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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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연평해전 보름 전 윤영하 대위(당시)와의 인터뷰에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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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연평해전의 영웅이며, 서해 NLL을 목숨바쳐 사수한 대한민국 해군의 진정한 군인으로 비록 전투 초반에 전사했지만, 끝까지 자기 임무를 다하고 귀감이 된 참군인이다. 당시 참수리 357호정의 승조원들이 등산곶 684호정의 선제 기습 포격에 맞설 수 있도록 대응사격 명령을 내렸다.
2. 생애
1973년, 경기도 시흥군(또는 인천시)에서 예비역 해군 대위 윤두호(해사 18기)[4] 씨와 어머니 황덕희 씨 사이에서 아들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자신의 아래로는 친동생 윤영민이 있었다.
아버지는 해군 전역 후 해운 회사에 근무하셨는데 윤 소령은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때 3년 동안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국 생활의 영향으로 영어에 능통했었다고 한다. 귀국한 뒤 인천 소재의 모 중학교와 송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해군사관학교 50기로 졸업 및 해군 항해 소위로 임관하였다. 전차상륙함인 계봉함 갑판사관, 제118조기경보전대 상황장교, 제천함 작전관으로 근무하였다. 1999년 인하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1월 참수리 357호정의 정장으로 부임하였다.
2002년 6월 29일 NLL을 넘어 남하, 도발한 북한 해군 8전대 소속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과의 전투인 제2연평해전에서 전투 초반에 684호 선수에 장착된 85mm 전차포 초탄의 조타실 명중 이후, 파편상을 입었음에도 승조원들을 독려하며 지휘를 계속하던 개전 직후 승조원들에게 함교를 향한 적의 집중 사격을 포착해 포탄 파편에 맞은 상태로 '쏘란 말이야...!' 라는 명령을 거의 쓰러져가는 목소리로 내리고 다시 일어서서 지휘를 시작했으며,[5] 교전 개시 4분 후인 10시 30분경 "엎드려!" 라고 명령을 내린 그 순간, 참수리 357호정의 함교에 포탄이 한 발 명중해 폭음과 파편으로 357호의 함교가 아비규환이 된 틈을 타 그를 포착한 684호에 승조한 저격수[6] 가 쏜 78식 저격보총에 등 쪽에 한 발을 저격당하고 심한 관통상을 입어 함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뒤로 쓰러져 일자로 누운 상태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결국 눈을 감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전사했다. 쓰러진 윤 소령을 본 박동혁 수병(의무장)[7] 이 CPR과 지혈을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8] 이후 대위에서 소령으로 1계급 추서,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수습된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게다가 연평해전 개봉 전에 그의 동기였던 이성민 소령과 1년 1기수 후배였던 이동진 소령이 나온 뉴스에서 윤영하 소령 자신이 해전에 출격하기 직전 해군사관학교 동기 기수들의 모임에서 가수 캔이 불렀던 천상연을 부르곤 했는데,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계속 그 노래만 불렀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윤영하 정장이 전사하자 참수리 357호정의 지휘권은 윤영하 대위의 부장이었던 이희완 중위에게로 넘어갔으며 이희완 중위는 대리임무로 한쪽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지휘해서 승리로 이끌었다.
3. 기타
- 아버지인 윤두호 씨와도 상당히 애틋했던 모양이다. 당대 시대상 친숙히 부르는 아빠 칭호가 지금보다 흔치 않았음에도 스물여덟의 나이에도 윤두호에게 아빠라고 불렀다고 한다.
- 2007년 그의 이름을 따 윤영하함(艦)이 진수되었으며 2009년 6월 실전 배치되었다.
- 그리고 2015년 연평해전 개봉 후, 연평해전 흥행 등의 성과로 인하여 따로 동떨어져 있었던 현충원 전사자 묘지에서 제2연평해전 전사자 합동묘역에 합동 안장(이장)되었다.
- 2017년 6월 29일, 윤영하 소령의 부친 윤두호 翁이 윤영하함을 방문했다.
- 2018년에 해군이 윤영하 소령이 다녔던 영국의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 그의 부친은 손자까지 대를 이어 해사 출신 해군 장교로 복무하기를 바랐지만 아들이 미혼인 채 후사를 보지 못하고 전사함으로써 꿈이 무산된 것에 아쉬운 감이 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1] 그런데 묘비에는 인천 출생이라 적혀있다. 시흥군 출신이 맞는다면 소래읍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2] 제2연평해전 당시는 대위로 사후 소령으로 추서되었다.[3] 당시 2002년 월드컵의 열광이 불던 시기였다. MBC 뉴스데스크는 국군장병의 월드컵 응원 모습도 중계했는데, 우연하게도 참수리 357호정의 승조원들의 모습을 방영했다. 그 중 윤영하도 포함된 것. 연평해전 후 MBC 뉴스데스크는 그들의 순국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이 방영을 다시 요약본으로 틀어준다.[4] 윤두호 대위는 1970년 6월 29일, 공교롭게도 32년 뒤 아들이 전사한 날짜와 같은 날 북한 해군의 4t급 간첩선을 나포하여 무공 훈장을 받았다.기사[5] 실제로 타함에 승조중이던 중위가 윤 소령에게 무전받은 그대로 말투를 재현했다.[6] 북한 해군 서해함대는 '''제29해상저격여단 등지에서 특수교육을 받고 증원파견된 저격수를 함교에 배치하여 고속정 간 근접전 및 적함 지휘관 등의 인원들을 최우선 무력화하는 데에 응용'''한다. 결국 노천상태 함교에서 그대로 85mm 초탄 파편상을 입고 저격수에게 전사하고 만 것. 포탄에 전사했다면 관통공 및 구경 이모저모를 살펴볼 때, 당장 12.7mm만 가도 상하체가 분단되는 수준이라 상하체 분단 등의 극단적 외상흔적이 없었고 입관 전 윤두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등 쪽에만 외상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저격수에 의한 전사 확률이 높다. 당장 서해수호관 전시품 실물 중 제1연평해전 참전용사인 안지영 대령이 해상저격여단의 함상저격수에게 당한 흔적을 살펴보자.[7] 당시 상병, 사후 1계급 특진하여 병장.[8] 그리고 윤영하 대위에게 의료 조치를 취했던 박동혁 수병 역시 심각한 중상을 입어 결국엔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받다가 후유증으로 전사했다.[9] 개인이 VHS 테이프로 녹화한 것을 업로드한 것이 아니고 KBS 뉴스 공식계정이 윤영하 소령 추모 의미에서 원본 테이프에 녹화된 것을 업로드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