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창대군

 


'''조선 도조의 왕자'''
'''완창대군
完昌大君'''

'''작호'''
완창대군(完昌大君)
'''시호'''
정간(貞簡)
'''본관'''
전주(全州)
'''이름'''
'''고려식'''
자흥(子興)
'''몽골식'''
타스부카(塔思不花)[1]
''''''
성첨(聖瞻)
''''''
취헌(翠軒)
'''부왕'''
조선 도조
'''모후'''
경순왕후 박씨(敬順王后 朴氏)
'''부인'''
한양 조씨(漢陽 趙氏)
'''묘소'''
함경남도 함흥시 귀주동
'''생몰기간'''
1305년 ~ 1342년
1. 개요
1.1. 생애
2. 사후
2.1.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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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추존왕 도조 이춘장남이다. 환조 이자춘의 형이자 태조 이성계의 큰아버지이다. 이름은 이자흥(李子興), 몽골식 이름은 리타스부카(李塔思不花)이며 전주이씨 완창대군파의 파시조이다.

1.1. 생애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이춘원나라의 천호(千戶)였다. 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년) 7월에 아버지 이춘이 죽기 직전에 이자흥에게 천호직을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측실 조씨는 자신이 낳은 완자부카(完者不花)나 나하이(那海)에게 넘겨주기를 바랐다. 그 일로 이자흥과 조씨 부인은 다투었고, 이자흥은 원나라에 직접 가서 자신이 적장자임을 밝히고 천호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겨우 2달 뒤인 그 해 9월에 사망했다.(...)

2. 사후


그가 죽고 그의 아들 이교주가 천호직을 물려받아야 했지만 너무 어렸다. 이에 이춘의 측실인 조씨가 이번에도 자신의 아들들이 이어받길 바랐다. 사실 조씨가 바로 쌍성총관부의 2대 총관 조양기의 딸이었기에 힘으로 자신의 아들을 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이자흥의 친동생인 이자춘이 물려받는다. 이자춘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교주에게 돌려주기로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카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천호가 된 이자춘은 훗날 고려에 투항하여 쌍성총관부를 99년 만에 탈환하는 공을 세운다. 그리고 그 때 같이 공을 세운 이자춘의 아들이 훗날 조선을 건국한다.
조카 이성계가 즉위한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871년(고종 8년) 3월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872년(고종 9년) 12월에 완창대군(完昌大君)으로 추봉되었고,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2.1. 가족과 후손


한양 조씨 조숙의 딸과 혼인했다. 아들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태조실록 - 총서》의 21번째, 22번째 기사에는 이자흥의 아들이 이교주(李咬住)로 나와 있다. 그런데 59번째 기사에는 이교주와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으로 알려진 이천계가 같은 사람이라고 적혀있다.# 그래서 저 둘이 과연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저 문제는 당대는 물론, 500여 년이 지난 고종 때에도 언급이 됐던 모양이다. 이천계는 환조 이자춘의 아들 자격으로 1872년(고종 9년)에 영성대군(永城大君)이란 군호를 받았다. 그러나 1900년(광무 4년)에 완순군 이재완이 이자춘의 능인 정릉(定陵)의 비문과 옛 선원보략을 근거로#, 이천계가 이자흥의 소생임이 판명되었으니 군호에서 대자를 빼고 그냥 영성군(永城君)으로 봉하기를 고종에게 청해 허락받았다고 한다.# 이로 보아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이교주와 이천계를 동일인으로 판단한 듯하다. 현재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이천계를 완창대군의 아들로 보는 듯하다.#
일부 학자들은 이천계와 이교주가 다른 사람이며, 이교주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이천계가 이자흥의 양자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현대의 유명한 후손으로는 전 국회부의장 이석현이 있다.#


[1] 굳센 황소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