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영
1. 개요
李忠榮.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전 국무총리 이수성, 전 국회의원 이수인의 부친이자, 전 기획재정부장관 윤증현의 장인이다.
2. 생애
1908년 2월 27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이상준(李相駿)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 1929년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193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듬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부친 이상준은 논 여섯 두락을 경작하면서 소규모 약종상을 운영했고 자산은 약 800원으로 추산되었다.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까지 오랜 기간 일본 유학을 감당할 수 있는 가정형편은 아니었다. 학자금은 미쓰이(三井)광산 대표 마키타 다마키(牧田環)가 제공했다.[1] 마키타는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출신으로 미쓰이 재벌의 주요 경영자였다.[2]
귀국 후 1934년 대구지방법원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함흥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평양복심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평양복심법원 재직 중 평안남도 일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평남도립의원 의사의 업무상과실치사 사건을 담당, 무죄 판결을 쓰고 난 직후 1941년 사표를 던지고 법원을 떠났다.
이후 동아특종광산 및 의림광업 취체역을 지냈다. 당시 광산회사는 크게 한탕을 노리는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1943년 경성에서 변호사로 개업, 광복 후에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6.25 전쟁 중인 1950년 8월 납북됐다.
울산 갑부집 딸 강금복과 결혼했다. 강금복(1911~2001)은 경북고등여학교와 니혼여자대학 국문과 출신이다. 처남 강정택(姜鋌澤)은 제1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농림부 차관을 지냈는데 이충영과 같이 납북됐다.
이충영이 납북된 뒤, 강금복은 어려운 형편에서 혼자 4남 4녀를 키웠다. 네 아들은 모두 서울대학교를, 네 딸은 모두 이화여자대학교를 나왔다. 장남은 이수성, 차남은 이수인이고, 3남 이수윤은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로 있고, 4남 이수억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SBS 스포츠국 제작국장, 아서앤더슨 대표를 역임했다.
화가 나면 한 되짜리 술병으로 미운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성미였다고 전한다.
일제 말기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고 각종 친일단체[3] 에서 활동한 친일 이력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등재되었다.
3. 관련 도서
딸 이자혜[4] 가 이충영 변호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 '혜화동 5번지'(부제: 딸의 노래, 라이트북닷컴, 2002년)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