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식(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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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장태수는 장현식의 증조부 장관수(張觀秀)의 사촌 동생인데, 장관수는 본래 장태수의 아버지 장한두(張漢斗)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가 출생 이후 큰아버지 장한방(張漢房)에 입양된 것이므로, 장현식에게는 종증조부가 된다.
2. 생애
장현식은 1896년(고종 33) 9월 17일 전라북도 금구군 서도면 상신리(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상신마을)에서 1894년(고종 31) 진사시에 급제한 아버지 장석규(張奭圭)와 어머니 울산 김씨 김동수(金東洙)의 딸 사이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구한말 호남 일대에서 만석꾼 집안으로 소문난 행재공(杏齋公) 장석보(張錫輔) 종가의 종손으로, 증조부 장관수(張觀秀)와 조부 장영숙(張榮肅) 또한 각각 1867년(고종 4), 1870년(고종 7) 진사시에 급제하는 등 유학자로서의 소양 및 학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2살 되던 1897년 12월 22일,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읜 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고, 주로 사숙을 다니며 한문 수학에만 열중하였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했고 그 해 11월 27일, 종증조부 장태수가 나라가 망한 울분에 24일간 단식하던 끝에 분사(憤死)하자,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때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고 곧 상경하게 된다.
그는 상경한 후 경기도 경성부 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거주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후 비밀결사인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창단되자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단의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 발간의 재정운영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및 사기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여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어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21년 3월 25일,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성수(金性洙)가 경영하고 김성수의 생부 김경중(金暻中)과 백부이자 양부인 김기중(金祺中)이 경영하던 중앙학교가 조선총독부의 고등보통학교 인가로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로 교명 개정이 이뤄지자, 4월 6일 박용희(朴容喜)와 함께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설립자 겸 교주(校主)가 되었다.# 교주가 된 이후에는 학교 총 재정의 50%를 담당하기 시작했으며, 정읍군 태인면(현 정읍시 신태인읍)에 있는 1000석의 규모의 농장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3일에는 조선인산업대회(朝鮮人産業大會)에 참여하여 산업조사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같은 해 김성수를 따라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기도 했는데, 종손으로서 집안을 지켜야한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 1년이 채 되지 않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25년부터는 동아일보사 감사에 취임하여 활동하였으며#, 1929년 10월 31일 조선교육협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총회가 개최되자 발기인의 한 명으로서 참석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1935년 3월에는 보성전문학교가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을 겸하여 도서관·대강당·체육관을 건설하고자 했는데, 이때 이석구(李錫九)와 함께 5천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즈음부터 그는 명륜정1정목(현 종로구 명륜동1가)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6월 7일에는 특이하게 1922년 9월 금구공립보통학교에 건축비용 1200원을 기부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포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1939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한국어 보존을 위해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3천원을 제공했으며, 1940년 11월까지 지인 등에게 권유해 1,400원을 제공하게 했다가 1943년 초 홍원경찰서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고, 8.15 광복 이틀 전인 1945년 8월 13일에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 기각되어 무죄로 석방될 수 있었다.#
한편, 1941년 11월 1일 부민관에서 친일단체 임전대책협력회(臨戰對策協力會)에서 개최한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 참석하기도 했었는데#, 이는 조선어학회에 가담하는 한편, 눈속임으로 참여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광복 후 9월 8일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하는 단체 및 행동 배격 결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데에 참여했으며#, 이튿날인 9일에는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고려청년당 창립준비회에 참석하여 고문에 추대되었다.# 1946년 8월 5일 한국민주당 서울시당부 임시집행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10월 13일에는 중앙집행위원에 보선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김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한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49년 8월 17일 신현돈의 후임으로 제2대 전라북도지사에 선임되었으나, 12월 초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신문기자단과 회견한 자리에서 "인사행정은 더욱 세밀하고 공정하여야 한다"고 말한 직후 12월 15일 돌연 경질되었다.# 1950년 3월 말에 민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같은 해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재차 전라북도 김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송방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는 6.25 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었고, 1950년 10월 24일 평양특별시(현 평양직할시)에서 사망했다. 최근 그의 묘소가 애국렬사릉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현식에게 1989년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