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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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석(楓石) 서유구(1764-1845)가 한자로 쓴 전통 백과사전. '임원(林園)'은 농촌을 뜻하고, '경제(經濟)'는 살림살이를 뜻하므로, 임원경제지란 농촌의 살림살이에 관한 서적을 말한다.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 때 사람으로서 당시에는 정약용과 동급이거나 더 높게 쳐 줬지만, 책이 너무 방대해서 이후 한글로 번역할 사람이 없었던 나머지 도리어 저평가되고 있는 비운의 대전집이다.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육조판서와 관찰사를 두루 역임했던 서유구는 관직을 떠난 뒤, 파주 장단 집에 내려와 살면서 몸소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실천, 82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임원경제지를 집필했다. 총 113권 54책, 252만 7083자로 개인이 저술한 단일 저작물로는 국내에선 최대 규모다. 관념에 치우친 조선 유학자의 학문 태도[1] 를 버리고 직접 음식을 차리고 옷을 짜보고 농기구를 만들며 조선시대 생활 전반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야말로 서유구가 36년간 혼자 만든 조선판 브리태니커.[2] 아들 서우보가 많은 부분을 도왔다. 그래도 정약용처럼 출판소 차린 정도는 아니고, 그마저도 아들 서우보(徐宇輔, 1795-1827)는 서유구보다 훨씬 먼저 죽었다.[3]
이런 책의 성격상 이공계 실력[4] 에 더해 한문까지 능숙하게 해독할 수 있는 문과적 실력까지 겸비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드물고, 대중을 위해 번역작업까지 하기는 힘들다. 제대로 된 번역서가 없으니 대중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이래저래 정약용과 자주 비교되는 서유구이다.
총 113권 52책으로 구성되었다. 모두 16지이기에 임원십육지, 임원경제십육지 (林園經濟十六志)로도 불린다. 2012년에 임원경제지 연구소에서 원본의 내용을 1632쪽짜리 책으로 개관서를 냈다. 번역본이 아니라 대강 서유구와 16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서인데도 이 정도이다. 전질을 완역하면 40권 분량이라고 한다.
유명한 판본 3종이 있는데 서울대 규장각 판본, 고려대 중앙도서관 판본, 오사카부립중지도도서관본이지만, 안타깝게도 셋 모두 완전한 판본이 아니다. 워낙 책 양이 방대하다 보니 옮겨적는 과정에서 오탈자가 많았던 듯하다. 중지도도서관 판본은 인제지(의료 부분)가 아예 없다.
조선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업부터 시작하여 의학, 무술, 방적, 요리[5] , 악기 다루는 법, 제사 지내는 법, 낚시 하는 법 등등 별의별 지식이 망라되었다. 물론 서유구가 모두 지은 것은 아니다.[6] 이미 존재하던 같은 농서인 증보산림경제 및 조선과 중국, 일본, 심지어 서양에서 들여온 서적까지 종합하여 조선 실정에 맞게 뺄 것은 빼고, 자신과 다른 유학자들의 연구[7] 를 더하고 가다듬어 만든 성격이 강하다.
서유구가 이렇게 노력한 결과 말도 안 되는 책이 나왔다. 동의보감마저도 틀린 부분이 있다면서 '''동의보감이 인용한 원전'''을 구해 비교분석한 후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수정한 부분도 있고, 한 가지 치료법에 대해 의학서적 간 다른 부분은 전부 파헤쳐서 겹치는 부분을 제외하고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것만 골라서 썼다. 이런 지난한 작업의 결과를 보면 괴물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것도 거의 혼자 다했다.#
이렇게 온갖 곡식 농사법과 농기구, 채소와 약초 재배, 온갖 국화류와 화훼 재배법, 과실수와 나무 재배, 각종 옷 직조법, 염색법, 가축 사육법, 165가지에 이르는 전통주, 전통 음식 요리법, 전통 건축, 보양법 등을 16개 분야로 정리했다. 또한 인용 목록을 정리했는데, 인용 서목 수가 '''893종'''에 달한다.
임원경제연구소 소개 자료에 의하면 의식주와 관련된 것이 9지(志)에 달한다. 즉 의식주의 비중이 적지 않다.
18세기, 19세기 실학 시대는 정약용을 비롯, 이익, 박제가, 정약전, 김정희 등 걸출한 인물을 많이 나왔고, 현대 학자들도 이들의 삶과 저서를 많이 연구했지만, 유독 서유구는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당대 가장 네임드는 서유구였다.
그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만도 64건이 있고, 일성록엔 505건, 승정원일기에는 1273건, 규장각 일지인 내각일력에는 무려 2788건이나 나온다. [12] 정조가 낸 시경 강의 시험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도 정약용이 아니라 서유구였다.
집안 또한 대대로 경화세족 가문으로 할아버지 서명응은 영조, 정조 시대의 명망 있는 학자로 고사십이집, 본사, 보만재총서 60책 등[13] 을 남겼고,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영조 말년 홍인한을 필두로 한 척신세력들이 당시 세손이던 정조의 대리청정을 방해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정조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도록 도운 일등공신이다. 규합총서의 저자 빙허각 이씨 또한 서유구의 하나뿐인 형수였고, 서유구 자신도 이전부터 완영일록, 화영일록 등 여러 책들을 저술하였다.
이런 집안[14] 출신에다 엄청난 능력으로 전통문화 콘텐츠의 보고를 만들었지만 그 방대함과 전문성 때문에 지금껏 한국고전번역원은 물론 누구 하나 번역에 손을 대지 못했고 결국 듣보잡이 되었다.
16지 중 번역이 완료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아직 번역 중이다.[15] 특히 전질 번역은 임원경제연구소. 완역을 목표로 예약 구매 및 후원을 받는 중이니 관심 있는 사람은 가보자. 지금도 번역 중인데 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중간에 한번 엎어졌는지 출판사도 바뀌었다. 2003년부터 번역을 시작했지만 아직 나머지 6지는 어찌될지 모른다.
자칭 컨텐츠의 보고라는데 과연 이걸 보고 활용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는 미지수. 하지만 사극 고증에 도움이 될 것만은 확실하다. 본리지는 완역되어 관심 있는 농부들은 유기농이나 친환경 농사에 관련하여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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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5)가 한자로 쓴 전통 백과사전. '임원(林園)'은 농촌을 뜻하고, '경제(經濟)'는 살림살이를 뜻하므로, 임원경제지란 농촌의 살림살이에 관한 서적을 말한다.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 때 사람으로서 당시에는 정약용과 동급이거나 더 높게 쳐 줬지만, 책이 너무 방대해서 이후 한글로 번역할 사람이 없었던 나머지 도리어 저평가되고 있는 비운의 대전집이다.
2. 상세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육조판서와 관찰사를 두루 역임했던 서유구는 관직을 떠난 뒤, 파주 장단 집에 내려와 살면서 몸소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실천, 82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임원경제지를 집필했다. 총 113권 54책, 252만 7083자로 개인이 저술한 단일 저작물로는 국내에선 최대 규모다. 관념에 치우친 조선 유학자의 학문 태도[1] 를 버리고 직접 음식을 차리고 옷을 짜보고 농기구를 만들며 조선시대 생활 전반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야말로 서유구가 36년간 혼자 만든 조선판 브리태니커.[2] 아들 서우보가 많은 부분을 도왔다. 그래도 정약용처럼 출판소 차린 정도는 아니고, 그마저도 아들 서우보(徐宇輔, 1795-1827)는 서유구보다 훨씬 먼저 죽었다.[3]
이런 책의 성격상 이공계 실력[4] 에 더해 한문까지 능숙하게 해독할 수 있는 문과적 실력까지 겸비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드물고, 대중을 위해 번역작업까지 하기는 힘들다. 제대로 된 번역서가 없으니 대중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이래저래 정약용과 자주 비교되는 서유구이다.
총 113권 52책으로 구성되었다. 모두 16지이기에 임원십육지, 임원경제십육지 (林園經濟十六志)로도 불린다. 2012년에 임원경제지 연구소에서 원본의 내용을 1632쪽짜리 책으로 개관서를 냈다. 번역본이 아니라 대강 서유구와 16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서인데도 이 정도이다. 전질을 완역하면 40권 분량이라고 한다.
유명한 판본 3종이 있는데 서울대 규장각 판본, 고려대 중앙도서관 판본, 오사카부립중지도도서관본이지만, 안타깝게도 셋 모두 완전한 판본이 아니다. 워낙 책 양이 방대하다 보니 옮겨적는 과정에서 오탈자가 많았던 듯하다. 중지도도서관 판본은 인제지(의료 부분)가 아예 없다.
3. 책의 성격
조선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업부터 시작하여 의학, 무술, 방적, 요리[5] , 악기 다루는 법, 제사 지내는 법, 낚시 하는 법 등등 별의별 지식이 망라되었다. 물론 서유구가 모두 지은 것은 아니다.[6] 이미 존재하던 같은 농서인 증보산림경제 및 조선과 중국, 일본, 심지어 서양에서 들여온 서적까지 종합하여 조선 실정에 맞게 뺄 것은 빼고, 자신과 다른 유학자들의 연구[7] 를 더하고 가다듬어 만든 성격이 강하다.
서유구가 이렇게 노력한 결과 말도 안 되는 책이 나왔다. 동의보감마저도 틀린 부분이 있다면서 '''동의보감이 인용한 원전'''을 구해 비교분석한 후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수정한 부분도 있고, 한 가지 치료법에 대해 의학서적 간 다른 부분은 전부 파헤쳐서 겹치는 부분을 제외하고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것만 골라서 썼다. 이런 지난한 작업의 결과를 보면 괴물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것도 거의 혼자 다했다.#
이렇게 온갖 곡식 농사법과 농기구, 채소와 약초 재배, 온갖 국화류와 화훼 재배법, 과실수와 나무 재배, 각종 옷 직조법, 염색법, 가축 사육법, 165가지에 이르는 전통주, 전통 음식 요리법, 전통 건축, 보양법 등을 16개 분야로 정리했다. 또한 인용 목록을 정리했는데, 인용 서목 수가 '''893종'''에 달한다.
4. 구성
임원경제연구소 소개 자료에 의하면 의식주와 관련된 것이 9지(志)에 달한다. 즉 의식주의 비중이 적지 않다.
- 본리지(本利志) 13권 : 곡식·농사백과
- 관휴지(灌畦志) 4권 : 식용풀백과
온갖 채소류, 나물류, 해초류, 약초류 재배법
- 예원지(藝畹志) 5권 : 화훼백과
온갖 화훼류의 재배법
- 만학지(晩學志) 5권 : 과실·나무백과
과실류와 풀열매류, 나무류 재배법
- 전공지(展功志) 5권 : 의류백과
뽕나무 재배, 누에치기, 비단짜기, 삼베 모시 칡 면화의 재배, 염색 및 길쌈법
- 위선지(魏鮮志) 4권 : 천문·기상 백과
서유구는 이런 천문학적 소양[10] 을 토대로 위도와 경도에 따라 작물과 시기를 달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이라면 모를까 조선 같이 조그만 땅덩어리에 무슨 위도며 경도를 따지냐며 까였다. 위에 말한 농가 달력표는 위도, 경도에 고도, 습도까지 계산한 풀달력이 있다. 대신 번역하기가 가장 난해하여 번역자들이 힘들어한다고 한다.
- 전어지(佃漁志) 4권 : 목축·사냥·어로백과
가축 사육, 사냥 도구와 사용 방법, 각종 어구와 어로 및 낚시
- 정조지(鼎俎志) 7권 : 요리백과
무시무시한 양이다. 조리법만 1070개. 무려 규합총서의 5배다. 카스텔라 조리법도 있다. 음식 재료에 대한 총론, 밥, 떡, 죽, 엿, 국수, 만두, 국, 탕종류의 요리, 한과, 김치, 고기 요리, 조미료 만들기, 술 담그기 등. [11]
- 섬용지(贍用志) 4권 : 건축·교통·일용품백과
취사 도구, 공작 기구, 복식 제도, 화장 도구, 실내 장식, 교통 수단, 도량형
- 보양지(葆養志) 8권 : 정신수양·건강 백과
정기신(精氣身)의 수련, 식이요법, 양로법, 육아법, 섭생법
- 인제지(仁濟志) 28권 : 의학백과
동의보감 이후 가장 방대한 전통 의학의 집대성. 내인, 외인, 내외겸인의 병인과 치료법, 부인과, 소아과, 외과, 응급 및 약 제조법, 약재 채취, 침구수혈, 구황, 탕액 색인으로 구성
- 향례지(鄕禮志) 5권 : 가정과 향촌 생활의 의례 백과
향음주례, 향사례, 향약, 관혼상제
- 유예지(游藝志) 6권 : 교양백과
독서법, 활쏘기, 회화, 서예, 음악, 수학
- 이운지(怡雲志) 8권 : 문화·예술백과
정원의 운용, 생활 용구와 차, 향, 거문고, 꽃과 돌, 애완 동물 사육법, 문방구, 예술품 감상, 서적, 명승유람, 각종 연회와 놀이
- 상택지(相宅志) 2권 : 풍수백과
주거 공간의 선택 방법과 전국의 명당. 대문, 담장, 울타리, 창고, 화장실, 외양간, 우물, 연못의 설치 방법
- 예규지(倪圭志) 5권 : 생활경제백과
가정 경제의 운영 방법과 상업 활동의 기초 자료, 지출과 절약 방법, 화재와 절도 예방, 재산 증식법, 전국의 산물과 시장, 거리 대조표
5. 저자의 약력
18세기, 19세기 실학 시대는 정약용을 비롯, 이익, 박제가, 정약전, 김정희 등 걸출한 인물을 많이 나왔고, 현대 학자들도 이들의 삶과 저서를 많이 연구했지만, 유독 서유구는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당대 가장 네임드는 서유구였다.
그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만도 64건이 있고, 일성록엔 505건, 승정원일기에는 1273건, 규장각 일지인 내각일력에는 무려 2788건이나 나온다. [12] 정조가 낸 시경 강의 시험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도 정약용이 아니라 서유구였다.
집안 또한 대대로 경화세족 가문으로 할아버지 서명응은 영조, 정조 시대의 명망 있는 학자로 고사십이집, 본사, 보만재총서 60책 등[13] 을 남겼고,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영조 말년 홍인한을 필두로 한 척신세력들이 당시 세손이던 정조의 대리청정을 방해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정조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도록 도운 일등공신이다. 규합총서의 저자 빙허각 이씨 또한 서유구의 하나뿐인 형수였고, 서유구 자신도 이전부터 완영일록, 화영일록 등 여러 책들을 저술하였다.
이런 집안[14] 출신에다 엄청난 능력으로 전통문화 콘텐츠의 보고를 만들었지만 그 방대함과 전문성 때문에 지금껏 한국고전번역원은 물론 누구 하나 번역에 손을 대지 못했고 결국 듣보잡이 되었다.
6. 기타
16지 중 번역이 완료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아직 번역 중이다.[15] 특히 전질 번역은 임원경제연구소. 완역을 목표로 예약 구매 및 후원을 받는 중이니 관심 있는 사람은 가보자. 지금도 번역 중인데 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중간에 한번 엎어졌는지 출판사도 바뀌었다. 2003년부터 번역을 시작했지만 아직 나머지 6지는 어찌될지 모른다.
자칭 컨텐츠의 보고라는데 과연 이걸 보고 활용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는 미지수. 하지만 사극 고증에 도움이 될 것만은 확실하다. 본리지는 완역되어 관심 있는 농부들은 유기농이나 친환경 농사에 관련하여 연구 중이다.
7. 같이보기
[1] 서유구는 당시 유학자들의 태도를 토갱지병(흙으로 만든 국, 종이로 만든 떡)과 같다고 비판했다.[2] 역사스페셜의 제목이 '''조선판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이다.[3] 이때 서유구가 남긴 글을 보면 매우 슬퍼했음을 알 수 있다.[4] 특히 생물, 천문, 기상, 의학, 조리 과학, 공학 분야에서.[5] 서유구의 형수가 규합총서를 지은 빙허각 이씨이다.[6] 다만 온전히 인용한 것은 아니고 자신의 저술 및 의견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7] 그 당시에 하백원이 개발한 '''자동''' 양수기도 추가 했다. 참고로 하백원도 유학자였고, 이런 기계들을 직접 만들었다.[8] 역시 유학자라 토지제도부터 짚고 넘어간다. 경묘법을 주장했다.[9] 풀달력(草曆)이라고 때에 따라 자라는 풀을 보고 경작시기를 알 수 있는 방법도 같이 실렸다.[10] 사실은 지리학에 가깝지만[11] 정조지는 2012년까지 밝혀진 우리나라 전통주 25%가량의 주조법이 수록되어있다.(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 우리 인물 세계와 통하다 권2) 그것도 서유구식으로 쉽고 자세하게. 원한다면 번역서를 사서 직접 담아볼 수도 있다.[12] 다만, 서유구가 앞에서 거론한 실학자들보다 관직생활이 길었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내직만 꼽아도 이조, 병조, 형조, 예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좌우참찬 등, 삼정승을 제외한 왠만한 직책은 다 거쳤다.[13] 정조가 “조선 400년 동안에 이런 거편은 없었다”고 최고의 평가를 내린 책들이다.[14] 하지만 할아버지 서명응은 사도세자의 비행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고,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벽파의 입장에 동조하여 정조의 비원이던 사도세자 추숭을 반대했다. 소론 출신이지만 노론 벽파의 입장에 동조한 소론 벽파라고 볼 수 있다.[15] 본리지, 관휴지, 만학지, 위선지, 섬용지, 유예지, 이운지, 상택지, 예규지, 정조지는 번역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