 한족 고환이 이주영의 군대 20여만명을 거두어 기주(冀州)를 점거함으로써 이주 일문은 멸족되었다. 북위는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나아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여 멸망하게 된다.
3. 휘하의 인물
이주영 휘하의 중요 인물로는 고환, 우문태, 후경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새로운 왕조의 실질적 창업자가 되거나 직접 황제가 되었다. 고환은 북제(北齊)의 실질적 창업자, 우문태는 북주(北周)의 실질적 창업자였으며 후경은 잠시나마 양나라 간문제 소강을 폐위하고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고환이나 우문태와 달리 후경은 정치적으로 무능한 무장으로 벼랑끝에 몰려 질렀던 최후의 발악이 허약한 양나라를 무너뜨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결국 왕조의 실질적 창업자로 역사에 남은 고환, 우문태와 달리 후경은 후한(侯漢)를 세웠으나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제거됨으로써 역사에 반역자로 남게 되었다.
[1] 이씨가 아니라 복성인 이주씨다.[2] 현 산서(山西) 삭현(朔縣) 서북[3] 혹은 해란(奚丹), 흉노계의 일파 갈족의 후예로써 동화된 선비족의 별부로 거란의 선조 일파로 간주된다. 거란(契丹)이 한 글자씩 공교롭게도 들어 있다.[4] 지금의 산서 서북부 유경신지(流經神池),오채(五寨), 보덕현(保德縣)의 주가천(朱家川).[5] 이름이 거시기한데(...) 북제의 시조다.[6] 지금의 하남(河南) 맹진현(孟津縣)[7] 자치통감에는 효장제가 직접 맨 처음 칼로 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8] 실제로 효장제와 그 측근들은 왕윤의 동탁 모살을 연구하여 이주영 살해를 계획하였다. 효장제와 측근들은 이주영을 살해하고 왕윤과는 달리 이 나머지를 사면하면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신흥 군벌인 동탁과 달리 이주영은 조상 대대로 세력을 축적한 호족이었고 그 결과는(...)[9] 현 산서성 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