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04호'''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傳 原州 興法寺址 廉居和尙塔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문성왕6년(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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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경복궁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으로 보인다.
1. 개요
2. 내용
2.1. 수난사[1]
2.2. 상세
3. 바깥고리
4. 국보 제104호


1. 개요


傳 原州 興法寺址 廉居和尙塔.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통일신라 문성왕 6년인 844년(혹은 845년)에 제작된 승탑[2]으로, 염거화상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3] 본 승탑의 내부에서 동제염거화상탑지[4]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염거화상탑의 제작 시기 뿐만 아니라 염거화상탑이 한반도에 현전하는 승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는 염거화상탑은 한반도 승탑들의 효시이자, 승탑의 형식에 있어서는 일종의 표준형을 세워 이후에 만들어진 승탑들에 영향을 크게 미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본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위치한 흥법사지에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근거가 없어서 문화재명을 보면 전()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흥법사(興法寺)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조선까지도 명맥이 이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폐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법사와 관련된 유물로는 본 승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365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보물 제463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보물 제464호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 등이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수난을 겪는 바람에 염거화상탑과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진공대사탑비과 삼층석탑만이 겨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5][6]
본 승탑의 주인인 염거화상은 통일신라의 승려로, 출생시기는 불명확하지만 동제염거화상탑지에 의하면 844년에 입적했다. 그는 진전사 도의선사(道義禪師)의 제자이자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의 스승이었으며 가지산문(迦智山門)의 2대 조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1962년에 국보 제104호로 지정됐으며, 2021년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2. 내용



2.1. 수난사[8]


염거화상탑은 일제시대 이후 원위치를 떠나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 했다. 우선 원위치에서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반출하려다가 딱 걸리는 바람에 1914년 경에 서울 탑골공원으로 옮겨졌고,[9] 이후 불명확한 시기에 경복궁 경내로 옮겼다가,[10]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에 들어간 국립중앙박물관 앞뜰로 1986년에 다시 옮겨졌고, 2005년에는 용산에 새롭게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따라간 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문제는 염거화상탑을 탑골공원으로 옮기기 전의 본래 위치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관련 기록에는 "탑동공원내(塔洞公園內)로 옮겼다."[11]라고 쓰고는 원위치를 강원도 원주시 흥법사지라고만 기록해서, 그냥 원위치가 흥법사지인갑다 하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여러차례의 답사와 조사를 통해 현지 주민들은 염거화상탑이 옮겨진 바를 전혀 모르며, 흥법사지에 염거화상탑이 서 있던 흔적도 딱히 없어서 이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확인됐다.[12] 따라서 일제시대 때 염거화상탑의 원위치를 흥법사지라고 한 것은 근거 없는 조작이거나 착오에 의한 오기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염거화상탑의 원래 위치가 흥법사지인지 불명확하기에, 이름에 '전(傳)'이라는 딱지가 붙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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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제는 지붕돌 위의 상륜부(相輪部)[13]가 아예 증발해 버린 것이다. 일제시대 때 경복궁으로 옮기기 이전에 촬영한 사진에는 3단으로 된 상륜부가 명확하게 확인되지만, 현재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염거화상탑을 탑골공원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승탑 내부에서 동제염거화상탑지를 발견했는데, 아마도 옮기기 위해 승탑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관리 미흡으로 소실되었거나 몰래 빼돌려져 일본으로 반출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2.2. 상세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높이 1.7m의 화강암제 승탑이다. 본 승탑은 기단부터 몸돌과[14] 지붕돌[15]까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라고 칭한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지붕돌 위에 있던 상륜부는 일제시대에 사라져 버렸고, 기단 밑의 바닥돌도 사라진 것으로 보이나,[16] 전체적으로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조형성이 뛰어나 그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몸돌 아래의 기단을 세 부분으로 나누자면 윗돌, 가운데돌, 밑돌로 구분된다.[17] 다만 염거화상탑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것은 아니라서, 기단의 밑돌 아래에 또 바닥돌이 있어서 사실 이것이 밑돌이었고, 본 승탑을 원위치에서 옮기던 중 소실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18] 현재는 밑돌 아래에 정사각형의 바닥돌을 새로 깔아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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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거화상탑 기단부
기단 맨 아래 밑돌 부분(혹은 중대받침)의 측면 8개에는 각각 사자상이 새겨져 있으며,[19] 그 위에는 3개로 이루어진 작은 계단형 단을 마련했다. 이 3단 위에는 향로와 꽃무늬 등으로 장식된 8개의 면으로 구성된 가운데돌(중대석)이 있다. 윗돌[20]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윗돌의 아랫부분 중 가운데돌과 닿는 지점에는 3개로 된 역계단형 단이 새겨져 있다. 특히 윗돌의 아랫부분은 전체적으로 두 줄로 된 둥글넓적한 연꽃 무늬가 뚜렷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연꽃 무늬는 위아래로 각각 16개씩 새겨져서 측면을 원형으로 빙 두르고 있다. 또한 연꽃 무늬의 위로는 2단의 계단형 단이 만들어져서 윗돌의 윗부분과 만난다. 윗돌의 윗부분은 가운데돌처럼 8개면에 장식이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천부상(天部像)들이 조각되었다.[21] 윗돌 윗부분과 몸돌이 만나는 곳에는 역시 아래 부분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2단으로 된 계단형 단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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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거화상탑 몸돌과 지붕돌
염거화상의 사리가 모셔졌던 몸돌은 역시 8각형으로 되었으며, 각 면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기둥 장식[22]을 새겨놔서 서로 구분되게 해놨다. 또한 몸돌의 앞뒤로 문을 하나씩 새겨서 총 두개의 문이 있고[23] 그 문의 양옆에는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24] 문과 사천왕 모두 돋을새김으로 아주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문의 경우 자물쇠와 문고리 뿐만 아니라 문 위에는 꽃 무늬가 새겨진 굴곡이 있는 아치형 장식까지 만들어져 있으며 사천왕들은 대좌 위에 올라가 각기 상징하는 무기를 지니고 있는데 그 형체들이 아주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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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거화상탑 지붕돌 처마 부분의 비천상
비천상 아래에는 문과 자물쇠, 문고리, 꽃 무늬가 새겨진 아치형 장식이 있다.
몸돌 위에는 역시 팔각으로 된 지붕돌이 올라가 있다. 이 지붕돌 역시 그 묘사 정도가 상당히 섬세한데, 기와 사이의 기왓골도 하나하나 표현해 놨으며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도 하나하나 만들었다. 또한 지붕 위에 잡상을 배치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25][26] 지붕의 기와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붕 밑에는 처마까지 만들어놨는데 여기에는 비천상 조각들이 숨겨져 있다.[27] 이와 같이 실제 목조 건축의 여러 디테일들을 사실적이며 충실하게 표현해놔서, 본 승탑은 신라시대 건축물의 지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도 하다. 다만,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본래는 지붕돌 위에 상륜부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상륜부가 사라지기 전에 이를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보면, 상륜부는 3단(보륜(寶輪)-복발(覆鉢)-보륜)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공모양의 복발을 돌기가 돌출된 보륜들이 위아래로 감싸고 있던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염거화상탑의 상륜부가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사진이라도 남아 그 형태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승탑들의 상륜부의 형태를 추정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28]
이외에도 염거화상탑은 제작시기와 탑에 모셔진 사리의 주인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탑골공원에서 경복궁으로 염거화상탑을 옮기면서 승탑 내부에서 동제염거화상탑지가 발견되어 본 승탑의 제작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동제염거화상탑지는 동판에 염거화상탑에 대한 내역을 남긴 기록물인데, 본 동판에는

會昌四年歲次甲子季秋之月兩旬九日遷化廉巨和尙塔去釋迦牟尼佛入涅槃一千八百四年矣 當比國慶膺大王之時

회창사년세차갑자계추지월양순구일천화염거화상탑거석가모니불입열반일천팔백사년의 당비국경응대왕지시

동제염거화상탑지 명문[29]

[30]

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우선적으로, 명문에 염거화상탑이라고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어서 본 승탑에 모셔졌던 사리의 주인이 염거화상임이 확인되며, 이와 함께 이미 이 시기부터 승탑을 탑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회창(會昌)은 당나라 무종의 연호로 염거화상의 입적 시기를 회창 4년 갑자(甲子)로 적었는데, 9세기의 간지 상 육십갑자 중 갑자년은 844년이고[31] 경응(慶膺)은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이름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문성왕 6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32]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20세기에 들어서 이리저리 떠도는 수난을 겪으면서 본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게 됐으며 소실된 부분이 있어 안타깝지만, 전반적으로 보존상태가 좋고 승탑 그 자체의 우아한 기품과 섬세한 형태 그리고 청아한 조각 솜씨를 잘 간직하고 있다.[33] 또한 승탑 내부에 동제염거화상탑지라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 전해져서 승탑의 주인과 제작 연대가 명확하고, 현전하는 승탑 중에 건립 연도가 명확한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절대 연도도 확실하여 한반도 불교 미술 연구에 중요한 기준 중 하나를 제공한다. 또한 염거화상탑은 승탑 제작에 있어서 팔각원당형이라는 일종의 표준형을 제시해서, 이후에 만들어진 신라 승탑들[34] 뿐만 아니라 한반도 승탑 형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평가되는 귀중한 작품이다.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은 이와 같은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 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4. 국보 제104호


통일신라 말의 승려 염거화상의 사리탑이다. 염거화상(?∼844)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선(禪)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당시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며 선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체징에게 그 맥을 전하여 터전을 마련한 뒤 문성왕 6년(844)에 입적하였다.

이 탑은 원래 강원도 흥법사터에 서 있었다 하나,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탑이름 앞에 ‘전(傳:∼라 전하다)’자를 붙이게 되었고, 원래 위치에서 서울로 옮겨진 후에도 탑골공원 등 여러 곳에 옮겨졌다가 경복궁에 세워졌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탑은 아래위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면마다 소박한 조각이 멋스럽게 펼쳐져 있다. 밑돌에는 사자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가운데돌에는 움푹 새긴 안상(眼象)안에 향로를 새겨 두었다. 2단으로 마련된 윗돌은 아래단에는 연꽃을 두 줄로 돌려 우아함을 살리고 윗단에는 둥그스름한 안상(眼象) 안에 여러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사리를 모셔둔 탑신(塔身)의 몸돌은 면마다 문짝모양, 4천왕상(四天王像)을 번갈아 가며 배치하였는데, 입체감을 잘 살려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당시의 목조건축양식을 특히 잘 따르고 있어서 경사면에 깊게 패인 기왓골, 기와의 끝마다 새겨진 막새기와모양, 밑면의 서까래표현 등은 거의 실제 건물의 기와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탑을 옮기기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탑을 옮겨 세울 때 그 안에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리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단아한 기품과 깨끗한 솜씨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1] 본 단락은 전적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항목을 주 텍스트로 삼아 작성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2] 승탑은 불교 승려의 묘탑을 지칭하는 말이다.[3]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염거화상의 사리는 사라지고 없다.[4] 보물 제1871호로 지정되어 있다.[5] 흥법사지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6]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흥법사지[7]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8] 본 단락은 전적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항목을 주 텍스트로 삼아 작성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9]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염거화상탑[10] 이때 옮기면서 승탑 내부에서 동제염거화상탑지가 발견됐다고 한다.[11] 탑동공원은 탑골공원의 별칭이다.[12] 현지답사 때 현지 주민들로부터 확인한 바에 의하면, 여기서 옮겨진 것은 앞서 언급된 '진공대사탑 및 석관'으로 보인다.[13] 이를 머리장식이라고도 한다.[14] 이를 탑신(塔身)이라고도 한다.[15] 이를 옥개석(屋蓋石)이라고도 한다.[16]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염거화상탑, e뮤지엄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17] 혹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경우 기단을 상대석, 중대석, 중대받침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18] 염거화상탑과 쌍봉사 철감선사탑을 비교해 살펴보면, 염거화상탑에도 본래는 밑돌(바닥돌)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 물론 원래부터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19] 풍화에 의해 사자들의 형태가 그다지 뚜렷하지는 않다.[20] 가운데돌 위부터 몸돌 아래 까지를 윗돌이라 하는데, 참고 문헌에 따라 이 부분을 '2단으로 된 윗돌' 혹은 '상대석과 탑신굄돌'로 상이하게 구분한다. 본 문서에서는 전자의 시각을 따르도록 한다.[21] 참고문헌에 따라서는 비천상으로 보기도 한다. 참조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염거화상탑[22] 이를 우주(隅柱)이라고 한다.[23] 이렇게 새겨진 문 장식을 문비(門扉)라고 한다.[24] 따라서 총 8개의 면 중에 6면에 문과 사천왕등의 장식이 있고 나머지 2면에는 장식이 없다.[2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26] 다만 잡상은 고려시대 건축에 들어서야 그 존재가 확실하게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잡상의 흔적이 아닐 수도 있다.[27] 비천상은 처마의 모든 면은 아니고 한 면씩 건너 뛰어서 총 4면에 배치되어 있다.[28]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2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30] 혹은 '회창사···환화염거화상탑···당차국경응대왕지시(會昌四···還化廉巨和尙塔···當此國慶膺大王之時)'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염거화상 탑지판[31] 출처 : 한국어 위키백과 - 갑자[3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33]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서울 -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두산백과 -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34]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구례 연곡사 동 승탑