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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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Vigo
프랑스의 영화감독으로, 1930년대 시적 리얼리즘 열풍을 이끌었다.
1905년 4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던 병약한 아이 비고는 병원과 요양소를 들락거렸고, 정치 운동에 깊숙이 관련된 그의 부모들은 아이를 맡아 돌볼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는 무정부주의자·언론인 미겔 알메레다로, 제1차 세계 대전 중 반역자로 몰려 투옥되었다. 그리고 재판도 받기 전에 프렌 감옥 병원에서 의문사했다. 비고는 아버지의 의문의 죽음을 밝히려는 운동에 연루되었지만, 재발되는 병으로 인해 그런 노력들은 무산되었다. 이후 장 살르라는 가명으로 기숙학교에서 생활했다.
1926년 Font-Romeu의 결핵 요양소에서 폴란드 출생 리두 로진스카[1] 를 만났다. 둘은 1928년 함께 니스로 갔고, 1929년 1월 24일 결혼했다. 1931년 딸 루스 비고[2] 가 태어났다.
비고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도[3]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오던 중 1928년 파리에서 클로드 오탕-라라와 제르멘 뒬락을 만남으로써 촬영감독 레옹스 앙리 뷔렐의 조수로 일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즈음 그와 만나 의기투합한 보리스 카우프만[4] 은 비고의 영화들에서 촬영을 맡았다. 비고와 작업한 이로 또다른 중요한 인물은 작곡가 모리스 조베르이다. 비고의 두 극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한 그는 내러티브와 스타일의 요구에 맞도록 영화음악을 만들어내면서 시적 리얼리즘 운동에 공헌했다.
<니스에 관하여 A Propos de Nice>(1929)는 비고가 구입한 드브리 카메라로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비고의 첫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리비에라 휴양지의 게으른 유한계급의 모습과 니스의 빈민층을 병렬적인 이미지로 담고, 풍자적인 과장들과 성적 이미지들을 이용함으로써 초현실주의적인 도시 교향악을 만들어냈다. 그의 다음 영화 <수영 챔피언 장 타리 La Nata-tion par Jean Taris Champion de France> (1931)는 다소 완화된 초현실주의적 방식으로 한 유명한 수영선수의 모습을 그렸다.
두편의 영화로 경험을 쌓은 비고는 자크-루이 누네에게 투자받아 기숙학교에서 지냈던 어린시절 경험을 살려 <품행제로>를 만들었다. 자크-루이 누네는 장 비고에게 완전한 자율권을 주고 제작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이 작품은 항의를 받고 상영금지처분을 받는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아나키즘적인 성향과 당대교육현실에 대한 비판 탓에 교육계에서 비교육적이고 교권을 침해한다며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6년 2월 15일에야 해금되어 정식으로 상영하게 되었다.[5] 그 와중에 비고는 병이 점점 깊어진다.
<품행제로>의 수익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크-루이 누네는 장 비고를 재신임하여 <라탈랑트>를 찍게 해준다. 다만 전작이 너무나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장 비고로부터 시나리오를 미리 받아 보며 제작을 했다. 당시 프랑스의 극심했던 빈부격차를 남녀의 사랑을 통해 비판했던 이 영화는 장 비고가 아픈 몸을 이끌고 찬바람을 맞으며 촬영를 할 정도로 의욕적으로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라탈랑트>의 제작이 끝나갈 무렵, 제작사는 장 비고에게 영화를 좀 더 상업적인 방향으로 개선하라고 요구했지만, 당시 장 비고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제작사는 임시방편으로 본래 89분 정도였던 영화를 60분으로 편집하고[6] , 제목을 당대(當代)의 유행가 이름을 따와 지나가는 바지선(Le Chaland qui passe)으로 제목을 바꿔 상영했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하였다.
4편의 영화를 모두 실패하고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장 비고는 결국 라탈랑트의 촬영 직후인 1934년 10월 5일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향년 29세였다.
사상적인 면에서 무정부주의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때문에 생전에 남긴 4편의 영화에서 모두 필름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했다.[7] 때문에 작품에서 당대의 교육현실, 계급, 빈부격차 등을 비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생전에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를 호평하고 추천사도 남겼던 점에서 볼 수 있듯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장 비고는 초현실주의의 심리적이고 몽롱한 이미지 구상을 매우 형식적이고 정교한 촬영을 통해 보여주었다. 때문에 지금봐도 상당히 아름다운 장면들을 많이 뽑아냈다.
이렇게 당대의 비참한 현실을 초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세밀한 콘티를 통해 비판하는 특성은 당대 시적 리얼리즘 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작가인 만큼 그의 작품에선 유성영화의 초창기 특징을 제대로 옅볼 수 있다.
살아있을땐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지만,[8][9]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현재에는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중 하나로 통하고 있다. 사실상 시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통하며, 네오 리얼리즘과 프랑스 누벨바그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누벨바그의 주역들이 진정한 작가로 인정했던 감독들 중 하나[10] 이다.
장 뤽 고다르는 <기관총부대(Les Carabiniers)>를 장 비고에게 헌정했고, 영국의 감독 린지 앤더슨는 <품행제로>에서 영감을 받아 <만약(if....)>을 만들었으며, 프랑수아 트뤼포 역시 품행제로를 오마주해 <400번의 구타>를 만들었다. 그만큼 그에게 영향을 받고 오마주를 하는 감독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한국의 홍상수 역시 자신의 인생작으로 항상 라탈랑트를 꼽는다.[11] 홍상수 감독이 늘 하는 말이, 너무 아름다운 영화라고.
이런 그를 기려 1951년부터 장 비고 상이 제정되었으며[12] , 2005년엔 Quai de la Loire의 산책로(promenade)가 장 비고의 이름을 따서 promenade Jean-Vigo라고 명명되었다.
워낙 이른 나이에 요절한지라 홈 비디오 매체 대부분 장단편 모두 긁어모은 전집 형식으로 나오는 감독이다. 현 시점에서는 고몽이 판권과 필름을 소유하고 있으며 4K 복원이 완료된 상태다.
Jean Vigo
1. 개요
프랑스의 영화감독으로, 1930년대 시적 리얼리즘 열풍을 이끌었다.
2. 생애
2.1. 성장기
1905년 4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던 병약한 아이 비고는 병원과 요양소를 들락거렸고, 정치 운동에 깊숙이 관련된 그의 부모들은 아이를 맡아 돌볼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는 무정부주의자·언론인 미겔 알메레다로, 제1차 세계 대전 중 반역자로 몰려 투옥되었다. 그리고 재판도 받기 전에 프렌 감옥 병원에서 의문사했다. 비고는 아버지의 의문의 죽음을 밝히려는 운동에 연루되었지만, 재발되는 병으로 인해 그런 노력들은 무산되었다. 이후 장 살르라는 가명으로 기숙학교에서 생활했다.
1926년 Font-Romeu의 결핵 요양소에서 폴란드 출생 리두 로진스카[1] 를 만났다. 둘은 1928년 함께 니스로 갔고, 1929년 1월 24일 결혼했다. 1931년 딸 루스 비고[2] 가 태어났다.
2.2. 영화계 입문
비고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도[3]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오던 중 1928년 파리에서 클로드 오탕-라라와 제르멘 뒬락을 만남으로써 촬영감독 레옹스 앙리 뷔렐의 조수로 일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즈음 그와 만나 의기투합한 보리스 카우프만[4] 은 비고의 영화들에서 촬영을 맡았다. 비고와 작업한 이로 또다른 중요한 인물은 작곡가 모리스 조베르이다. 비고의 두 극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한 그는 내러티브와 스타일의 요구에 맞도록 영화음악을 만들어내면서 시적 리얼리즘 운동에 공헌했다.
<니스에 관하여 A Propos de Nice>(1929)는 비고가 구입한 드브리 카메라로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비고의 첫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리비에라 휴양지의 게으른 유한계급의 모습과 니스의 빈민층을 병렬적인 이미지로 담고, 풍자적인 과장들과 성적 이미지들을 이용함으로써 초현실주의적인 도시 교향악을 만들어냈다. 그의 다음 영화 <수영 챔피언 장 타리 La Nata-tion par Jean Taris Champion de France> (1931)는 다소 완화된 초현실주의적 방식으로 한 유명한 수영선수의 모습을 그렸다.
2.3. 도전기
두편의 영화로 경험을 쌓은 비고는 자크-루이 누네에게 투자받아 기숙학교에서 지냈던 어린시절 경험을 살려 <품행제로>를 만들었다. 자크-루이 누네는 장 비고에게 완전한 자율권을 주고 제작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이 작품은 항의를 받고 상영금지처분을 받는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아나키즘적인 성향과 당대교육현실에 대한 비판 탓에 교육계에서 비교육적이고 교권을 침해한다며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6년 2월 15일에야 해금되어 정식으로 상영하게 되었다.[5] 그 와중에 비고는 병이 점점 깊어진다.
2.4. 유작
<품행제로>의 수익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크-루이 누네는 장 비고를 재신임하여 <라탈랑트>를 찍게 해준다. 다만 전작이 너무나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장 비고로부터 시나리오를 미리 받아 보며 제작을 했다. 당시 프랑스의 극심했던 빈부격차를 남녀의 사랑을 통해 비판했던 이 영화는 장 비고가 아픈 몸을 이끌고 찬바람을 맞으며 촬영를 할 정도로 의욕적으로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라탈랑트>의 제작이 끝나갈 무렵, 제작사는 장 비고에게 영화를 좀 더 상업적인 방향으로 개선하라고 요구했지만, 당시 장 비고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제작사는 임시방편으로 본래 89분 정도였던 영화를 60분으로 편집하고[6] , 제목을 당대(當代)의 유행가 이름을 따와 지나가는 바지선(Le Chaland qui passe)으로 제목을 바꿔 상영했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하였다.
4편의 영화를 모두 실패하고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장 비고는 결국 라탈랑트의 촬영 직후인 1934년 10월 5일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향년 29세였다.
3. 작품 성향
사상적인 면에서 무정부주의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때문에 생전에 남긴 4편의 영화에서 모두 필름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했다.[7] 때문에 작품에서 당대의 교육현실, 계급, 빈부격차 등을 비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생전에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를 호평하고 추천사도 남겼던 점에서 볼 수 있듯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장 비고는 초현실주의의 심리적이고 몽롱한 이미지 구상을 매우 형식적이고 정교한 촬영을 통해 보여주었다. 때문에 지금봐도 상당히 아름다운 장면들을 많이 뽑아냈다.
이렇게 당대의 비참한 현실을 초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세밀한 콘티를 통해 비판하는 특성은 당대 시적 리얼리즘 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작가인 만큼 그의 작품에선 유성영화의 초창기 특징을 제대로 옅볼 수 있다.
4. 영향
살아있을땐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지만,[8][9]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현재에는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중 하나로 통하고 있다. 사실상 시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통하며, 네오 리얼리즘과 프랑스 누벨바그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누벨바그의 주역들이 진정한 작가로 인정했던 감독들 중 하나[10] 이다.
장 뤽 고다르는 <기관총부대(Les Carabiniers)>를 장 비고에게 헌정했고, 영국의 감독 린지 앤더슨는 <품행제로>에서 영감을 받아 <만약(if....)>을 만들었으며, 프랑수아 트뤼포 역시 품행제로를 오마주해 <400번의 구타>를 만들었다. 그만큼 그에게 영향을 받고 오마주를 하는 감독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한국의 홍상수 역시 자신의 인생작으로 항상 라탈랑트를 꼽는다.[11] 홍상수 감독이 늘 하는 말이, 너무 아름다운 영화라고.
이런 그를 기려 1951년부터 장 비고 상이 제정되었으며[12] , 2005년엔 Quai de la Loire의 산책로(promenade)가 장 비고의 이름을 따서 promenade Jean-Vigo라고 명명되었다.
워낙 이른 나이에 요절한지라 홈 비디오 매체 대부분 장단편 모두 긁어모은 전집 형식으로 나오는 감독이다. 현 시점에서는 고몽이 판권과 필름을 소유하고 있으며 4K 복원이 완료된 상태다.
[1] 나중에 딸 루스가 밝히길, 리두는 장의 영화에 단역으로 몇 번 출연했다. 다만 초단위 출연이나 다름 없어서 루스만 눈치챘다고.[2] 안타깝게도 루스 역시 아버지처럼 일찍 부모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부모가 타계한 후 외조부가 루스를 키우긴 했지만 외조부 역시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거의 고아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성장 후 영화 평론가 및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힘든 유년시절 때문인지 공식적으로 잘 언급하지 않았지만, 장 비고 상 관계자로 활동하긴 했다. 말년에 아들과 함께 아버지 장 비고를 회고하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안타까운 심경을 술회하기도 했다. 2017년 타계.[3] 장 뤽 고다르 역시 이 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4] 전설적인 촬영감독으로, 12인의 성난 사람들과 초원의 빛 등의 대표작이 있다. 러시아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동생으로도 유명하다. 이후에도 장 비고와 같이 협업했을 정도로 서로 궁합이 잘 맞았다는듯 하다.[5] 당시 이 작품을 관람한 사람이 프랑수아 트뤼포로, 영화에 크게 감탄했었다고 한다. 트뤼포는 이 영화에서 받은 영감을 <400번의 구타>에서 보여주기도 했다.[6] 이 영화는 원본이 분실되었다가, 1980년대 사본이 British National Film and Television Archive에서 발견되어 원본으로 복원되었다.[7] 처음 두 작품이 모두 다큐멘터리였다는 점 부터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8] 아마추어적이라고 혹평을 받기도 했다.[9] 병은 악화되고, 영화는 잘 안되자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팔기도 했다.[10] 누벨바그를 이끈 카이에 뒤 시네마의 주역들이 작가로 인정했던 다른 감독들로는 하워드 혹스, 알프레드 히치콕, 장 르누아르 등이 있다.[11] 데뷔하고 키노에서 인터뷰하던 시절부터 서울아트시네마 친구들 영화제, 네이버 영화 영화추천 시절까지 항상 라탈랑트를 인생작으로 꼽아왔다.[12] 알랭 레네와 클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도 수상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