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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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陳慶之
(484 ~ 539년)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명장#s-2. 자는 자운(子雲). 문벌을 중시했던 양나라 사람임에도 시종 출신으로 고관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
본디 시종 출신이었지만 그의 주인이었던 양무제 소연이 바둑을 좋아하여 그가 부르면 한밤중에도 달려왔기 때문에 소연은 그를 좋아했다. 소연이 제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를 따라 제나라의 수도 건강(지금의 난징)을 공격했으며 소연이 황제가 되자(양무제) 주서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군을 이끌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기록을 남기며 불패의 명장으로 칭송받게 된다. 어느 정도였냐면 북위군이 종리에서 양나라군 선봉 1만을 공격해서 장수 조경종이 죽게 생기자 '''300 기병대로 조경종을 구출하는가 하면''', 북위#s-2 정벌(북벌) 때는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벌을 시행하며 낙양 등 30여 개의 성을 점령했다. 그 외에도 북위의 병력이 먼 행군을 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이 숨은 숲#s-1을 200여 명의 기병으로 급습하여 격파하기도 했다. 다만 북벌 자체는 실패로 끝났고, 군이 붕괴되어 진경지 혼자 도주하게 된 사례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평소에 자주 백성들에게 베풀어 인기가 좋았으며 식량난이 있을 때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막았다.
성격이 신중하고 생활도 검소했으며 음악#s-1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삼국지의 두예처럼 무장임에도 궁술이나 승마에 능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부하를 잘 위로하고 그들이 열심히 싸우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2. 일생
2.1. 출신과 몸을 일으킴. 젊은 시절
자(字)는 자운(子雲). 의흥군(義興郡) 국산(國山) 사람이다.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선흥(宣興)서남의 땅이다.
진경지는 어릴 적부터 제(齊)나라의 황족이었던 소연(蕭衍)이란 인물의 근위무사였다 . 소연이란 인물은 매우 바둑을 좋아해서 열중하면 매일 밤부터 아침까지 중단하지 않고 계속 두었다고 한다. 그 시기 동료들은 모두 지쳐서 잠을 잤지만 진경지만이 잠을 자지 않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즉시 달려갔기에 소연으로부터 매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소연은 옹주자사(雍州刺史)로서 양양(襄陽)에 주둔하였는데, 그의 형이 제나라의 황족 소보권(蕭寶卷;폐제(廢帝)/동혼후)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남강왕(南康王) 소보융(蕭寶融)을 받들고 반기를 일으켰다. 소연의 군은 동진(東進)하여 제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을 점령하고 소보권을 폐살(廢殺)하였다.
소연은 소보융을 제나라의 황제(和帝)로 옹립했다가, 곧이어 선양(禪讓)을 받아 신왕조를 열었다. 서력 502년의 일이었다. 신왕조의 국호는 양(梁)이고, 후에 초대인 소연의 시호(諡;죽은 후의 이름)는 무제(武帝)였다. 무제를 따랐던 진경지는 주서(主書)가 되어, 봉조청(奉朝請)에 임명되었다. 그는 재산을 풀어 군사를 모아 나라를 위한 일에 공적을 세우길 염원하고 있었다.
헌데, 여기서 정사에 의하면 진경지의 기술은 20년 정도 비어져 있는 게 문제이다. 소설 분류에서는 진경지와 무제가 바둑을 두어 5승 2패를 했다는 이야기나, 무제의 형 소의(蕭懿)가 소보권에 의해 살해당하는 시기에 진경지가 그 전령으로 이야기했다고 했으나 이러한 삽화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사의 열전에는 진경지가 종리의 싸움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써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2.2. 전설의 시작
다시 정사로 돌아와서. 보통(普通) 6년(525) 북위(北魏)의 서주자사(徐州刺史) 원법승(元法僧)이 팽성(彭城)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원법승은 황제를 칭하였으나 북위의 공격을 받자, 양나라에 복속을 요청했다. 진경지는 무위장군(武威將軍)이 되어, 호용아(胡龍牙), 성경준(成景寯)등과 더불어 군을 이끌고 그를 응대하기 위해 나섰다. 일을 무사히 마친 후 귀환하여 선맹장군(宣猛將軍)-문덕주사(文德主師)에 임명되었다. 또한 진경지는 2천의 군사를 이끌고 예장왕(豫章王) 소종(蕭綜)을 서주로 호송하였다.
북위는 안풍왕(安豊王) 원연명(元延明), 임회왕(臨淮王) 원욱(元彧)등을 파견하여 병사 2만(남사(南史)에서는 병사 10만)[2] 을 이끌고 남하하여, 척구(陟口)에 주둔했다. 원연명은 부장인 구대천(丘大千)을 먼저 파견하여 심량(심량)에 요새를 쌓아 올리게 해 근방에 병위(兵威;병사들의 위세)를 나타내게 했다. 진경지는 그 방루(防壘)의 약한 곳을 찾아내고, 재빠르게 공격해 부수었다. 후에 예장왕이 군을 버리고, 북위에 귀순하여, 양나라군은 총붕괴되었지만, 진경지는 관문을 부수어 깨뜨리고는 밤중에 퇴각해 군사를 보전했다.
보통 7년(526), 양의 정주자사(呈+邑州刺史)-안서장군(安西將軍) 원수(元樹) 등이 북쪽 길에서 여장(黎漿)을 공격하고, 예주자사(豫州刺史) 하후단(夏侯亶)등이 남쪽길에서 수양(壽陽)을 공격하자, 진경지는 하후단을 따라 가절(仮節)-총지군사(總知軍事)에 임명되어 수행하였다.
북위의 양주자사(揚州刺史) 이헌(李憲)은 그의 아들 장균(長鈞)을 파견하여 2곳의 요새를 쌓아 진경지의 진군을 저지하려 했다. 진경지가 이를 공격해 격파하자, 이헌은 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마침내 항복하여, 진경지는 수양성(壽陽城)을 함락시켰다. 북위 측의 52개의 요새를 항복시키고, 7만 5천 명의 남녀(인구)를 획득했다. 이 공적으로 관직은 동궁직합(東宮直閤)으로 옮겨졌고, 관중후(關中侯)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대통(大通) 원년(527), 양나라의 영군(領軍) 조중종(曹仲宗)이 와양(渦陽)을 공격하자, 진경지는 그를 따라 나섰다. 이에 대응해 북위는 정남장군(征南將軍)-상산왕(常山王) 원소(元昭)가 이끄는 기병, 보병 합쳐 5만 명[3] 의 군세를 이끌고 원군으로 달려와, 전군(前軍)이 타간(駝澗)에 이르니 와양에서 겨우 45리의 거리까지 육박했다. 진경지는 이를 맞아 싸울 것을 생각했다. 그러자, 동료인 위방이 말했다.
이에 대해 진경지는적군의 선봉은 경병(輕兵)으로 싸움을 벌여 이긴다 해도 공적을 세우긴 부족하고, 만약 불리해지기라도 하면 우리군의 기세가 꺾일 수도 있소. 병법(손자 군쟁편)에서 말하는 이일대로(以佚待勞, 자군의 피로를 줄이고 적의 피로를 기다린다) 책략을 취하는 것으로 출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라고 말하였다.북위의 병사는 먼 곳에서부터 왔기 때문에 모두 지치고 힘들어 하고 있을 것이오. 전군(全軍)이 집결하지 않은 이때 어떻게든 전군(前軍)의 사기를 꺾어야 하오. 그러자면 그들이 생각치 못한 방법을 써야하오. 정보에 의하면 그들이 주둔한 곳은 나무가 무성한 곳이니 밤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오. 이때 출격한다면 지지않을 것이 틀림없소. 모두가 만약 의혹을 가지고 있다면 나 진경지 혼자서라도 나가서 싸우겠소.
진경지는 휘하 2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출격해, 북위의 전군(前軍)을 격파했다. 이 때문에 북위의 병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진경지는 귀환하여 제장들과 더불어 진영을 옮겨 서진하여 와양 근교의 요새를 점령하고는 북위군과 대치했다. 봄부터 겨울에 이를 때까지 양군의 충돌은 수백 회에 달하였으나, 양나라군의 사기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북위의 원군은 양나라군의 후방에 요새를 쌓고 있었다. 조중종 등은 배후에 적을 두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후퇴할 것을 생각했다.
진경지는 군문의 깃발을 붙잡고는
조중종은 그 장계(壯計)에 따랐다.함께 여기까지 온 지 일 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금과 병기 대부분을 소모하여 장군들 모두 투쟁심은 사라지고, 모두들 오직 전선의 후퇴 및 축소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공적을 세우는데, 두려워해 움츠러들고 물러나려고만 합니까! 나는 군사를 사지에 두어야만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바로 병사을 규합시키고, 나가서 싸웁시다. 군을 나누고 싶다면 분명히 말하시오. 나는 따로 은밀히 내린 칙명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이 같은 건방짐을 말할 수 있는것도 주상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위의 병력이 13개의 요새를 세워 그것에 의지하고 있자, 진경지는 말에 재갈을 물리고 밤중에 출격해 4개의 요새를 빼앗고는 와양 성주 왕위(王緯)을 항복시켰다. 남은 9개의 요새에는 북위의 병력이 충분히 있었다. 허나 양나라군이 진중에서 북위 포로의 목을 베고, 군의 북소리와 더불어 공격에 나서자 기어코 북위군은 패주하여 제각기 베어죽거나, 사로잡히거나 와양강의 강물의 흐름에 삼켜지면서 끝나게 되었다. 뒤이어 와양성의 남녀 3만여 명을 항복시켰다.
무제의 명에 따라 와양의 땅은 서서주(西徐州)에 편입되었다. 양나라군은 승리에 힘입어 이윽고, 성부(城父)에까지 진격하였다. 무제는 이를 치하하고 몸소 진경지에게 칙서를 전하였다.
원래 장군의 가문이 아니고, 또 대호(大豪;대호족)의 태생이 아니어도, 풍운(風雲)을 일으켜 이 정도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심사기략(深思奇略)이 있어 매우 훌륭한 일이다. 곤란을 극복해 끝날 수 있다. 주문(朱門;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집의 문을 붉은색으로 칠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을 열고 빈객을 기다려, 성명(聲名)이 죽간(竹 )에 드리워져 (즉 고관에 올라 명성이 울려 퍼진다)차후에도 이른다. 너무나 훌륭한 대장부가 아닌가.
2.3. 북벌
대통 초년, 북위의 북해왕 윈호가 이주씨(爾朱氏)의 전횡(專橫)에 괴로워한 끝에 스스로 양나라에 망명하여 북위의 황위를 잇기 위해 힘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무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진경지를 가절(仮節)-표용장군(飇勇將軍)에 임명하여, 원호를 북쪽으로 호송할 것을 명령했다. 원호는 환수(渙水)에 이르러 위제(魏帝)의 호(號)를 칭하고 진경지에게 지절(持節)-진북장군(鎭北將軍)-호군(護軍)-전군대도독(前軍大都督)의 지위를 제수하였다. 질현(銍縣)에서 출발해 전진하여 형성(滎城)을 빼앗기 위해 곧 휴양(睢陽)에 이르렀다.
북위의 장군 구대천은 7만의 병사를 이끌고, 9성을 나눠 쌓아 진격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진경지는 이를 공격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3개의 요새를 함락시켜 구대천을 항복시켰다. 뒤이어, 북위의 정동장군(征東將軍)인 제음왕(濟陰王) 원휘업(元暉業)이 우림서자(羽林庶子) 군 2만 명을 이끌고 양(梁;하남성의 지명으로 왕조명이 아니다)과 송(宋;이것도 왕조명이 아니다)의 땅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휘업은 고성(考城)으로 전진하여 주둔하였는데, 고성의 사방(四方)은 물길이 있어 지키기 쉽고, 수비는 견고하였다. 진경지는 물에 뜨는 방루를 쌓을 것을 명령하고는 이것을 이용해 그 성을 공격해 함락시켯다. 휘업은 생포되었고, 병량을 실은 마차 7천 8백 량을 획득해, 대량(大梁)에 보내게 하였다. 원호는 진경지를 위장군(衛將軍)-서주자사-무도공(武都公)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진경지는 곧이어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북위의 좌복야(左僕射) 양욱(楊昱), 서아왕(西阿王) 원경(元慶), 무군장군(撫軍將軍) 원현공(元顯恭)등이 어장우림종자서자(御仗羽林宗子庶子) 병사를 합쳐 7만을 이끌고, 형양에 주둔하여 원호와 진경지의 앞을 막아섰다. 북위의 병사는 정예였고, 성은 또 험준하고 견고해 진경지가 여러번 공격해도 쉽사리 빼앗을 수가 없었다.
북위의 장군 원천목(元天穆)의 대군이 얼마 있지 않아 도착하였고, 표기장군(驃騎將軍) 이주조(爾朱兆)가 거느리는 호기(胡騎) 5천, 기마장수(騎將) 노안(魯安)이 거느린 하주의 보병, 기마(夏州步騎) 9천이 선봉으로 파견되어 양욱을 구원하러 왔다. 또 우복사(右僕射) 이주세륭(爾朱世隆)도 파견되어, 서형주자사(西荊州刺史) 왕비(王羆)의 기병 1만이 호뢰관(虎牢關)에 주둔했다. 원천목은 이주조 등과 앞뒤로 형양근교에 도착해, 양나라군을 포위하니 그 병력이 무려 30만명에 달하였다. 양, 위 두나라 군의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형양은 아직 빼앗지 않아, 양나라군의 병사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진경지는 말의 안장을 풀고는 여물을 먹이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병력을 성을 공격하는 데 투입하여 동양(東陽)의 송경휴(宋景休), 의흥(義興)의 어천민(魚天愍)이란 장사가 성벽을 먼저 올라 뛰어넘어 성안으로 쳐들어가자 기어코 형양성을 함락시키고 양욱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원천목이 이끄는 북위의 대군이 성을 포위했으나 진경지는 기병 3천을 이끌고 성을 베개삼아 맞아싸워 이들을 크게 격파했다.나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성을 빼앗고 땅을 얻어, 수입은 적지않다. 그대들은 위나라 사람의 부모형제를 죽이고, 위나라 사람의 자녀를 약탈해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원천목의 군사는 모두 이것을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우리는 불과 7천이며, 적병은 30만에 이른다.[4]
오늘 벌어질 일에 따라 생기는 길은 우리의 생존을 도모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에게는 이민족의 기병과 평원에서 싸울 힘이 없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반드시 눈앞의 성루(형양성)을 빼앗을 필요가 있다. 그대들에게는 망설이고 있을 짬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스스로 사지로 들어가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노안은 진지 가까이에서 항복을 요청했고, 원천목, 이주조는 단신으로 도망쳤다. 형양에 있던 북위군의 비축물을 접수하자 소,말, 곡식과 옷 등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경지가 호뢰관으로 진군하자, 이주세륭은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북위의 효장제(孝莊帝;원자유(元子攸)는 공황에 빠져 병주(幷州)로 도망쳤다. 임회왕 원욱, 안풍왕 원연명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부고(府庫)를 봉한 뒤 법가(法駕)를 정비하여 원호를 맞이하고는 낙양궁 어전전(御前殿)으로 모셨다.
원호는 개원(改元)하고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원호는 진경지를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임명하고 1만 호의 식읍을 증봉하였다.
북위의 대장군 상당왕 원천목, 왕노생(王老生), 이숙인(李叔仁)들은 4만의 병사를 이끌고 대량(大梁)을 공격해 함락하고는 왕노생, 비목(費穆)에게 병사 2만을 나눠주어 호뢰관을 점거하게 했다.
양, 송 2주(州)에 들어왔으나, 진경지가 기습을 가하자 모두 항복했다. 원천목과 10여 기의 병사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무제는 몸소 칙서를 하사하면서 그를 칭찬하였다.
진경지의 휘하들은 모두 하얀 옷으로(白袍) 치장한 것으로 유명하고 가는 곳마다 항복하거나 따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 후에는 낙양에서 이런 동요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진경지가 치현에서 출발하여 낙양에 이르기까지 140일 동안 32개 성을 함락시키고 47회의 전투에서 모두 이겨 그를 막을 적이 없었다고 한다.이름난 사령관이나 대장이(名師大將) 굳게 지키더라도, 천병만마(千兵萬馬)의 대군이 있더라도 백포(진경지의 부대)를 피하라.[5]
2.4. 북벌의 실패
북위의 효장제가 단신으로 도주하였기 때문에 궁의 시위(侍衛)와 빈(嬪)은 그대로 낙양에 남겨져 있었다. 이것을 얻은 원호는 주색에 빠져 밤낮으로 연회를 열었고, 또한 정무를 게을리 하였기 때문에 조야(朝野)의 사람들은 실망하였다. 또한 안풍왕, 임회왕들과 더불어 간계를 세우고 지금까지의 양나라의 은혜를 배신하고 빈공(賓貢)의 예도 끊었다. 정세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에, 진경지의 힘을 이용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험담을 하고 몰래 의심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진경지가 이끌고 온 남부 지방의 군대도 낙양에서 포악하게 굴어 북위의 어지러운 정치에 실망하고, 육진의 난으로 시달리며, 이주영의 횡포에 두려워해 내심 양나라의 통치를 기대했던 낙양의 주민들이 실망감을 느꼈다.
진경지는 윈호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다음과 같은 계책을 세웠다. 그리고 원호에게 설명하였다.
원호는 그 말에 따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원정명이 원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지금은 멀리 여기까지 도달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굴복하지 않는 세력이 아직도 많습니다. 만약 적이 우리군의 병사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윽고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이 알려지기 전에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무제에게 알려서 정예병력을 요청하십시오. 여러 주(州)를 누르기 위해서도 남인(南人;남조를 말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여기서 멀리 보내버리셔야 합니다.
원호는 그 때문에 진경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후부터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진경지는 병력의 수가 수천밖에 되지 않지만 벌써 억제하는것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제와서 그 군사를 늘리게 되면, 이번엔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권세는 떠나보내고 북위의 종묘사직(宗廟社職)은 여기서 끝날 것입니다.
원호는 진경지가 병력을 늘리는 것을 우려하면서 조용히 무제에게 상표했다.
이 때문에 무제는 조서(詔書)를 보내 병력을 모두 국경에서 멈추게 하였다. 낙양성 아래의 남인은 1만을 넘어섰으나 이민족은 그 10배에 달하였다. 군의 부장인 마불염(馬佛念)이 진경지에게 말하였다.하북과 하남은 한 번에 수중에 모두 들어왔고, 다만 이주영이 발호할 뿐입니다. 이것은 저와 진경지의 힘으로 무찔러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여러 주와 군(郡)이 새로 굴복하였기에 아직까지도 안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않기 위해 지금은 병력을 증원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진경지는 그 자립의 권유에 따르지 않았다.공적이 높아진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군의 주인이 된 몸으로서 위험이 다가오고,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장군께서는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 위험한 땅을 도와 어려운 일을 바로잡은 사람도 무사히 일을 끝내고 환영을 받은 예는 아주 적습니다. 지금 장군의 위세는 중원을 흔들고 명성은 하새(河塞;변방을 말함)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윈호를 살해하고 낙양을 점령한다면 이것이 천재일우의 기회일 것입니다.
이전에 원호가 진경지를 서주자사에 임명하였기 때문에 진경지는 임지를 지키기 위함이라며 부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원호는 그를 자유롭게 만들기 원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파견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진경지는 다시는 이 말을 입 밖에 내뱉지 못했다.주상(主上;무제를 말함)은 낙양 땅의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주었소. 이제와서 낙양의 조정(朝廷)을 버리고 팽성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면, 그대는 부귀를 얻겠지만, 국가의 대계를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오.
북위의 천주장군(天柱將軍) 이주영, 우복야 이주세륭, 대도독 원천목, 표기장군 이주조, 영(榮)의 장사(長史) 고환(高歡), 선비(鮮卑), 말갈 등 100만을 호칭하는 대군세가 효장제를 옹립하고 원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호는 낙양에 거주한 지 65일. 그동안 얻었던 성의 대부분이 순식간에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진경지는 강을 건너 북중랑성(北中郞城)을 지키며 3일 동안 11번의 전투를 벌이면서 적의 병력을 격파했다. 그 때문에 이주영은 후퇴했다.
이때 유영조(劉靈助)라 불리는 천문을 볼 줄 아는 이가 이주영에게 말하였다.
이주영은 나무를 묶어 다리를 만들어 협석(硤石)을 통해 강을 건너서 하교(河橋)에서 원호와 싸웠다. 원호는 대패하여 패주하다가 임영(臨潁)에 이르러 적을 맞나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때문에 낙양은 함락되었다.10일에 출발하신다면 하남을 모두 얻으실 수 있습니다.
진경지는 기병, 보병을 합쳐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진을 정비하여 동쪽으로 이동했으나 이주영의 추격을 받다가 숭고산(嵩高山)에서 홍수를 만나 군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6] . 진경지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승려를 가장하여 지름길을 통해 예주(豫州)에 이르러 예주사람 정도옹(程道雍)에게 도움을 받아 여음(汝陰)까지 갈 수 있었다.
수도 건강에 귀환하여 북벌의 공을 인정받아 우위장군(右衛將軍)에 임명되었고, 영흥현후(永興縣侯)에 봉해지고, 식읍 1,500호를 하사받았다.[7]
2.5. 말년
진경지는 다시 전선에 나갔고, 지절(持節)-도독연회제군사(都督緣淮諸軍事)-분무장군(奮武將軍)-북연주자사(北兗州刺史)를 겸임했다. 그때 승려 강(强)이란 인물이 황제를 자칭하고, 또한 토호(土豪) 채백용(蔡伯龍 혹은 채백총 이라 불리기도한다.)이란 사람이 병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하였다. 승려 강은 환술에 밝아 민중을 선동하길 잘하여 민중 3만 명을 모아서 북서주를 공격해 함락했다. 제음태수(濟陰太守) 양기문(楊起文)이 성을 버리고 패주하고, 종리태수(鐘離太守) 단희보(單希寶)가 살해당하기에 이르자, 무제는 진경지에게 이 반란군을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
무제는 스스로 거마에 오를 때 진경지에게 말했다.
진경지는 명을 받들어 전장에 나섰다. 12일이 지나기도 전에 채백용과 승강을 죽이고는 그 머리를 갖고 돌아왔다.강회(江淮)의 병사는 강(强)해서 그 예봉(銳鋒)은 맞서기가 어렵다. 경(卿;신하을 높여 부르는말.)은 책략을 이용해 그들을 제압해야 하므로 당연히 쓸데없이 결전해서는 안 된다.
중대통 2년(530) 진경지는 도독 남북 사서예예 사주제군사(都督 南北 司西豫豫 四州諸軍事)-남북사이주자사(南北司二州刺史)에 임명되어 임지에 이르러 현성을 지켰다. 북위의 영주자사(潁州刺史) 누기(누起)를 공격해 양주자사(揚州刺史) 시전보(是傳寶)를 진수(溱水)에서 격파, 또한 행태(行台) 손승(孫勝), 대도독 후진(後進), 예주자사 요웅(堯雄), 양주자사(梁州刺史) 사마공(司馬恭)들을 초성(楚城)에서 무찔렀다.
의양진(義陽眞)의 병사를 격파하고, 수륙의 교통을 끊음으로써, 강호(江湖)의 여러 주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이 말은 북위의 남조 침략을 위한 교두보가 파괴당했기에 북위가 한동안 침략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새로이 밭 6천 경(頃)을 개간하였기에 2년 후에 창고가 가득하였다. 무제는 여러 번 이 공로를 치하하였다. 또한 남사주(南司州)에 안육군(安陸郡)을 부활시키고, 상명군(上明郡)을 설치하였다.
대동 2년(536) 동위(東魏)는 후경(侯景)이 이끄는 병사 7만을 파견하여 양나라의 초주(楚州)를 공격하여 자사인 환화(桓和)를 사로잡았다. 후경은 회상(淮上)으로 진격하여 진경지에게 서찰을 보내 항복을 촉구했다. 진경지는 무제의 칙명에 따라 상담후(湘潭侯)로 퇴각한 후 우위(右衛) 하후기(夏侯虁) 등의 원군과 가세하여, 군이 여장에 이르자 진경지는 후경을 격파했다. 이 시기 큰 추위의 눈 속에서 후경은 수송대(치중)를 버리고 패주하였고, 진경지는 적이 남긴 물자를 거두어 귀환하였다.
이 공으로 인해 진경지는 인위장군(仁威將軍)이란 직함으로 승진했다. 그해 예주에는 기아가 발생했으나, 진경지는 관창(官倉)을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어 많은 백성들을 구해주었다. 주민 이승(李昇)등 800명이 표(表)를 올려 수비(樹碑)에 그 공덕을 새겨 기념하기를 요청하였기에 무제는 이것을 승낙하였다.
대동 5년(539) 10월에 진경지는 죽었다. 향년 56세. 산기상시(散騎常侍), 좌위장군(左衛將軍)의 관직을 추증받았다. 시호는 무(武). 칙명으로 인해 진경지의 고향인 요흥군에서 상(喪)을 발표하였다.
진경지는 성격이 신중하고, 매번 명을 받을 때마다 먼저 목욕재계한 후 받았다. 생활은 검소하였고, 사치스런 의복은 입지 않고 그저 흰 옷을 입었을 뿐이며, 관현음악등을 좋아하지 않았다.(당시 음악을 즐기는 데에는 꽤 비용이 들었던 것 같다.) 무장이면서 활쏘기에 뛰어나지 않았고, 말타는 것도 익숙치 않았다.(무장의 기본소양인 활쏘기와 말타기가 안 된다는 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군사를 잘 돌보아 병사들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였다. 장자 소(昭)가 뒤를 계승하였다.
더욱 특이한 것은 진경지의 출신이 매우 미천하다는 것이다. 문벌을 중시하는 남조 양나라에서 그같은 출신으로 고관에 오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양나라 역사상 그와 같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그와 (관직이 운기장군-안주자사에 이른) 유약 둘뿐이었다.
진경지는 장략(將略)이 있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얻었다. 생각컨대 춘추시대 염파(廉頗), 이목(李牧), 전한시대 위청(衛靑), 곽거병(藿去病)에 버금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진경지는 깨달음이 빠르고 젊을 적부터 무제를 시종하였다. 원한다면 옛 은혜에 따라 관직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공손하고 태도를 삼가, 매미의 관(冠)을 쓰고, 실에 꼬아만든 옥(玉)을 내려(말하자면 현직 고관에 올라), 즉 일세의 영광을 얻었다.
《양서》(梁書)
진경지는 처음 제비와 공작의 무리에서 놀았으나, 마침내 홍곡(鴻鵠;큰기러기와 고니; 임금의 의중)의 뜻을 알아, 혼자서 대임을 맡게 되어, 길고 긴 원정을 통해 이수(伊水;하남성 서부의 강), 낙양에 이르렀다. 전진하며 적의 저항을 없애고, 공격한 적의 견고한 성은 모두 빼앗았다. 남풍이 다투지 않았다고는 해도(남쪽 나라의 세력이 약하다고 하지만) 마침내 뒤집을 수 있었다. 진경지의 전승(戰勝)은 그 칭송함에 있어 충분한 것이다.'
《남사》(南史)
3. 기타
그의 군대가 벌인 활약상은 고사성어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천병만마(千兵萬馬)라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것처럼 이는 '천 명(名)의 군사(軍士)와 만 마리의 군마라는 뜻으로,썩 많은 군사(軍士)와 말을 이르는 말'이다. 근데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군사를 진경지가 이끌었다는 말은 아니고, 그의 위명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적국 북조인 북위에서 나온 "이름난 대장(名師大將)이 있어도,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있어도 백포(白袍)가 나타나면 도망쳐라"라는 동요에서 유래된 것이다. 여기서 백포란 진경지와 그의 군대를 뜻하는 말로 그와 그의 부대가 출전할 때마다 흰 두루마기 천을 둘렀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4. 서브컬처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전설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양 웬리의 모델이 진경지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지만, 작가 다나카 요시키는 양 웬리의 모델은 특별히 없다고 말했고 본인은 진경지의 존재를 몰라 알고 난 뒤 놀랐다고 한다. 다나카 요시키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분류》라는 소설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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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시리즈에서 등장. 통솔력과 지력이 90대인 총사령관이다. 그러나 두예#s-1처럼 승마와 궁술에 능한 편이 아니라서 무력이 엄청나게 낮다. 사실 일본에서도 그다지 잘 알려진 장수는 아니었지만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의 모델이 아니냐는 썰이 돌면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활용도는 해당 작품의 전투 시스템에 따라 다르다.
삼국지10처럼 전법 같은 거 없고 통솔이 부대공방을 좌우하는 시스템이 전투에 한정하면 가장 좋고, 삼국지9처럼 부대공방은 통솔을 따르되 병법의 위력이 무력에 따라 좌우되는 시스템이 그 다음,[8] 삼국지11처럼 부대공방이 무력을 따라가는 시스템이 최악이다. 보기궁 중에 기마 적성이 제일 높게 책정되는데 무력이 낮아서 11같은 시스템에선 쓸 길이 없다. [9]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96/무력 25/지력 91/정치력 70. 병법으로 돌격, 주사, 연사, 조영, 혼란, 고무를 가지고 있다. 제갈량, 두예처럼 통솔과 지력이 높고 무력이 낮은 사령관으로 가진 병법들이 비교적으로 좋지만 보다시피 무력 때문에 계륵이다. 통솔을 살려 주장을 맡되 배치는 뒷렬로 해서 혼란을 쓰거나 아니면 다른 무장들에게 돌격, 주사, 연사를 가르치는 게 이득이다. 사실 완전체가 아닐 뿐이지 충분히 좋은 무장이다. 삼국지9는 부족한 무장 여럿이 합쳐 서로의 단점을 메워주는 시스템인데 통솔과 지력이 모두 높은 진경지는 허저나 전위처럼 무력은 최상급이지만 통솔이 낮은 무장들과의 시너지가 정말 좋다. 무력이 낮다는 것도 큰 문제라고 볼 수 없는 게, 어차피 제대로 된 싸움을 할려면 순수하게 공격계 병법으로 도배하기보다는 부대 중에 브레인 한 명 쯤은 넣어줘야 하기 때문에 지력과 통솔이 높은 진경지는 부대장과 브레인의 역할을 겸할 수 있으며, 대신에 어태커 한 명을 더 넣는 것으로 해결이 된다. 게다가 혼란도 쓸 수 있는데 이게 성공하면 다른 무장들이 병법을 발동하는 트리거가 되기도 한다.
삼국지 10에서는 등봉된 스페셜 시디의 고대 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96/무력 7/지력 90/정치력 74/매력 80, 특기가 16개이다. 삼국지10에서 무력은 일기토, 성벽 보수, 부대행동력에만 영향을 미치고 부대 공방은 통솔을 따라가기에 진경지가 전투에서 활약하기 가장 좋은 시스템이다. 다만 무력이 전작인 삼국지 9 때보다 더욱 낮아져 7밖에 안 되는데 하필 명사 특기가 없어 설전을 못하기 때문에 반론, 반박이 있음에도 도적에게 돈을 갈취당한다. 퀘스트 수행과 전투로 최대한 빨리 명성을 쌓아서 명사 특기를 획득해야 한다.
삼국지 11에도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91/무력 6/지력 90/정치력 71/매력 80. 병과 적성은 기병만 S에 노병과 수군이 A. 특기는 백마#s-7이고 무력은 '''딸랑 6'''. 문제는 이놈의 삼국지 11이 전작들과 달리 부대 공격력이 무력으로 결정된다. 특기인 백마는 무력에 따라 효율이 좌우되는 특기라 진경지의 주장으로서의 활용도가 너무도 낮기 때문에 사실상 진경지는 문관이라 봐야 한다. 통솔력이랑 지력은 90대로 좋으니 무력 센 무장이랑 의형제로 엮어 쓰면 괜찮다. 의형제가 아니더라도 진경지의 지력이 높아 기병의 지력보조용 무장 겸 백마 특기 활용으로 쓸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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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무목악왕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병과는 도독. 능력치는 무력 25, 지력 87, 통솔 94, 민첩 67, 행운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