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완(군인)
[clearfix]이제 곧 연평해전이 있었던 6월이 다가온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나는 악몽을 자주 꾼다.
꿈에서 나는 잃어버린 다리를 다시 찾았다.
참수리 357호가 거친 물보라를 일으키며 전속기동을 하고 나는 갑판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리고는 소리친다. 다급하게 탄약수를 부른다. 의무병을 부른다.
쏴라-. 쏴.
싯뻘건 불덩이가 내 쪽으로 날아온다.
그러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어느새 아내가 눈물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이후의 인터뷰에서.
출처 - 해군지 2010년 05·06월호.
1. 개요
대한민국 해군의 군인이다. 현재 계급은 중령이며. 제2연평해전 참전용사이다.
2. 생애
경상북도 금릉군에서 태어나 구성초등학교, 울산중학교, 울산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0년에 해군사관학교 54기로 졸업한 후 해군 항해소위로 임관하여 구축함에서 근무하다 중위로 진급하였다. 중위로 진급한 이후에 참수리 357정의 부장이 되어 제2연평해전에 참전했다. 당시 정장은 윤영하 대위(전사 후 소령으로 추서)였다.
2002년 6월 29일 북한 해군 서해함대사령부 산하 8전대 예하 7편대 소속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의 85mm 전차포 선제 발포 및 함교를 저격한 집중포화 도중 정장 윤영하 대위가 그 자리에서 저격수에게 등을 피격당해 즉사[1] 하고, 부장이였던 이희완 중위는 684정의 갑판과 조타실 뒷편 포대에서 발사된 4연장 고사총의 14.5mm 탄환과 37mm 포탄에 다리를 맞아 한쪽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이런 와중에도 불구하고 참수리 357호정의 정장 대리를 맡아 진두지휘하여 북한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정장을 비롯하여 6명의 승조원들을 이 전투에서 잃었으며 그 자신 역시 끝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았다.
이후 장애인이 된 관계로 현역 부적합 심의에 회부되었으나 1997년에 신설된 군인사법 53조 4항의 ③ ‘본보기가 될 만한 행위로 인해 신체장애인이 된 군인의 현역복무’에 의한 규정으로 인하여 현역으로 남게 되었으나 두 번 다시는 배를 타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신 정훈으로 병과를 전과하고 해군사관학교 교관직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02년말에 제2연평해전 당시 다리를 잃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진두지휘해서 방어를 성공한 점을 높이 사서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2004년에 결혼했다.
2010년 10월 1일에 국군의 날을 기념하여 제1회 위국헌신상에서 하종식 중령(육사 44기)과 같이 '충성' 부문에서 선발되었다. 위국헌신상에 수상되면 대령 이상의 계급까지 최단기간으로 진급하게 된다고 한다. 일선에서 복무하지 못해 현행법상 진급하기 어려운 현실도 감안된 듯 하다.
2015년부터는 합동군사대학 해군 작전교관으로 근무 중.
2017년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2020년 현재 해군본부에서 근무중이다.국방일보
3. 여담
제2연평해전에서 참수리호 승조원 중 이희완 중위와 박경수 중사 단 둘만 해군에 남았으나 박경수 중사는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현재 참수리호의 생존자 중 해군에 복무하는 사람은 이희완이 유일하게 되었다.
영화 연평해전에서는 김태희의 남동생 이완이 맡았다. 같은 울산 출신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캐스팅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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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령으로 진급하자마자 잠실 야구장에서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 참여해 시구를 했다.
[1] 부검결과가 어떨지는 아직 정확히는 모르나, 등쪽에서 피가 흘렀다는 이희완 소령의 증언으로 보아 등을 돌리고 지시를 내리는 순간 저격수가 그 짧은 순간을 캐치하여 등을 쏘아 맞추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사한 것을 보아 심장 부근 급소에 박힌 듯. 국내생산한 구형 지퍼식의 앞부위에 4개의 파우치가 존재하는 방탄복 성능이 어느 정도 튀는 파편은 막았을지 모르지만, 총탄 관련해서는 방어력이 좋지 못한 것이 밝혀졌는데, 구명조끼까지 덧입혀져 있어서 파편보다는 총탄에 맞았을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